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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이 언제인지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100년 전 나라를 잃은 경술국치일이 8월 29일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말 그대로 치욕스러운 날이기 때문에 드러내놓고 기념한다는 것이 언감생심이었던 사회 분위기 탓도 있다.

그러나 승리와 영광의 역사만큼이나 패배와 아픔의 역사 또한 기록하고 반추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팔봉 김기진이 말했듯 '조선왕조 500년의 마지막 페이지'인 영친왕의 생애를 예사롭게 넘길 수는 없을 것이다.

신혼시절의 영친왕 내외
 신혼시절의 영친왕 내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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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500년의 마지막 페이지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겉그림.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겉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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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페이퍼로드/8월 15일 출간)은 영친왕이라는 열쇠구멍으로 들여다본 왕조의 몰락과 왕실 사람들의 말로, 그리고 이를 둘러싼 현대사 이면의 숨겨진 이야기들을 당사자들의 생생한 육성에 실어 들려주는 소중한 기록이다.

이와 더불어, 황태자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자연인으로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간 영친왕 이은 씨의 안타까운 운명과 인간적인 면모를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것처럼 흥미진진하게 서술하고 있다. 

이 책에는 영친왕뿐만 아니라 그와 인연을 맺은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아버님 고종과 형님 순종은 물론이고 덕혜옹주, 명성황후, 윤대비 등 왕가의 여인들, 그리고 의친왕과 이우 공을 비롯한 왕손들의 다채로운 에피소드는 쓸쓸하지만 때로는 흐뭇한 왕실의 뒤안길을 보여준다.

영친왕의 황태자비로 간택되었다가 파혼 당함으로써 평생 처녀로 늙었던 민갑완 여사, 고종을 도와 조선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다 말년에 한국으로 돌아와 평소의 소원대로 한국 땅에 묻힌 헐버트 박사의 뒷이야기는 눈물을 자아내게 한다.

이승만과 박정희, 이토 히로부미와 맥아더 같은 역사적 인물들도 선연이든 악연이든 영친왕과 각별한 인연이 있었다. 오사카 역에서 중국의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를 만난 것도 영친왕의 비극적인 삶에 방점을 찍는 장면이다. 

격조의 왕자, 침묵의 왕자

일본으로 끌려갈 당시의 영친왕과 태자대사 이토 히로부미.
 일본으로 끌려갈 당시의 영친왕과 태자대사 이토 히로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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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친왕은 기울어진 나라의 운명처럼 신산한 삶을 살았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가 되어 조선의 제28대 왕통을 계승했지만, 형님이자 선왕인 순종이 승하했을 때는 이미 나라가 사라져 계승할 왕위도 없어진 뒤였다.

열한 살 어린 나이에 일본에 끌려갔고 일본의 왕족과 정략결혼을 했으며 1963년에 귀국할 때까지 50여 년을 일본에 머물렀다. 해방되기 전에는 일제의 볼모로 묶여있었고, 해방되고 나서는 이승만 대통령의 견제로 귀국할 수 없는 신세였다.

이 모든 역경에도, 온화하고 성실한 영친왕은 황태자로서의 기품과 격조를 잃지 않았으며, 작은 일이라도 조국과 민중에 봉사할 수 있는 것이 없을까 늘 고심했다.

6·25전쟁으로 한국에 주둔한 유엔군을 위해 <A First Book of Korean>이라는 한국어 교본을 저술한 일이나, 공부를 하려고 일본에 밀항한 청소년들을 구제하기 위해 백방으로 애쓴 일 등은 이런 노력의 일환이었다.

때가 오기까지는 모든 것을 꾹 참고 기다리라는 고종의 마지막 가르침을 가슴에 새긴 영친왕은 무척이나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기쁠 때는 미소를 약간 짓고 슬플 때는 억지로 참고 있다가 아무도 없는 밤중에 이불 속에서 혼자 우는 것이 제2의 천성이 되었다.

말년에는 실어증마저 겹쳤다. 그리운 조국에 돌아온 뒤 7년간 병상에 누워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고 깊은 한을 품은 채 영면했다. 나라를 빼앗긴 죄과 때문에 역사와 백성 앞에서 유구무언일 수밖에 없는 왕가의 업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최후였다. 하나뿐인 여동생 덕혜옹주도 정신병에 걸려 말을 잃었으니 남매의 운명 또한 기구했다.

고종이 덕수궁에 설립한 유치원에 다니던 때의 덕혜옹주(앞줄 가운데).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필자의 아내 민덕임이다.
 고종이 덕수궁에 설립한 유치원에 다니던 때의 덕혜옹주(앞줄 가운데).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필자의 아내 민덕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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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어죽더라도 내 나라를 상대로 소송을 하지는 않겠소

영친왕의 담백한 성품을 잘 보여주는 일화도 있다. 제3대 국회에서 '구황실 재산처리법'을 제정하여 고궁과 왕릉을 포함한 구황실의 모든 재산을 국유화했다. 한국 정부는 심지어 도쿄에 있는 영친왕의 저택마저 (주일대표부 건물로 쓰기 위해) 국유라며 내놓으라고 우겼다. 뜻있는 일본 변호사 한 사람이 막대한 구황실 재산의 계승자인 영친왕에게 소송을 권했다.

"전하, 한국 정부에서 전하의 재산을 다 빼앗고 생계비도 드리지 않는 것은 법률 위반이므로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면 꼭 이깁니다. 재판을 거실 생각이 있으시다면 변호는 제가 무료로 해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영친왕은 잘라 말했다.

"선생의 호의는 고마우나 이것은 우리나라 내부의 일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그리고 나는 아무리 곤란하더라도 내 나라 내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할 생각은 없소이다." (p234)

나라를 팔아먹은 자들의 후손들이 매국의 대가로 받은 땅을 자기 것이라고 우겨서 끝끝내 그것을 삼켜버리는 후안무치가 횡행하는 요즘, 염치란 무엇인지를 우아하게 가르쳐주는 본보기라 하겠다.

해방 후 도쿄에서 영친왕 내외(가운데 앉은 두 사람)와 함께한
필자(가운데 서 있는 사람)와 필자의 아내 민덕임(오른쪽 끝).
 해방 후 도쿄에서 영친왕 내외(가운데 앉은 두 사람)와 함께한 필자(가운데 서 있는 사람)와 필자의 아내 민덕임(오른쪽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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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를 구출한 김을한 기자의 영친왕 이야기

저자 김을한과 영친왕의 만남은 운명적이다. 김을한의 백부 김황진은 오랫동안 고종황제를 곁에서 보필한 시종이었고, 아내 민덕임은 명성황후의 친정인 여흥 민씨 가문의 여식으로서 덕혜옹주의 유치원 시절 동무였다. 저자 스스로는 신문사 특파원으로 도쿄에 주재하던 1950년부터 영친왕과 개인적인 인연을 맺었으며, 이후 영친왕이 서거할 때까지 어려운 처지의 영친왕에게 망국의 충신처럼 헌신했다. 

김을한은 기자다운 엄밀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냉정한 사가(史家)의 눈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깊은 애정과 연민을 담아 이 책을 서술하고 있다. 영친왕과 덕혜옹주의 가련한 운명을 안타까워하고 그들이 선조의 땅에서 눈을 감고 뼈를 묻게 하겠다는 김을한의 뜨거운 마음이 절절하게 묻어나는 문장은 읽는 이로 하여금 인간 영친왕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서게 만든다. 그가 쓴 서문의 제목이 '끝없는 한, 마르지 않는 눈물(無窮限 不盡淚)'인 까닭도 여기에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이송원 기자는 책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기획/편집자입니다.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김을한 지음, 페이퍼로드(2010)


태그:#영친왕, #한일합병, #덕혜옹주, #김을한, #마지막 황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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