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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정부관광청은 올해와 내년을 '스위스 걷기여행의 해(The Year of Walking)'로 정했다. 그림같은 풍경의 알프스만 감상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자연과 호흡하고 사람들과 만나는 여행을 적극 알리겠다는 취지다. 지난 4월 6일에는 (사)제주올레와 공동 발전을 위한 업무 제휴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걷기여행의 노하우를 배우고, 네트워킹을 강화하기 위해서다. 빠르면 올 하반기에는 스위스 하이킹 코스에 제주올레 홍보 표지판이 설치된다. 스위스를 방문하는 한국 여행자들을 위한 '스위스 올레' 같은 하이킹 코스도 선보일 예정이다. <오마이뉴스>는 스위스 정부 관광청의 지원을 받아 지난 6월 6일부터 12일까지 '7일5박' 일정으로 스위스의 라보지구, 체르마트, 알레치 빙하, 루체른 호수 일대의 하이킹 코스를 걸었다. 몇 차례에 걸쳐 '스위스 올레 여행기'를 연재한다. [편집자말]
스위스의 대표적인 와인 생산지인 라보지구 마을을 걷다보면 곳곳에서 이곳 와인을 소개하는 상점의 아기자기한 진열대를 볼 수 있다.
 스위스의 대표적인 와인 생산지인 라보지구 마을을 걷다보면 곳곳에서 이곳 와인을 소개하는 상점의 아기자기한 진열대를 볼 수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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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독일·이탈리아·미국·칠레·호주 와인…. 스위스 와인? 별로 들어본 적이 없다. 다른 나라 와인은 맛보거나 구경이라도 해봤는데 스위스 와인은 접해본 기억이 없다. 그런데도 스위스 와인이 유명하단다. '왜 그럴까' 궁금했다. 이번 스위스 올레 취재 과정에서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알고나니 무척 허탈하긴 했지만.

"스위스에서 생산되는 와인은 스위스 사람들이 다 마셔 버려 수출할 물량이 없어요."

간단했다. 스위스 와인은 국내 수요에 비해 공급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물론 소비량보다 더 많은 와인을 생산할 수 있다면 수출할 물량이 남아 있었을 테니 생산량이 적은 탓도 있다. 일부 수출하긴 하지만 극소량이어서 전체 생산량으로 보면 아주 미미한 수준이다. 유럽 여행자들 사이에서는 '스위스에 가면 맥가이버 칼(빅토리녹스)은 못 챙겨도 스위스 와인은 꼭 챙겨야 한다'는 입소문까지 났다. 그만큼 희소가치가 있다. 특히 뛰어난 품질을 자랑하는 라보(Lavaux) 지구의 화이트 와인은 마니아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세계적인 스위스 와인, 외국에서는 맛볼 수 없다

지난해 스위스의 와인 생산량은 1억1000만 리터. 750㎖ 기준으로 하면 1억4666만 병이다. 이에 반해 와인 소비량은 2억7800만 리터(3억7066만 병). 국민 한 사람당 1년 평균 49병의 와인을 소비한 것이다. 성인 한 사람이 일주일에 와인 한 병 이상을 마셨다는 이야기다. 통계에서 보듯이 국내 생산량의 2.5배 가량을 소비하니 수출할 물량이 없는 건 당연지사. 더욱이 '스위스 퀄리티'에 대한 신뢰로 똘똘 뭉친 사람들이라서, 국내산 와인에 대한 인기는 두말하면 잔소리다.

스위스 전체로 볼 때 화이트 와인의 비중이 51%로 레드 와인보다 약간 많다. 점차 레드 와인 생산량이 늘어나는 추세라고 하니 조만간 비슷해질 걸로 예상된다. 화이트 와인은 98%가 샤슬라(Chasselas), 레드 와인은 50%가 피노 누아르(Pinot Noir) 품종이다. 지역별 생산량을 살펴보면 발레(Valais)주가 45만 헥토리터(1hl=100리터)로 전체 생산량의 40%가 넘고, 라보 지구가 있는 보(Vaud)주가 29만 헥토리터로 26% 가량을 차지한다. 그러나 포도밭 밀집도로 보면 라보 지구가 스위스 와인 최대 생산지라고 할 수 있다.

라보지구 비탈진 언덕에 계단식으로 들어선 포도밭. 아래로는 드넓은 레만호수가 보인다.
 라보지구 비탈진 언덕에 계단식으로 들어선 포도밭. 아래로는 드넓은 레만호수가 보인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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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 다그마(Dagmar)가 스위스 라보지구 포도밭 언덕에서 "이곳을 찾은 관광객들은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안내지도판을 이용해 편안하게 트래킹을 즐길 수 있다"며 취재팀에게 설명하고 있다.
 가이드 다그마(Dagmar)가 스위스 라보지구 포도밭 언덕에서 "이곳을 찾은 관광객들은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안내지도판을 이용해 편안하게 트래킹을 즐길 수 있다"며 취재팀에게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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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이튿날인 6월 7일, 스위스의 대표적인 와인 생산지 라보(Lavaux) 지구 포도밭을 걷는 날이다. 아침 일찍 레만 호숫가에 있는 찰리 채플린 동상 주변을 산책하고 서둘러 호텔로 돌아왔다. 스위스 사람들은 약속 시간에 철저하다는 이야기를 여러 차례 들었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하이킹 첫 날부터 지각해서 이미지를 구길 수는 없지 않은가. 라보 지구를 안내해 줄 가이드 다그마(Dagmar)는 약속 시간 5분 전에 이미 호텔 프론트에 도착해 있었다. 오스트리아 출신인 그녀는 20년 전에 스위스로 왔고, 지금은 '올림픽의 도시' 로잔에 살고 있다.

로잔~브베~몽트뢰에 걸쳐져 있는 라보 지구는 레만(Leman) 호수 북쪽에 위치한 햇볕이 잘 드는 구릉지대다. 26개 주(canton) 가운데 하나인 보(Vaud)주에 속해 있다. 끝없이 이어진 계단식 포도밭과 그 앞에 펼쳐진 드넓은 레만 호수, 건너편에 보이는 프렌치 알프스 등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한다. 2007년 6월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세계 자연유산으로 등재됐다. 와인 애호가들뿐만 아니라 하이커들에게도 인기있는 하이킹 코스로 이름나 있다.

전체 면적은 830만m²(251만 평). 11세기 수도원에서 포도밭을 일구면서 이곳에서 포도를 재배하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석회질 토양인데다 기온이 온화해 화이트 와인의 주재료가 되는 샤슬라 품종을 재배하기에 적합하다. 풍부한 과일향과 섬세한 맛이 특징인 이곳 와인은 스위스에서도 손꼽힌다. 라보 지구는 카라멩(Calamin), 샤도네(Chardonne), 데잘레이(Dézaley), 에뻬쓰(Epesses), 뤼트리(Lutry), 생 사포랭(St-Saphorin), 브베-몽트뢰(Vevey-Montreux), 빌레트(Villette) 등 모두 8개의 포도농장 공동체인 아펠라시옹(Appellations)으로 구성돼 있다.

라보 지구는 스위스정부관광청이 추천한 13개 걷기여행 코스 가운데 하나. '포도밭 속으로 떠나는 하이킹'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낭만이 물씬 풍긴다. 스위스 올레 취재팀의 하이킹 코스는 뤼트리~에뻬쓰(Epesses)~셰브르(Chexbres). 하이킹과 관광 열차인 '라보 익스프레스' 체험을 동시에 하는 일정이다. 관광청에서 추천하는 코스는 생 사포랭~뤼트리. 거리는 11km, 소요 시간은 3시간15분. 취재팀은 이 코스 가운데 5~6km를 걷고, 3~4km를 관광 열차로 둘러보는 셈이다.

라보지구에는 왜 세 개의 태양이 있을까

브베에서 기차를 타니 11분 만에 뤼트리에 도착했다. '스위스 타임'답게 출발도, 도착도 열차 시각표에 표시된 그대로다. 이제부터 '포도밭 하이킹' 고고싱~. 경사진 언덕배기를 조금 올라가니 코너에 차량 제한속도 30km라는 표지 아래 'Merci!'라는 환영 인사말이 외부인을 반긴다. 수확한 포도를 이층 창고에 저장하기 위해 지붕에 매달아 놓은 도르레도 눈에 띄고, 화단으로 변신한 포도 압축기도 살갑게 느껴진다. 주요 길목마다 설치돼 있는, 불어·독어·영어 등 3개 국어로 표기된 안내판에는 해당 지역에 대한 특징적인 소개 글이 친근한 일러스트와 함께 방문객들의 도우미 역할을 해준다.

농부들이 스위스 라보(Lavaux)지구 포도밭에서 포도나무 가지가 곧게 뻗어 자라게 하기 위해 지지대에 묶는 작업을 벌이며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농부들이 스위스 라보(Lavaux)지구 포도밭에서 포도나무 가지가 곧게 뻗어 자라게 하기 위해 지지대에 묶는 작업을 벌이며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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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올레 취재팀이 가이드 다그마(Dagmar)의 설명을 들으며 라보지구 포도밭 언덕길을 오르고 있다. 이 길은 포도밭과 레만호수가 어우러진 낭만적인 하이킹 코스로 이름나 있다.
 스위스 올레 취재팀이 가이드 다그마(Dagmar)의 설명을 들으며 라보지구 포도밭 언덕길을 오르고 있다. 이 길은 포도밭과 레만호수가 어우러진 낭만적인 하이킹 코스로 이름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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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은 지 20분 정도 지나자 계단식 포도밭과 레만 호수가 눈에 들어온다. 일기 예보와는 달리 날씨도 아주 덥지 않으면서도 맑다. 걷기 딱 좋은 조건이다. 발걸음을 서두르지 않으니 주변의 풍경이 몸으로 느껴진다. 계단식 포도밭이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경사진 땅의 기반을 유지해주는 역할을 한다. 또한 돌담은 낮에 열을 흡수했다가 밤에 방출하는 온도 조절 기능도 한다. 이 때문에 이 곳 주민들은 라보 지구에는 태양의 직사광선, 돌담의 열기, 레만 호수의 반사된 햇빛 등 3개의 태양이 있다고 말한다. 포도밭의 경계 벽을 모두 합하면 400km에 이르고, 호수를 따라 발달한 포도밭 길은 30km 정도다.

스위스 라보(Lavaux)지구 포도 농가 곳곳에는 탐스러운 장미덩쿨이 자리잡고 있다. 보기에도 좋지만 질병에 민감한 장미는 와이너리에 병충해가 번지기 전 미리 알려주는 지표식물 역할도 한다.
 스위스 라보(Lavaux)지구 포도 농가 곳곳에는 탐스러운 장미덩쿨이 자리잡고 있다. 보기에도 좋지만 질병에 민감한 장미는 와이너리에 병충해가 번지기 전 미리 알려주는 지표식물 역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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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 갈수록 시야가 더욱 트였다. 포도밭 초입에서 중간으로 진입하니 주변은 온통 녹색 잎의 포도나무와 파란 하늘과 맞닿은 호수다. 가끔씩 선글라스를 벗고 원래 자연의 풍광을 음미했다. 포도밭 사이에 간간이 심어놓은 장미가 눈에 띄었다. 가이드 다그마에게 물어봤다. 그녀는 "장미는 질병에 민감하기 때문에 포도나무에 병충해가 생기기 전에 알 수 있게끔 심어 놓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장미를 포도나무 병충해를 막기 위한 지표식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포장도로와 비포장 밭길이 뒤섞인 길을 걷다보면 중간에 조그만 마을을 만나게 된다. 그 마을 한켠에서 꼭 만나는 게 음수대다. 레만 호숫가도 그렇고, 체르마트도 그렇고, 루체른도 그렇다. 스위스에서 길을 가다보면 몇년도에 만들었다는 연도 표시가 된 음수대를 자주 만나게 된다. 그 가운데는 먹을 수 없다는 경고문이 붙은 음수대도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된 옛날 우리나라 동네 우물 같다. 길 가다 목 마르면 물을 돈 주고 사야 하는 '야박한' 유럽 여행 길에서 만난 무료 음수대는 반가운 존재다.

외관을 분홍색 페인트로 칠해 눈에 띄는 3층 건물로 눈길을 돌렸더니 식당이었다.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수수한 겉모습인데 가까이 다다가서 보니 2010년 미슐랭 가이드(Michelin Guide)에 소개된 집이었다. 또다른 마을에서는 옛날 마차처럼 생긴 소방차를 만났다. 위에 둘둘 감은 소방 호스가 이 차의 용도를 말해주고 있었다. 소방차를 설명하던 다그마가 "예전에는 저녁에 교회 종이 울리면 화재 위험이 있는 불을 더이상 사용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했다"고 덧붙인다.

스위스 라보(Lavaux)지구 한 마을에 마차처럼 생긴 소방차가 진열되어 있다. 위에 둘둘 감은 소방 호수가 이 차의 용도를 말해주고 있다.
 스위스 라보(Lavaux)지구 한 마을에 마차처럼 생긴 소방차가 진열되어 있다. 위에 둘둘 감은 소방 호수가 이 차의 용도를 말해주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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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라보(Lavaux)지구 언덕 경사면에 계단 모양으로 형성된 포도밭은 주변 마을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고 있다. 라보 지구 포도밭은 약 800년전 수도원의 수도승들이 포도밭을 일구면서 포도를 재배하기 시작하였다고 전해진다.
 스위스 라보(Lavaux)지구 언덕 경사면에 계단 모양으로 형성된 포도밭은 주변 마을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고 있다. 라보 지구 포도밭은 약 800년전 수도원의 수도승들이 포도밭을 일구면서 포도를 재배하기 시작하였다고 전해진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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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보 지구의 계단식 포도밭을 보면 우리나라 남해의 다랭이 마을이 떠오른다. 다랭이 마을은 45도 경사, 108개 층층계단, 680여 개의 논이 바다를 바라본다. 훨씬 큰 규모인 라보 지구의 포도밭은 레만 호수를 바라보며 줄지어 늘어서 있다. 그 길을 따라 걸으며 빌레트(Villette), 리에(Riex) 등 작은 마을을 구경하면서 쉬엄쉬엄 2시간 가량 걸었더니 어느새 에뻬쓰에 도착했다.

계단식 포도밭을 보며 남해 다랭이 마을을 떠올리다

취재팀이 찾은 곳은 에뻬쓰에 있는 파트릭 퐁잘라(Patrick Fonjallaz)의 와이너리. 와인 양조장을 견학하고 그곳에서 만든 와인을 시음하는 일정이다. 고소원 불감청이다.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라보 지구의 와이너리 투어는 유명하다.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하고 싶어하는 여행의 로망이다. 주로 4월부터 10월까지 운행하는 라보 익스프레스(Lavaux Express) 등의 관광 열차를 타고 주변을 둘러본 뒤 와이너리를 방문해 와인을 맛보는 코스로 돼 있다. 여기에 4~5km 하이킹 코스가 결합되기도 하는데, 반나절에 소화할 수 있는 일정이다.

에뻬쓰는 치즈나 포도주의 원산지 브랜드를 보증하기 위해 원산지 이름을 인증하고 관리하는 기관인 AOC(Appellation d'Origine Controlee)로부터 인정받은 곳 가운데 하나다. 파트릭은 1531년부터 이곳에서 와이너리를 운영하고 있는 퐁잘라 가문의 12번째 주인이다. 500년 가까운 가문의 와이너리 역사를 잇고 있어서인지 자부심이 대단하다. 그가 생산하는 와인병 라벨 뒤에는 11명의 선조 이름과 함께 맨 마지막에 그의 이름이 올라와 있다. 퐁잘라 와이너리에서 생산하는 레드·화이트 와인은 연간 45만 병. "포도나무 한 그루가 와인 한 병"이라고 하니, 그의 포도밭에는 45만 그루가 넘는 포도나무가 자라고 있다.

와인 셀러가 있는 집안을 거쳐 밖으로 나가니 테이블과 의자가 갖춰진 작은 정자 같은 쉼터가 있다. 취재팀은 파트릭이 가져온 세 종류의 와인을 맛봤다. 샤슬라로 만든 화이트 와인과 살구향 맛이 강한 와인, 반건조 포도로 빚었다는 단맛이 강한 와인 순으로 시음했다. 와인 마니아가 아니어서 정확하진 않지만 무겁지 않고 가벼운 느낌으로 누구나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수준이다. 파트릭은 맨 마지막 단맛이 강한 와인을 "연인들이 분위기 내며 즐기기 좋은 맛"이라고 소개하며 한 병씩 선물했다. "파트릭, 메르시!"

스위스 라보(Lavaux)지구 에뻬쓰 마을 와인 생산자인 파트릭 퐁잘라(Patrick Fonjallaz)씨가 화이트 와인의 주 품종인 샤슬라(chasselas)로 만든 와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스위스 라보(Lavaux)지구 에뻬쓰 마을 와인 생산자인 파트릭 퐁잘라(Patrick Fonjallaz)씨가 화이트 와인의 주 품종인 샤슬라(chasselas)로 만든 와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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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브베에 살던 찰리 채플린이 1953년 라보지구에 있는 퐁잘라 가문의 와이너리를 방문했다. 사진 속의 꼬마가 지금 퐁잘라 와이너리의 주인인 파트릭이고, 승용차 안의 할아버지가 찰리 채플린이다.
 스위스 브베에 살던 찰리 채플린이 1953년 라보지구에 있는 퐁잘라 가문의 와이너리를 방문했다. 사진 속의 꼬마가 지금 퐁잘라 와이너리의 주인인 파트릭이고, 승용차 안의 할아버지가 찰리 채플린이다.
ⓒ 이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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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방문객들의 관심과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파트릭은 시음이 끝난 뒤 집안에 있는 와인 셀러로 우리를 안내했다. 빼곡하게 들어찬 오크통에서 포도주가 숙성되고 있었다. 퐁잘라 와이너리를 소개하는 팸플릿이 놓여진 테이블 위에 꼬마와 승용차 안에 있는 할아버지가 대화하는 옛날 사진 액자가 놓여져 있었다. 그 사진 속의 주인공은 찰리 채플린과 파트릭이었다. 파트릭이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사진 속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1953년 스위스 브베에 살던 찰리 채플린과 당시 수상이 라보지구를 방문하면서 우리 와이너리를 들렀던 적이 있어요. 제가 아주 어렸을 때인데, 어느 할아버지가 자신이 찰리 채플린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당신이 찰리 채플린이라는 걸 내가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손가락을 인중에 대고 (트레이드 마크인 콧수염을 상기시키며) '이래도 못 믿겠냐, 내가 찰리 채플린이다'라고 말하는 장면이에요."

버스 같은 관광열차, 저속 '익스프레스'를 타고

퐁잘라 가문의 와이너리 탐방을 마치고, 호숫가에 위치한 퀴리(Cully)에서 점심식사를 마쳤다. 라보 지구 하이킹에 이어 관광열차 체험 일정이다. 우리가 탈 라보 익스프레스(Lavaux Express)가 식당 밖에 대기하고 있었다. 노란색과 녹색이 섞인 알록달록한 열차인데, 기차라기보다는 버스에 가깝고 고속이 아닌 저속으로 주변 풍광을 둘러보며 천천히 다니는 관광 차량이다. 미국에서 스위스로 이민 온 지 15년 됐다는, 사람 좋아보이는 조(Joe) 아저씨가 운전사다.

라보의 멋진 경치를 둘러보기에는 라보 익스프레스(Lavaux Express)가 제격이다. 알록달록한 열차는 '익스프레스'라는 명칭과 달리 느릿한 속도로 움직여 관광객들이 충분히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여유를 준다.
 라보의 멋진 경치를 둘러보기에는 라보 익스프레스(Lavaux Express)가 제격이다. 알록달록한 열차는 '익스프레스'라는 명칭과 달리 느릿한 속도로 움직여 관광객들이 충분히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여유를 준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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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1시간쯤 유람 관광을 하다보니 어느새 목적지인 셰브르(Chexbres)역에 도착했다. <제노포브스 가이드>에 따르면 "스위스는 언제나 보수공사중"이라고 한다. 실제 보니 그렇다. 브베에서도, 셰브르에서도, 나중에 가본 루체른에서도 심심찮게 기중기와 건물을 둘러싼 비계를 볼 수 있었다. 시골이나 도시나 마찬가지다. 그 이유에 대해 <제노포브스 가이드>는 이렇게 설명한다.

스위스를 여행하다 보면 보수공사 하는 모습이 많이 눈에 띈다. 멀쩡한 건물을 부수고 새로 짓는 방식의 재건축보다는 리모델링이나 내부 보수를 통해 고쳐쓴다.
 스위스를 여행하다 보면 보수공사 하는 모습이 많이 눈에 띈다. 멀쩡한 건물을 부수고 새로 짓는 방식의 재건축보다는 리모델링이나 내부 보수를 통해 고쳐쓴다.
ⓒ 이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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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는 전국이 '보수공사중'이다. 스카이 라인 어디엔가에는 반드시 기중기가 삐쭉이 솟아 있고, 건물들은 차례차례 보수공사를 위해 폐쇄된다. 바깥 벽채만 빼고 안을 쏙 빼버린 집고 흔히 볼 수 있다... 하지만 공사가 다 끝나고 나면, 놀랍게도 모든 것이 다 옛날 그대로인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해서 한 집이 보수공사를 끝내면 다음 집으로 공사 장비가 옮겨진다. 그리고 20년이 지나면 동네 한 바퀴를 완전히 돌아 다시 처음 그 집부터 공사를 시작한다."

멀쩡한 건물을 부수고 새로 짓는 방식의 재건축보다는 리모델링이나 내부 보수를 통해 고쳐쓰는 건 스위스가 추구하는 친환경 정책과 맞닿아 있는 것 같았다. 보수공사가 진행되는 곳조차 되도록 '깔끔한' 주변 환경을 유지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라보 지구는 세계 자연유산으로 지정된 데다, 국가에서 법을 제정해 지역 개발을 관리하고 있어 자연훼손을 최소화하고 있는 곳이다. 그럼에도 여느 곳처럼 보수공사는 진행되고 있었다.

이제 브베에서 짐을 찾아 비스프(Visp)를 거쳐 체르마트(Zermatt)로 간다. 거기엔 알프스 관광의 정수를 보여준다는 4478m의 마터호른(Matterhorn)이 있다. 마터호른은 영화사 파라마운트의 로고 배경이어서 더욱 친숙한 느낌이다. 안녕, 라보! 반갑다, 마터호른!

스위스 라보(Lavaux)지구 포도밭에서 바라본 레만 호수. 건너편에는 프렌치 알프스가 있어 풍광이 아름답다.
 스위스 라보(Lavaux)지구 포도밭에서 바라본 레만 호수. 건너편에는 프렌치 알프스가 있어 풍광이 아름답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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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올레 취재팀의 하이킹 코스는 뤼트리~에뻬쓰(Epesses)~셰브르(Chexbres). 하이킹과 관광 열차인 '라보 익스프레스' 체험을 동시에 하는 일정이다. 관광청에서 추천하는 코스는 생 사포랭~뤼트리. 거리는 11km, 소요 시간은 3시간15분. 취재팀은 이 코스 가운데 5~6km를 걷고, 3~4km를 관광 열차로 둘러보는 셈이다. 그림 왼쪽 방향은 로잔, 오른쪽 방향은 브베와 몽트뢰다.
 스위스 올레 취재팀의 하이킹 코스는 뤼트리~에뻬쓰(Epesses)~셰브르(Chexbres). 하이킹과 관광 열차인 '라보 익스프레스' 체험을 동시에 하는 일정이다. 관광청에서 추천하는 코스는 생 사포랭~뤼트리. 거리는 11km, 소요 시간은 3시간15분. 취재팀은 이 코스 가운데 5~6km를 걷고, 3~4km를 관광 열차로 둘러보는 셈이다. 그림 왼쪽 방향은 로잔, 오른쪽 방향은 브베와 몽트뢰다.
ⓒ montreuxrivier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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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스위스, #라보지구, #라보익스프레스, #와이너리, #샤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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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진심의 무게처럼 묵직한 카메라로 담는 한 컷 한 컷이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징검다리가 되길 바라며 오늘도 묵묵히 셔터를 누릅니다.

사람에 대한 기사에 관심이 많습니다. 사람보다 더 흥미진진한 탐구 대상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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