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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정부관광청은 올해와 내년을 '스위스 걷기여행의 해(The Year of Walking)'로 정했다. 그림같은 풍경의 알프스만 감상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자연과 호흡하고 사람들과 만나는 여행을 적극 알리겠다는 취지다. 지난 4월 6일에는 (사)제주올레와 공동 발전을 위한 업무 제휴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걷기여행의 노하우를 배우고, 네트워킹을 강화하기 위해서다. 빠르면 올 하반기에는 스위스 하이킹 코스에 제주올레 홍보 표지판이 설치된다. 스위스를 방문하는 한국 여행자들을 위한 '스위스 올레' 같은 하이킹 코스도 선보일 예정이다. <오마이뉴스>는 스위스 정부 관광청의 지원을 받아 지난 6월 6일부터 12일까지 '7일5박' 일정으로 스위스의 라보지구, 체르마트, 알레치 빙하, 루체른 호수 일대의 하이킹 코스를 걸었다. 몇 차례에 걸쳐 '스위스 올레 여행기'를 연재한다. [편집자말]
스위스 발레(Valais)주에 위치한 리더알프의 해발고도는 1914m. 우리나라 한라산 정상쯤에 해당하는 높이다. 이 지역 산비탈에는 개량화된 목조 가옥들이 삼삼오오 무리지어 있다.
 스위스 발레(Valais)주에 위치한 리더알프의 해발고도는 1914m. 우리나라 한라산 정상쯤에 해당하는 높이다. 이 지역 산비탈에는 개량화된 목조 가옥들이 삼삼오오 무리지어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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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3일째인 6월 8일 오후 체르마트 시내에서 관광청 직원 스벤 하우저(Sven Hauser)와 맥주 한 조끼를 마시고 다음 행선지로 발길을 옮겼다. 체르마트(Zermatt)~브리그(Brig)~뫼렐(Mörel)까지는 기차로 이동하고, 뫼렐에서 리더알프(Riederalp)까지는 대형 로프웨이(독일어로는 루프트자일반 Luftseilbahn)를 타고 올라갔다. 대충 눈 짐작으로 봐도 30~40˚ 각도의 가파른 산비탈이다. 리더알프의 해발고도는 1914m. 한라산 정상에 해당되는 높이다. 산비탈 곳곳에는 개량화된 전통 목조 가옥들이 삼삼오오 무리지어 있다.

한국에서부터 함께 온 스위스정부관광청 박윤정 과장이 체르마트를 떠날 때부터 다음날 '강행군' 일정이 기다리고 있다며 슬슬 엄포를 놓는다. "알레치 숲길 하이킹은 아침 일찍부터 시작해 다섯 시간쯤 걸어야 하고, 오후에는 루체른으로 가서 두 시간쯤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는 것이고, 오늘은 오늘의 태양이 뜨는 것이니 '미리 걱정할 게 뭐 있냐'고 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취재를 마치고 따져보니 그날 우리는 알레치 숲길에서 약 9km, 루체른에서 약 7km의 하이킹 코스를 걸었다. 걷고, 기차 타고, 또 걷는 일정이었다.

게쉬닛첼테스, 뢰스티, 피렛 드 페르슈에 이어 퐁듀까지

로프웨이를 타고 12분 가량 올라가자 산간마을 리더알프에 도착했다. 오늘 짐을 풀 곳은 아트 퓌러(Art Furrer) 호텔이고, 먹고 잘 곳은 30분 정도 더 걸어가면 나오는 산장 호텔 리더푸르카(Riederfurka). 두 곳 모두 아트 퓌러가 운영하는 숙박 시설이다. 로프웨이 승강장에 도착하니 호텔 마케팅 담당인 마리오 브라이데(Mario Braide)가 마중 나와 있었다. 그가 몰고 온 차는 체르마트에서 타봤던 전기택시와 똑같았다. 낯 익으니 반가웠다. 이곳 역시 휘발유 차량 금지 구역이었다.

리더푸르카(2065m)는 리더알프 산간마을의 꼭대기에 위치한 샬레풍의 산장 호텔이다. 호텔 아래로 내려가면 곧장 알레치(Aletsch) 숲길이 나온다. 근처에는 빌라 카셀(Villa Cassel)이라는 환경보호센터 목조 건물이 있다. 이곳에는 알레치 지역의 자연과 역사에 관한 자료가 전시돼 있다. 호텔 입구에 4m짜리 '빅 스키'가 걸려 있다. 나중에 알고보니 호텔 주인 아트 퓌러가 묘기스키를 탈 때 직접 사용했던 것이라고 한다. 사람 키 두 배가 넘는 스키를 보는 것만으로도 신기했다.

산장 호텔 리더푸르카(Riederfurka) 입구에는 이 호텔의 주인인 아트 퓌러가 묘기스키를 탈 때 사용했던 4m짜리 '빅 스키'가 걸려 있다. 호텔 앞에서 매니저 아네트가 밝게 웃고 있다.
 산장 호텔 리더푸르카(Riederfurka) 입구에는 이 호텔의 주인인 아트 퓌러가 묘기스키를 탈 때 사용했던 4m짜리 '빅 스키'가 걸려 있다. 호텔 앞에서 매니저 아네트가 밝게 웃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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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장 호텔 리더루프카의 매니저인 아네트(Annette)가 취재팀을 위해 퐁듀 요리를 내놓았다.
 산장 호텔 리더루프카의 매니저인 아네트(Annette)가 취재팀을 위해 퐁듀 요리를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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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장 호텔에서의 저녁식사. 메뉴는 퐁듀. 스위스 여행에서 가장 기대했던 음식 로망 가운데 하나다. 송아지 고기 크림 스튜인 취리히 스타일의 '게쉬닛첼테스(Geschnetzeltes)'와 스위스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감자 요리인 '뢰스티(Rösti)', 레만 호수에서 잡은 담수어(농어의 한 종류) 요리인 '피렛 드 페르슈(Filet de Perche)'는 이전 여행지에서 먹어봤다. 그러나 퐁듀는 처음이다. 우리 일행만 묵고 있는 분위기 있는 산장 호텔에서 스위스 와인을 곁들인 퐁듀 요리를 먹는다니, 생각만으로도 즐거웠다.

퐁듀(fondue)는 스위스 산악지방에서 즐겨먹던 겨울철 요리다. 우리나라 뚝배기처럼 두께가 두꺼운 도자기 냄비에 그뤼에르 치즈나 에멘탈 치즈 등을 넣고 화이트 와인과 버찌로 만든 증류주 키르슈로 녹인다. 깍두기만한 크기로 자른 식빵을 가늘고 긴 포크에 꽂아 도자기 냄비 안의 녹은 치즈를 휘휘 저어 먹는 음식이다. 처음에는 남은 치즈를 재활용해 먹는 서민적인 음식으로 출발했는데 외국 사람들에게는 고급 음식으로 대접받는다. 먹어보진 않았지만 튀김 냄비에 기름을 끓인 뒤 쇠고기나 돼지고기를 익혀 먹는 미트(오일) 퐁듀도 있다고 한다.

리더푸르카 호텔 매니저인 아네트(Annette)가 우리 일행을 위해 일반 치즈와 토마토 소스를 가미한 치즈, 두 종류의 퐁듀 요리를 내놓았다. 약한 불로 도자기 냄비 안의 치즈가 굳지 않도록 했지만, 그래도 먹을 때마다 8자로 저어야 한단다. 스위스에서 먹어본 퐁듀 요리는 생각보다 짭조름했다. 퐁듀뿐만 아니라 게쉬닛첼테스도 조금 짠 편이었다. 일본 음식이 전반적으로 단맛이라면, 스위스 음식은 짠맛이었다. 내 입맛만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새로운 경험을 한다는 것 자체가 여행의 즐거움이다.

스위스에서 가장 크고 긴 알레치 빙하를 만나다

이튿날, 휴대폰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을 떴다. 시계를 보니 오전 5시. 날이 밝았다. 호텔 1층에 내려가보니 아네트가 취재팀의 아침과 점심 샌드위치를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우리 일행이 아침을 먹고 있는데, 아트 퓌러가 왔다. 그는 1959년부터 1972년까지 미국 할리우드에서 묘기스키로 여러 영화에 출연해 인기와 돈을 모았고, 다시 스위스로 돌아와 활동하다가 지금은 리더알프 지역에서 여러 개의 호텔을 운영하고 있다. 스위스에서 유명한 사람이다. 아트 퓌러는 순박하고 고집 센, 스위스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강한 모범적인 중산층처럼 느껴졌다.

오전 6시 샌드위치와 음료수를 챙겨 알레치 숲길 하이킹에 나섰다. 알레치 빙하(Aletsch Glacier) 트레킹은 크레바스 때문에 어렵고 빙하를 볼 수 있는 지점까지 가는 일정이다. 알레치 빙하는 발레(Valais)주 북동부에 위치해 있으며 스위스에서 가장 크고 긴 빙하다. 전체 길이는 23km 정도이며 약 265억t의 얼음으로 이뤄져 있다. 빙하 두께가 700~800m에 이르는 곳도 있다. 마치 강물이 흐르듯 융프라우에서 리더알프와 배트머알프(Bettmeralp)로 이어진다. 알레치 빙하는 스위스에서는 처음으로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됐다. 1933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알레치 숲은 유럽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삼림 보호 구역이다.

알펜로제(Alpenrose)는 진달래과에 속한 나무로 피레네 산맥이 원산지다. 잎은 타원 모양이고 표면에 윤기가 흐른다. 꽃은 7∼8월에 연한 붉은색 또는 진분홍색으로 핀다.
 알펜로제(Alpenrose)는 진달래과에 속한 나무로 피레네 산맥이 원산지다. 잎은 타원 모양이고 표면에 윤기가 흐른다. 꽃은 7∼8월에 연한 붉은색 또는 진분홍색으로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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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치 숲길에는 뿌리째 뽑힌 나무들이 그대로 놓여져 있다. 통행에 방해가 되는 나무들만 옆으로 치우고 나머지는 그대로 놔두는 게 국립공원 관리 원칙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알레치 숲길에는 뿌리째 뽑힌 나무들이 그대로 놓여져 있다. 통행에 방해가 되는 나무들만 옆으로 치우고 나머지는 그대로 놔두는 게 국립공원 관리 원칙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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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퓌러가 직접 가이드를 자청했다. 그는 유럽산액연맹 공인 가이드 자격증을 갖고 있는데다 이 지역에서 오래 살아 알레치 빙하와 숲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애정이 넘쳤다. 74세인데도 발걸음이 젊은이 못지 않다.

숲깊 초입에 들어서니 알펜로제(Alpenrose)가 눈에 띈다. 진달래과에 속한 나무로 피레네 산맥이 원산지다. 잎은 타원 모양이고 표면에 윤기가 흐른다. 짙은 녹색으로 가장자리가 뒤로 말린다. 꽃은 7∼8월에 연한 붉은색 또는 진분홍색으로 핀다. 알펜로제는 알프스의 봉우리가 아침저녁으로 붉게 비친다는 뜻의 형용사로도 쓰인다. 숲길 하이킹 하는 곳곳에 알펜로제 나무가 자리잡고 있었다. 꽃이 활짝 필 때 오면 장관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가이드를 자청한 아트 퓌러(Art furrer)가 알레치 숲길 하이킹 도중에 스위스 소나무(Swiss Pine) 잎을 보여주며 취재팀에게 설명을 해주고 있다.
 가이드를 자청한 아트 퓌러(Art furrer)가 알레치 숲길 하이킹 도중에 스위스 소나무(Swiss Pine) 잎을 보여주며 취재팀에게 설명을 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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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 전에 리더알프와 건너편 벨알프(Belalp)를 잇는 구름다리가 만들어졌다. 그 이전에는 (알레치) 빙하 길로 다녔는데 빙하가 녹아서 다리를 놨다. 그 때문에 6시간 걸리던 빙하 탐사길이 9시간으로 늘어났다."

벨알프는 매년 겨울철에 열리는 마녀 스키 경주대회로 유명하다. 마녀 분장을 한 사람들이 다운힐 스키를 타고 내려오는 축제다.

"인간은 자연을 훼손할 자격이 없다"

아트 퓌러는 중간 중간 발걸음을 멈추고 알레치 숲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가는 길에 간간이 뿌리째 뽑힌 큰 나무가 보였다. 주로 겨울철 눈사태 때문에 쓰러진 것이라고 한다. 치워 놓을 만도 한데 그냥 그 자리에 놔뒀다. 왜 그랬을까?

아트 퓌러의 대답은 간단했다. "인간은 자연을 훼손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통행에 방해가 되는 나무들만 옆으로 치우고 나머지는 자연 그대로 놔두는 게 국립공원 관리 원칙이라고 한다. 가능한 한 인간의 개입을 최소화 하고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보존하는 것이다.

둥근 홈이 크게 패인 바위 앞에서 아트 퓌러는 발걸음을 멈췄다.

"2000년 전 로마시대 때부터 본격적인 해빙기가 찾아왔다. 150년 간격으로 빙하가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한다. 바위에 패인 둥근 홈은 빙하가 녹으면서 회오리처럼 물이 스며든 흔적이다. 그러한 모습이 이곳이 빙하시대를 거쳤다는 걸 증명해준다. 알레치 숲에는 이렇게 홈이 패인 바위가 곳곳에 널려 있다."

물의 속성상 빙하가 합쳐지는 곳의 수심이 더 깊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융프라우와 이어진 알레치 빙하 트레킹은 걸어서 꼬박 이틀이 걸린단다.

바위 가운데 만들어진 큰 홈에 아트 퓌러는 "빙하가 녹을 때 한 곳으로 흘러내리며 유속의 영향을 받아 바위가 움푹 패이게 됐다"며 "이곳이 빙하지대를 거쳤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바위 가운데 만들어진 큰 홈에 아트 퓌러는 "빙하가 녹을 때 한 곳으로 흘러내리며 유속의 영향을 받아 바위가 움푹 패이게 됐다"며 "이곳이 빙하지대를 거쳤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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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치 숲길에는 크고 작은 물 웅덩이 습지가 많았다. 아트 퓌러는 "이 곳이 사슴웰빙센터"라며 웃는다. 사슴이 진흙 웅덩이에서 구르고 난 뒤 흙이 마르면 몸을 터는데, 그 과정에서 몸에 붙어있던 진드기 등이 함께 떨어진다는 것이다.
 알레치 숲길에는 크고 작은 물 웅덩이 습지가 많았다. 아트 퓌러는 "이 곳이 사슴웰빙센터"라며 웃는다. 사슴이 진흙 웅덩이에서 구르고 난 뒤 흙이 마르면 몸을 터는데, 그 과정에서 몸에 붙어있던 진드기 등이 함께 떨어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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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길에 숲 속에서 뛰노는 사슴 무리를 만났다. 가족일까 아닐까? 궁금했다. 좀더 가다보니 물 고인 웅덩이가 나왔다. 알레치 숲길에는 크고 작은 물 웅덩이 습지가 많았다. 아트 퓌러는 물 웅덩이를 보더니 취재팀 일행에게 "이 곳이 사슴웰빙센터"라며 웃는다. 사슴이 진흙 웅덩이에서 구르고 난 뒤 흙이 마르면 몸을 터는데, 그 과정에서 몸에 붙어있던 진드기 등이 함께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저런 설명을 들으며 숲길을 걷다보니 우리는 손님이고, 자연이 주인이란 생각이 더욱 굳어진다.

비쇼프씨츠(Bischofssitz). 주교가 앉았던 의자라는 뜻이다. 아롤라 파인(Arolla Pine)이라고도 불리는 스위스 소나무(Swiss Pine)다.
 비쇼프씨츠(Bischofssitz). 주교가 앉았던 의자라는 뜻이다. 아롤라 파인(Arolla Pine)이라고도 불리는 스위스 소나무(Swiss Pine)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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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길 하이킹에 나선 지 1시간이 흘렀다. 겉에서 보기에도 오래된 나무 한 그루에 푯말이 붙어있다. 비쇼프씨츠(Bischofssitz). 주교가 앉았던 의자라는 뜻이다. 아롤라 파인(Arolla Pine)이라고도 불리는 스위스 소나무(Swiss Pine)다.

"1900년대 초 지금은 환경보호센터로 쓰이는 빌라 카셀(Villa Cassel)에 영국 켄터베리 주교가 방문했다. 짐꾼들과 함께 빙하 탐사에 나섰던 주교가 이 나무 아래서 스카치를 마시며 밤을 샜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빙하를 다 봤으니 이제 가자'고 했다는 후일담이 전해져오고 있다."

조금 과장된 것 같지만, '주교좌' 나무에 얽힌 이야기다.

"새들이 이 나무 열매를 입에 물고 다니며 퍼뜨린다. 새들이 한 방향으로 날기 때문에 이 나무들도 새들의 비행 방향으로 자랐다. 빙하 건너편에는 이 나무가 한 그루도 없다. 자연에서도 동물과 식물의 협력관계가 나타난다. 자연은 신기하고 놀라운 자생력을 갖고 있다. 자연은 세상이 뒤집어져도 스스로 헤쳐나간다. 지구 온난화 때문에 환경이 많이 파괴됐는데, 자연은 때로는 약하게 때로는 거칠게 대응하면서 조화를 이뤄나갈 것이다."

아트 퓌러의 자상한 설명을 들으며 숲길을 걸은 지 2시간쯤 지나자 알레치 빙하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빙하라기보다는 거대한 회색 눈더미처럼 보였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크레바스도 보이고 거대한 얼음 덩어리라는 게 느껴졌다. 150년 전에는 빙하가 고도 수십미터 위까지 올라와 있었는데 지금은 많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길이도 3km나 짧아졌단다. 그런 탓에 빙하와 가까운 곳의 산비탈에는 오래된 나무가 없다. 특정한 경계에 따라 식물군이 완전히 달라지는데, 빙하가 만들어놓은 새로운 식물 지형인 셈이다.

알레치 빙하(Aletsch Glacier)는 스위스에서 가장 크고 긴 빙하다.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알레치 빙하(Aletsch Glacier)는 스위스에서 가장 크고 긴 빙하다.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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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퓌러는 알레츠 빙하 때문에 생사의 기로에 선 적이 있다. 1996년 스키를 타고 빙하를 건너가다가 30m쯤 되는 크레바스에 빠졌다. 다행히 그는 40분만에 구조됐다.
 아트 퓌러는 알레츠 빙하 때문에 생사의 기로에 선 적이 있다. 1996년 스키를 타고 빙하를 건너가다가 30m쯤 되는 크레바스에 빠졌다. 다행히 그는 40분만에 구조됐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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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하는 얼고 녹고를 반복하면서 이동한다. 이동하는 속도는 무게에 따라 달라진다. 아트 퓌러의 설명에 따르면, 알레치 빙하는 하루에 34~36cm를 움직인다. 빙하끼리 만나는 지점에서는 가속이 붙어 하루 1.5m를 이동하기도 한다. 빙하는 움직이지 않으면 녹아 버린다. 빙하는 눈 결정체의 압축인데, 10m 정도의 눈이 내리면 10cm 두께의 빙하가 만들어진다. 그 무게와 크기 때문에 움직이는데, 그 과정에서 모래와 돌이 섞여서 함께 떠내려온다. 멀리서 보면 눈길에 트럭 바퀴가 지나간 자국처럼 빙하 가운데 흙길이 보이는데, 그게 빙퇴석이라고 불리는 모레인(moraine)이다. 빙하가 이동하다가 따뜻한 지역에서 녹게 되면 빙하 속에 있는 암석·자갈·토양물질 등이 섞여 이루어지는 퇴적층을 뜻한다. 

3주 전에 히말라야를 다녀온 아트 퓌러는 "히말라야 빙하가 여기보다 더 빠른 속도로 녹고 있다"며 "빙하가 녹는 걸 빠르게 하거나 느리게 하는 건 우리의 몫"이라고 강조한다. 아트 퓌러는 알레츠 빙하 때문에 생사의 기로에 선 적이 있다. 1996년 스키를 타고 빙하를 건너가다가 30m쯤 되는 크레바스에 빠졌다. 다행히 그는 40분만에 구조됐다. 크레바스에 빠진 뒤 생명을 건질 가능성은 매우 희박한데 운좋게 살아난 것이다. 그 이후 인생이 어떻게 바뀌었느냐는 질문에 아트 퓌러는 "또 떨어지지 말자고 다짐했다"고 농담을 건넨 뒤 "정신과 영혼의 중요성, 영혼의 힘, 수호천사를 믿게 됐다"며 자신은 '마운틴 가톨릭'이란다.

어떤 나무는 수령 1000년이 넘는 것도 있다. 나무 뿌리가 큰 바위 틈새를 파고 들어 바위를 두동강이 낸 경우도 있다. 알레치 숲길의 역사와 자연의 힘을 새삼 느끼게 됐다.
 어떤 나무는 수령 1000년이 넘는 것도 있다. 나무 뿌리가 큰 바위 틈새를 파고 들어 바위를 두동강이 낸 경우도 있다. 알레치 숲길의 역사와 자연의 힘을 새삼 느끼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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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찮아 보이는 돌 이끼도 100원짜리 동전 크기 만한 게 50년쯤 된 것이라는 아트 퓌러의 말에 놀랐다.
 하찮아 보이는 돌 이끼도 100원짜리 동전 크기 만한 게 50년쯤 된 것이라는 아트 퓌러의 말에 놀랐다.
ⓒ 이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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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치 숲길에는 스위스 소나무뿐만 아니라 겨울철이면 잎파리가 다 떨어지는 연둣빛의 낙엽송 라취(Larch)도 많았다. 어떤 나무는 수령 1000년이 넘는 것도 있다. 나무 뿌리가 큰 바위 틈새를 파고 들어 바위를 두동강 낸 경우도 있다. 알레치 숲길의 역사와 자연의 힘을 새삼 느끼게 됐다. 하찮아 보이는 돌 이끼도 100원짜리 동전 크기만한 게 50년쯤 된 것이라는 말에 놀랐다. 나보다 한참 나이를 더 먹은 '형님'이 아닌가.

알레치 숲에는 수령 1000년 넘는 나무도

천천히 걷다가 이야기를 듣고, 다시 걷다가 쉬고, 그렇게 4시간 30분쯤을 보내고나니 원래 출발했던 리더푸르카 호텔에 도착했다. 걸었던 길은 왕복 9km로 길지 않았지만 쉬엄쉬엄 걷다보니 어느덧 시간이 그렇게 흘렀다. 호텔에 도착하자, 아네트가 차가운 화이트 와인을 가져왔다. 아트 퓌러가 생산한 것이다. 야외에 돌로 만든 테이블에 둘러서서 아트 퓌러와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눴다.

'스스로 성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하냐, 행복하냐'고 묻자 그는 "행복하지 않으면 일을 할 수가 없다"며 "인생은 조화로워야 한다(Life is balance)"고 말한다. 그는 '한국의 젊은이에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는 물음에는 "인생은 너무 빨리 지나가니까 목표를 가지고 무엇이 되고 싶은지 간에 그것을 꼭 하라"며 "믿음을 포기하지 말라"고 주문한다. "어떤 것도 쉽게 이뤄지지 않지만, 오랫동안 소망하고 소원을 붙들고 있으면 언젠가는 이뤄진다"는 것이다. 누구나 이야기할 수 있는 뻔한 얘기 같지만, 아트 퓌러의 인생을 돌아보면 무게있는 조언이 아닐 수 없다. 아는 게 문제가 아니라 실천하는 게 문제다.

취재팀은 아트 퓌러와 화이트 와인을 마시며 작별 인사를 나눴다. 따뜻한 미소로 이방인을 반갑게 맞아주었던 아네트가 만들어준 점심 샌드위치를 챙겼다. 또다시 길을 나섰다. 이곳에 온 것과는 반대로 리더알프에서 뫼렐까지는 로프웨이로, 뫼렐~브리그~루체른(Luzern)은 기차로 이동한다. 오후에는 에멘텐(Emmetten)~젤리스베르그(Seelisberg)의 루체른 호숫길 하이킹이 우리를 기다린다. 걷고, 기차 타고, 또 걷고... 언제 이렇게 스위스에서 맘껏 걸어볼 수 있을까? 어쨌든 걷는 복이 터진 날이다.

일반적인 하이킹 코스는 '반더벡(wanderweg)'으로 불리우며 노란색 표지로 돼 있고, 상급자를 위한 알프스 하이킹 코스인 '베르크벡(Bergweg)'은 빨간 줄이 들어간 노란색 표지로 구별돼 있다. 알레치 숲길은 대부분 베르크벡 코스로 돼 있다. 이 코스에서는 특히 신발이나 복장에 신경을 써야 한다.
 일반적인 하이킹 코스는 '반더벡(wanderweg)'으로 불리우며 노란색 표지로 돼 있고, 상급자를 위한 알프스 하이킹 코스인 '베르크벡(Bergweg)'은 빨간 줄이 들어간 노란색 표지로 구별돼 있다. 알레치 숲길은 대부분 베르크벡 코스로 돼 있다. 이 코스에서는 특히 신발이나 복장에 신경을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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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치 빙하(Aletsch Glacier) 지대에서 등산객들이 등산로를 따라 하이킹을 하고 있다. 스위스에는 등산코스 곳곳에 안내 표지판이 잘 설치돼 있다.
 알레치 빙하(Aletsch Glacier) 지대에서 등산객들이 등산로를 따라 하이킹을 하고 있다. 스위스에는 등산코스 곳곳에 안내 표지판이 잘 설치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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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치 빙하는 스위스에서 가장 길고 큰 빙하다. 길이만도 약 23km에 이른다. 그 옆의 알레치 숲도 1933년 국립공원의 지정된, 유럽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산림 보호 지역이다. 가운데 흰 부분이 알레치 빙하 지대다.
 알레치 빙하는 스위스에서 가장 길고 큰 빙하다. 길이만도 약 23km에 이른다. 그 옆의 알레치 숲도 1933년 국립공원의 지정된, 유럽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산림 보호 지역이다. 가운데 흰 부분이 알레치 빙하 지대다.
ⓒ Art Furrer Hot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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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알레치 빙하, #알레치 숲, #아트 퓌러, #스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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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진심의 무게처럼 묵직한 카메라로 담는 한 컷 한 컷이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징검다리가 되길 바라며 오늘도 묵묵히 셔터를 누릅니다.

사람에 대한 기사에 관심이 많습니다. 사람보다 더 흥미진진한 탐구 대상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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