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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학교에 들어간 큰 딸 한결이가 어느덧 고3이라는 딱지를 달고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입학식 날 소감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두근거리는 가슴을 주체 못해 얼굴도 못 들고 쪽지를 내리 읽기만 했던 아이가 이제는 제법 논리적으로 대화를 시도하는 성숙함을 보이고 있다.

귀농을 하던 4년 전, 큰 딸은 중3이었고 아빠의 귀농을 눈물을 흘리며 반대했다. 당연히 아이는 학교생활에 적응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낯선 시골에서의 허전함을 교회 생활로 달래는 듯보였다.

아빠 눈에도 아이는 점차 교회의 외형적 신앙에 빠지는 듯보여 걱정이 크던 차, 아이는 시골에 내던져진 현실의 돌파구를 찾는 심정으로 대안학교에 응시했고 다행히 결과는 합격이었다.

눈물 흘리며 귀농 반대한 아이가 달라졌어요

대안학교 고3 여학생들이 하나되기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 고3들의 물놀이 대안학교 고3 여학생들이 하나되기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 이종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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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아이의 변화는 시작되었다. 1학년 여름 방학, 집으로 돌아 온 아이는 아빠의 귀농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마음을 열어왔고, 외형적 신앙도 차츰 내면으로 성숙되는 변화를 보여 주었다. 무엇보다 다양한 독서량을 통해 아이의 정신세계, 세상을 보는 눈이 넓고 깊어짐을 느낄 수 있었다. 부모의 입장에선 한없이 뿌듯했고 만족스러웠다. 교육의 힘이었다.

제3세계와 국제사회에 관심이 많은 아이는 2학년 가을 '한반도'라는 주제로 학교 축제를 치른 후 자신의 꿈을 세계 무대로 키우고 있었다. 유엔 기구에서 일하고 싶다는 딸아이의 희망전공은 국제관계학이었다.

한편으론 대견스러우면서도 꿈이 너무 크지 않나 하는 우려가 들었다. 객관적인 지적조차 아이에겐 꿈을 죽인다는 원망을 들을까 신경이 쓰였다. 너무 일찍이 전공을 정하고 대학을 가다 나중에 자신의 적성과 소질을 깨닫고 후회하는 경우를 익히 봐왔기에 천천히 진로를 모색하자고 대화를 나누었다. 고교 졸업 후 바로 대학엘 가야 한다는 고정관념도 버리라고 조언해 주었다.

아이는 고3이 되면서 뭔가 초조해지는 듯보였다. 목표하는 대학도 잡아 놓고 했지만 그동안 대안학교에서 배운 진짜 학문은 입시와는 현실적으로 거리가 있었다. 겨울방학 내내 아이는 식구들에게 학업분위기 조성을 위한 정숙을 강조했고, 학원 한 번 못 가는 아이를 위해 그 정도는 기꺼이 감수했다.

그래도 고3인데, 1박2일 물놀이 캠프?

고3들의 하나되기, 밤이 되자 기타에 맞춰 노래를 부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 여름밤의 노래 놀이 고3들의 하나되기, 밤이 되자 기타에 맞춰 노래를 부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 이종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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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을 석 달 가량 남겨 놓은 여름, 방학은 시작되었고 집으로 돌아 온 아이는 여학생들의 하나 되기 일정을 준비했다. 동기 여학생 15명이 경북 상주의 우리집에서 1박 2일로 하나되기 물놀이 캠프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입시 공부에 매달리지 않는다는 대안학교지만 그래도 명색이 수능을 몇 달 남겨 놓은 고3인데 1박2일로 물놀이 캠프를 한다는 게 선뜻 이해가 되질 않았다. 하지만 이 역시 나만의 고정관념이었음을 시인해야 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13명의 고3 여학생들은 시원한 여름 복장에 금방이라도 물 속에 뛰어들 기세로, 활기차고 건강한 웃음으로 서로를 맞이했다. 입시지옥에 시달리는 고 3의 고달픈 얼굴은 그들에게서 찾아보기 어려웠다.

나의 임무는 아이들이 가는 날까지 차량 운전에 안전 담당이었다. A4용지에 한 장 한 장 써서 집 앞에 붙여 놓은 환영의 문구를 본 아이들은 고마움으로 화답했고 카레로 점심을 때운 아이들은 곧바로 계곡으로 향했다.

계곡에 도착한 아이들은 천진한 동심 그 자체로 돌아갔고 한여름의 물놀이는 보는 이조차 시원하게 해주었다. 수능과는 아랑 곳 없다는 듯, 아이들의 물놀이는 내게 아득한 기억 너머의 고3시절을 떠오르게 해주었다. 시험과 시험, 성적 발표, 대학 서열을 셀 수도 없이 오르락 내리락 거렸던 내게 고3 여름은 시험을 앞둔 전투의 계절이었다.

고2 겨울방학 때는 외출을 금지하겠다며 눈썹을 밀었고, 여름방학 때는 종종 의자에 몸을 묶고 공부하는 촌극을 자행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올 기억이지만 당시로선 그만큼 절박한 심정이었다. 그로부터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아이들은 입시에서 해방되기는커녕 더욱 치열한 입시전쟁에 시달리고 이제는 대학조차 취업의 학원 역을 하고 있다니 삶의 질은 날이 갈수록 고달파지는 것 같아 아이들의 미래가 암담하기까지 하다.

두 시간 가량을 물에서 놀던 아이들은 준비한 라면을 끓여 맛있게 먹은 후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 식사를 기다리는 자유시간 동안 아이들은 각자 알아서 움직였다. TV 보는 아이들은 연예인 이야기로 꽃을 피우고, 책을 읽거나 기타 치는 아이, 산책하는 아이 등 누구의 통제도 없이 아이들은 스스로 자기들의 시간을 보냈다. 그들의 입에서 어느 대학이 어떻고 점수가 어떠니 하는 등의 얘기는 없었다.

어두워지자 아이들은 마당으로 모여 앉았고 기타 반주에 맞춰 노랫소리가 산골의 하늘에 울려 퍼졌다. '꼴찌도 괜찮아'라는 노래를 부를 땐 서로가 깔깔거리며 즐거움이 파도를 타고 있었다. 노는 자리마다 사회자의 진행 등에 익숙해 온 나로선 어딘지 모르게 엉성하게 보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분위기는 고조되었다. 슬며시 자리를 빠져 나오면서 공부보다 더 중요한 스스로 살아가는 힘을 배우고, 틀에 박힌 대학 서열 따위를 노랫가사로 흘려버리는 아이들의 여유가 한없이 부러워졌다.

아이들은 정말 믿어주는 대로 크나봐

다음날 아침, 아이들은 예정에 없던 포도상자 옮기기 봉사활동을 펼친 후 서로 열심히 살자는 인사말을 나누고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큰 딸도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학업 책을 펼쳤고 우리 집은 다시 수험생을 위한 정숙 분위기로 전환됐다.

큰딸에게 질문을 던졌다.

"너희들은 모이면 대학 이야기는 안하니?"
"가끔씩 해요."
"이번에 우리 집에선 그런 얘기 없던데."
"놀러 온 거잖아요."

할 말 대신 고개가 끄덕여졌다. 돈과 노동, 일과 휴식 사이에서 갈지자 걸음을 하는 우리의 삶에 대해 새삼 느낌표 부호를 던져 준 의미 있는 여름 행사였다.


태그:#귀농 , #고3, #물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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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을 찬 유학자 남명 조식 선생을 존경하고 깨어있는 농부가 되려고 노력중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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