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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강제 징용 노동자 공재수 씨. 그는 아소탄광에서 일했다.
 조선인 강제 징용 노동자 공재수 씨. 그는 아소탄광에서 일했다.
ⓒ 오마이뉴스 장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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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알곡 한 톨 없는 콩깻묵을 먹으며 매일 아침 5시에 일어나 밤 11시까지 탄광에서 일하며 노예생활을 해야 했다."
"얼마나 많은 조선인 청년들이 개죽음을 당했는지 모른다. 이제는 속죄하는 마음으로 역사의 증인이 되어 진실 그대로 밝혀주기를 바란다."
"한일이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모든 지나간 일을 씻을 것이 있다면 씻어야 하고 위로할 일이 있으면 위로해야 가까워진다. 그대로 둬서는 가까워질 수 없다. 이제는 진실을 밝히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1943년 일본 규슈 아소광업(주) 쓰나와케광업소 아카사카탄광에 강제 징용되었던 공재수씨는 이렇게 울분을 토해냈다.

지난 26일 오후 일본 규슈 이이즈카 시민회관에서는 한일 강제병합 100년을 맞이하여 '한일100년평화시민네트워크(이하 평화네트워크)'와 일본 'NPO법인 국제교류광장무궁화당우호친선의회(이하 무궁화회)'가 마련한 '규슈지쿠호지역 강제동원노동자 증언 집회'가 열렸다.

이날 행사장에는 평화네트워크에서 참여한 20여명과 규슈지역으로 역사기행에 나선 전북 익산시 의정회 회원 20여명 등 한국인과 무궁화회를 비롯한 일본의 시민단체 및 재일 한국인 등 모두 200여명이 참석했다.

일본에서 이러한 한국인 징용자 문제를 다룬 세미나에 이처럼 많은 인원이 참석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이 자리에서는 아소 탄광에서 일했던 공재수(87)씨와 미쓰비시중공업 나가사키 조선소에서 일하다가 원폭피해를 입었던 김한수(92)씨가 증언자로 나서서 당시의 생생한 기억을 털어놓았다.

지난 6월 26일 오후 일본 규슈 이이즈카 시민회관에서 열린 '규슈지쿠호지역 강제동원노동자 증언 집회'.
 지난 6월 26일 오후 일본 규슈 이이즈카 시민회관에서 열린 '규슈지쿠호지역 강제동원노동자 증언 집회'.
ⓒ 오마이뉴스 장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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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소 탄광에서 일했던 공재수씨] "배가 고파 살 수가 없었다"

먼저 증언에 나선 공재수씨는 당시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수택리 이촌 마을에서 부모님과 함께 농사일을 돕고 있다가 징용장을 받았다면서 증언을 시작했다. 그는 1943년 2월 1일 120명의 양주군청에 모인 청년들과 함께 양주부대로 편성되어 의정부역을 출발,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거쳐 큐슈 이이즈카에 도착했다.

아소광업(주) 쓰나와케광업소 아카사카탄광에 배치된 그는 채탄부로 일했다. 매일 아침 5시에 기상해 식사 후 7시에 갱내에 투입되면 모든 작업을 끝내고 목욕을 한 뒤 숙소에 들어오면 밤 11시가 넘었다.

공 씨는 당시 기억을 떠올리며 "우리는 인간이 아니었다, 인간 이하의 노예와 같았다"면서 "식사는 알곡 한 톨 없는 콩깻묵 죽순 등으로 섞어 주었고, 그것도 너무 부족해서 배가 고파 살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배고픔과 노동에 시달리던 그는 두 번의 탈출을 시도했다가 잡혀와 죽을 만큼의 구타를 당하기도 했고, 탄차가 중도에 탈선되어 발등에 부상을 당해 수개월간 병원 치료를 받기도 했다. 치료 받는 동안에는 콩깻묵 밥도 주지 않고, 멀건 죽만 하루에 두 끼만 주었다고 말했다. 봄이면 너무 배가 고파서 야산에 나는 명아주 풀을 뜯어서 증기물에 데쳐 먹으며 허기를 채우기도 했다.

1944년 4월경에는 그 일대에 전염병(장티푸스)이 만연하여 같이 일하던 조선인 노동자 수백명이 일시에 병원에 입원, 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병원은 말이 병원이지 창고바닥에 다다미를 깔고 침대도 없는 임시 수용소였다. 당시 조선인 노동자들은 작은 계단도 네 발로 올라갈 만큼 힘이 없었고, 수개월의 투병생활로 머리카락은 다 빠지고 가죽과 뼈만 남아 말 그대로 '괴물'의 모습이었다고 공씨는 전했다.

1945년이 되어서는 전쟁이 가까운 곳에서 치러지는지 폭격소리와 전투기 소리가 자주 들렸고, 그럴수록 노동의 강도는 더욱 심해졌다. 그러던 중 8월 15일 아침 식사를 하는데 '오늘 정오에 일본 천황의 중대한 발표가 있으니 광장에 모이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렇게 일본 천황의 항복연설을 직접 들었다. 그러나 그날도 그들은 갱도에 들어가 작업을 했다고 그는 말했다.

드디어 유엔군이 탄광을 접수한 8월 30일, 노동자들은 귀국을 위해 탄광을 출발했고, 나가사키 하가다로 가서 어선 두 척을 구해 700여명이 부산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일본 선주는 부산으로 가면 배를 빼앗기고 구속된다며 대마도에 머물렀고, 대마도에서 우여곡절 끝에 부산에 도착했을 때는 겨우 200명 밖에 남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조선인 청년들이 개죽음 당했는지..."

60여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당시 상황이 눈에 선하다는 공씨는 증언을 마치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얼마나 많은 조선인 청년들이 개죽음을 당했는지 모른다, 그때 그 당시 우리를 감시하고 구타하던 그 사람들, 지금 어디에 살아있는지 몰라도 이제는 꼭 나와서 있는 그대로를 밝혀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또 "도망하다 붙잡혀 그들 손에 희생된 영혼들, 아무런 빛도 없이 병들어 죽은 영혼들, 깜깜한 갱내에서 돌 더미에 묻혀 죽은 조선인 영혼들에게 이제는 정말 속죄하는 마음으로 역사의 증인이 되어 달라"고 당부했다.

그는 끝으로 "한국과 일본이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씻어야 할 것이 있다면 씻어야 하고, 위로해야 할 일이 있다면 위로해야 한다, 그래야 가까워질 수 있다"면서 "지금처럼 그대로 두어서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결코 가까워질 수 없다"고 강조했다.

[미쓰비시 조선소에서 원폭피해 입은 김한수씨] "조선인 인간 아니었다"

조선인 강제 징용자 김한수(92)씨. 그는 미쓰비시 나가사키 조선소에서 일하다가 원폭피해를 입었다.
 조선인 강제 징용자 김한수(92)씨. 그는 미쓰비시 나가사키 조선소에서 일하다가 원폭피해를 입었다.
ⓒ 오마이뉴스 장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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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를 이어서는 미쓰비시 나가사키 조선소에서 일하다가 원폭피해를 입은 김한수씨의 증언이 이어졌다.

그는 "내가 지금 이 곳 규슈에 와 있다는 것이 꿈만 같다는 생각이 든다"는 말로 증언을 시작했다. 구순이 넘은 연세에도 불구하고 그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증언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1944년 황해도 연백군 해성면 연백 전매지구 현장에서 노무직으로 일하던 김씨는 8월 26일 아침 트럭에 무조건 타라는 지시를 받았다. 어디로 가는지, 왜 가야 하는지도 모른 채 180명의 청년들과 함께 연안역에서 부산항에 도착한 그는 일본 시모노세키를 거쳐 나가사키의 한 목조건축물에 도착했다.

"그때 조선사람은 인간이 아니었지, 어디로 가라면 가고, 오라면 와야 하지 꼭 강아지 끌려다니 듯이…. 그런 대접을 받던 시절이었으니까 아무 것도 모른 채 그렇게 끌려갔지."

그 곳에 도착한 일주일은 교련 훈련을 받았는데, 교련훈련을 시키던 오장은 자신이 중국인 처녀를 강간한 뒤 칼로 찔러 죽였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고, 김씨는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나'라고 생각했다고 당시 기억을 떠올렸다.

교련이 끝난 후 그는 3km 정도 떨어진 나가사키 복전촌에 위치한 미쓰비시 본전료라는 숙소로 옮겨졌고, 한 동에는 80명 정도가 수용되었으며, 3명의 반장이 있었다. 미쓰비시 조선도 동공장으로 배치된 그는 아침 6시에 기상해서 저녁 10시에 취침하면서 일을 했다.

김씨에게 배정된 일은 철관에 모래를 넣고 함마로 두드려 모래를 다지고 나무로 마개를 막은 후 곡선의 위치를 정해 그 곳을 가스 불로 달군 후 견본에 의해 '우인지'로 굽히는 작업이었다. 연통 없이 가스를 피우니 공장 내부는 연기로 항상 가득했고, 얼마나 힘든 작업이었는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더욱 큰 고통은 배고픔이었다. 그는 "밥이라고는 콩기름을 짜고 남은 깻묵에다 쌀을 조금 넣어 밥을 지어 먹었다"며 "그리고는 고구마 넝쿨을 바닷물에 끓여서 국으로 먹었다, 그나마도 남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던 중 그는 왼쪽 발가락이 골절되는 부상을 입었다. 친구에 업혀서 병원에 갔지만 의사는 발을 한번 움직여 보라고 하고서는 괜찮다며 소독약만 바르고 돌려보냈다. 김씨는 병가는커녕 친구에 업혀서 공장에 나가 일을 해야 했고, 발가락은 계란크기 만큼 부었다.

다행히 자신을 불쌍히 본 '기사'가 다음날부터 도금공장에 가서 일하라고 해 그 뒤 부터는 조금 편하게 일을 할 수 있었다. 돈을 버는 욕심에 철야작업까지 도맡아서 일했지만, 고향에 보내 준다는 돈은 한 푼도 보낸 적이 없었다고.

"원폭이 떨어진 그곳은 지옥...핵실험한 미국도 책임있어"

그러던 중 공습을 알리는 싸이렌 소리가 점점 잦아졌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여전히 공장에서 일을 했고, 어느 날 싸이렌 소리와 함께 공습이 시작됐다. 그 순간 아무 소리도 없이 새파란 불빛이 창문으로 퍽 하고 들어왔다. 그리고는 순간 아무소리도 없이 몸이 위로 붕 떴다가 다시 툭하고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철판이 부딪치는 소리,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렸고, 눈을 뜨고 앞을 보니 황색의 안개만 보이고 앞이 보이지 않았다. 원폭이 떨어졌던 것이다.

"밖에 나가 보니 빠진 눈을 한손으로 쥐고 달려가는 사람도 있고, 바다에는 수많은 시체들이 보였다. 피투성이로 뛰는 사람들, 정말 그 당시는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내 눈에 보인 그 곳은 바로 지옥이었다"

이 대목에서 그는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원폭이 떨어지기 전 공습이 있으면, 이미 일본 비행기들은 적에 대항해 뜨지를 않았다. 또 일본은 이미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삐라가 뿌려졌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원폭을 떨어트린 미국은 무고한 시민을 상대로 원폭 실험을 한 것이다. 일본을 핵 실험장으로 사용한 미국도 일본과 함께 그 책임을 져야 한다. 기독교 신자라는 미국사람들이 어떻게 사람으로서 그렇게 할 수 있나, 무고한 시민들을 상대로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철로 된 문에 깔려 등에 부상을 입은 그는 피범벅이 된 채 그 지옥을 뛰어다니며 부상자를구호했다. 그리고 간단한 치료를 받은 후 며칠 있다가 일본사람의 목선을 구해 6일 동안 항해해 부산으로 돌아왔다.

그는 이러한 증언을 마치면서 "힘이 있는 나라라고 남의 나라를 침략하고, 악을 행하는 그런 나라는 오래가지 못한다, 그런 나라가 잘 되는 시대는 이제 지나갔다, 다시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며 "과거를 올바르게 정리하고 새로운 한국과 일본의 우호관계를 만들어가야 두 나라 모두 잘 사는 부국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아픈 역사 함께 기억하고, 증언하고 사과하고 화해하면..."

'한일100년평화시민네트워크'의 일원인 평화노래단이 공연을 하고 있다.
 '한일100년평화시민네트워크'의 일원인 평화노래단이 공연을 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장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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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증언자의 증언에 참석자들은 눈시울을 붉히며 한 마디 한 마디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증언이 끝나고는 당시 상황을 묻는 질문이 계속됐고, 행사를 마치고는 김한수 씨를 붙잡고 흐느껴 우는 일본인도 있었다.

이날 집회에서는 두 증언자 외에도 한국의 김민영(군산대) 교수가 '일제하 전쟁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주제로 발제를 했고, 이어 김승국 평화만들기 대표가 '과거사 청산을 통한 한국과 일본의 평화로운 미래'라는 주제의 발제도 이어졌다.

또한 강제징용 노동자들의 희생을 추모하기 위한 평화네트워크 일원인 '평화노래단'의 공연도 있었다. 이들은 '아침이슬'과 '고향의 봄', '평화를 원해' 등의 노래를 불렀다.

한편, 이날 인사말에 나선 평화네트워크 이대수 단장은 "동아시아 생태와 역사 그리고 사회와 문화 모든 것들이 아우러져 생명이 되고 평화가 되는 세상이 조금씩 열리고 있다"면서 "우리가 서로 친구로 만나는 날이 이미 시작되었고, 이로 인해 아픈 역사를 함께 기억하고, 증언하고, 사과하고, 화해하면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다짐하자"고 말했다.

무궁화회 기류 쥰이치 이사장도 인사말에서 "우리는 오늘의 집회를 계기로 일본과 한국의 관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의 우호와 친선관계를 더욱 발전시켜나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태그:#강제징용노동자, #무궁화회, #공재수, #김한수, #평화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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