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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5일, 시간강사 서아무개씨가 교수 채용비리를 폭로하는 유서를 남긴 채 자살했습니다. 서씨는 5장의 유서 안에 돈으로 사는 교수직과 대필논문 등 대학내 만연한 풍조를 고발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현재 시간강사로 강단에 서거나, 그들을 옆에서 지켜보는 지인들을 통해 '비정규교수의 삶'을 들어봅니다. [편집자말]
나는 4년차 시간강사다. 4년은 시간강사로서 명함도 못 내밀 수치지만 지난 3년간 8개 대학에서 2500명에게 120학점을 강의했으니 말할 자격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닌 듯하다. 나는 이 직업이 '아직까지는' 무척이나 좋다. 강의하는 것이 즐겁다. 그러나 강의하는 '삶'은 힘들다.

어쨌든 '힘들어 죽겠다!'고만 하소연 할 생각은 없다. 또 그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동조를 강요할 마음도 없다. 중요한 것은 내 전공은 구조조정 상위권을 달리는 사회학이고 또한 국내파이니, 1억 가지고 오면 교수시켜 준다는 곳조차 없다. 고로 난 미래에 대한 기대가 없다. 그래서 오히려 이 문제를 냉정하게 보고자 한다.

이미 '자본'화 된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살기

시간강사들의 주 수업 공간인 한 지방대학의 교양과목 강의실
▲ 콩나물 강의실 시간강사들의 주 수업 공간인 한 지방대학의 교양과목 강의실
ⓒ 박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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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이후 8명의 시간강사가 자살했다. 희생자가 이렇게 줄기차게(?) 있음에도,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이 여의도 한복판에서 교원지위회복을 주장하며 천막농성을 벌인 지 1000일이 넘었음에도 시간상사 처우 문제는 별다른 변화가 없다.

대학에 입학 후 10년 넘게 공부한 사람의 운명이 지도교수가 누구인지에 따라 좌우된다. 공부는 죽도로 했는데 인생은 복불복(福不福) 게임인 셈이다. 주변에서는 "그런 교수 만나지 마라"고 (그것도 충고라고) 한다.

이미 대학이 '자본'자체가 되었다고 볼 때, 시간강사의 미래는 밝지 않다. 인문사회 계열은 앞으로 안 망하면 다행이다. 개설되는 과목도 점점 실용주의 과목들이 많다. 이른바 대학에서 학습되는 이론이 아니라 현장의 기술이 먹힌다. 대학에서 짠밥 먹은 강사들, 특히 인문사회 전공자들은 더욱 더 '자리'가 좁아진다(자살한 8명 중 7명이 인문사회계열이다).

중요한 것은 '처우를 이따위로 하는 것'이 학교경영의 효율성으로 둔갑한다는 것이다. 등록금 올라갈 일을 학생들부터 좋아하지 않는다. 대학은 시간강사에게 의존할수록 학생들에게 환영받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방법은 가진 자가 나누는 방법인데 그 대상이 교수니까 이건 씨도 안 먹힐 일이다. 부당한 일을 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교수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시간강사의 처우개선에 교수의 파이가 분할된다면 그들은 100% "어떻게 해서 이 자리에 왔는데" 무슨 소리냐며 흥분할 것이 뻔하다.

그런데 이를 교수들의 인성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이들은 '시간강사'를 경험한 사람이다. 그 어렵다는 과정을 이겨내고 통과한 사람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그들에게 교수직은 '적절한 보상'이자 시간강사와는 '구별'되는 증거나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교수와 강사는 동일노동을 하는 '동지'가 평생 될 수 없다. '이긴 자'가 아직 덜 누렸다는데 무슨 말을 한다 말인가.

강사와 교수가 연대해야 할 동지가 아니라는 것은 이미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인데 문제는 그렇게 신자유주의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정작 '경쟁'은 실종되었다는 것이다. 경쟁의 시대답게 순수하게 교수와 강사의 강의력(力)만을 가지고 맞짱을 떠보는 시스템이 갖추어져있다면 때론 강사의 처우가 불합리하다는 것을 논리적으로도 설명할 수 있을 터. 그러나 다 알고 있듯 이 바닥은 경쟁이 아니라 "찍히면 죽는" 시스템이다. 그러니 이를 '악용' 하는 사람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아래로부터의 소리는 들리는가? 하지만 곧 '시간강사'의 길로 들어올 박사과정 학생들은 '더' 무관심하다. 왜 그럴까? 이유인즉 그들 자신이 너무나 강사가 되고싶기 때문이다.

이건 공부를 해보면 안다. 대학에서 강의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흥분되는 일인가를. 그러니 시간강사의 '고용을 보장'하라는 담론에 이들은 고개를 가웃거린다. 그러면 난 언제 강의하냐고 따진다. 자리가 나야지 강의를 할 수 있는 거 아니겠는가.

연구는 아예 못하고, 하루 3시간 자도 생활은 헐~ 

14일 서울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한국비정규교수노조가 시민단체 및 학생단체 등과 함께 공동기자회견을 가졌다.
▲ 스승의 날에 즈음한 강사들의 기자회견 14일 서울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한국비정규교수노조가 시민단체 및 학생단체 등과 함께 공동기자회견을 가졌다.
ⓒ 한국비정규교수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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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에 나는 700만원을 벌었다. 나도 놀랐다. 좋다고? 이건 미친 짓이다. 시작은 1~2월 수입이 '0원'이라는 현실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강의 부탁 전화가 걸려온다. 시간만 맞으면 '무조건' 오케이다. 이번엔 천운이 따랐다. 그렇게 4개대학 5과목 24학점이 기막히게 겹치지 않고 배치되었다. 이렇게 달리면 6월쯤에 마이너스 통장을 졸업하는 기막힌 일도 가능하다.

개강을 하면서 월~금을 기준으로 3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다. 75분 기준으로 일주일 16번 강의를 위해 지하철 250정거장 지나다니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말 그대로 체력고갈. 하지만 고생이 기뻤다. 앞으로 이런 기회가 평생 다시 오겠는가? 물론 이동안 내 공부는 하나도 못했다. '조금' 못했다 이런 것이 아니라 '아예' 못했다(강사와 교수의 간격이 벌어지는 정확한 지점이 바로 여기다).

짬짬이 칼럼을 쓰는 등의 부수입 등을 합쳐서 매달 400만원 정도를 벌었다. 그런데 5월 달에 또 다른 접촉이 있었다. 연구용역 공모가 눈에 보였다. 내가 공부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주제였다. 그러나 약간 응용하면 가능할 듯했다. 그렇게 2주를 밤새워 연구 프로포잘을 준비했다. 뽑아만 주면 목숨바쳐 연구하겠다고 거짓말을 했다. 정성(?)이 통했는지, 운 좋게 선정되었다. 150만원의 선금을 받았다.

그때 한 온라인 교육콘텐츠 업체에서 연락이왔다. 몸은 녹초였지만 계속 7~8월이 생각났다. 이 기간 예상수입은 0원이다. 그리고 다음학기 강의 배정 전화도 늦다. 이미 물건너간 강의가 많다는 거다. 대충보니 100만원도 벌 수 있을까 의문이다. 고로 내가 '현재 몸 상태'를 고려할 상황이 아니라는 거다.

얘기를 들어보니 1주일 정도 바짝 촬영하면 한 한기 분량이 완성된단다. 그러면 150만원을 받을 수 있고 이후 강의가 개설될 때마다 수강생에 따라 급여가 지속적으로 나온단다. 이른바 시간강사에게 고정수입이 생긴다는 거 아닌가. 마다한다는 것은 사치.

중간고사 기간을 전후하여 약간의 틈이 나는 시간을 노렸다. 밤새워 강의안을 준비하고 아침 9시부터 밤 9시까지 옷을 바꿔 입으면서 촬영을 했다. 그렇게 몸은 무너졌다. 촬영이 끝나니 중간고사 채점할 것이 700장이다. 또 1주일을 꼬박 밤을 새웠다.

하지만 괜찮다. 벌 수 있을 때 벌어놓는 게 나에게 좋고 내 가족에게 좋은 것이라 생각했다. 1년에 700만원을 버는 강사가 수두룩한데, 나는 아주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몸에 이상이 왔다. 위궤양, 흉통, 소화불량. 온몸에 근육통. 한의원에 가니 '기'가 빠졌단다. 한 달의 절반을 뜬 눈으로 지샜으니 당연한 거 아니겠는가.

시간강사는 미래를 설계해서는 안 된다?

난 왜 이렇게 '지독히도' 살아야 했을까? 왜 강의를 줄이지 않는 것일까?  건강도 문제지만 중요한 것은 '내' 공부를 하나도 못하고 있지 않은가? 나 아직 박사 아니다. 학위논문이 제일 중요한 것인데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지난 3개월간 1%도 진도를 나아가지 못했다.

무슨 소리. 이건 주유소 아르바이트와는 다르다. 내 개인적인 이유로 한 타임 쉬고 다음에 복귀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쉬면 복귀는 없다. 그래서 시간강사는 미래를 '함부로' 설계할 수가 없다. 다시는 오지 않을 '찬스' 앞에서 조금의 망설임도 있어서는 안 된다.

어차피 나를 도와줄 사람은 대학도 아니고 교수도 아니고 내 후배도 아니다. 이 사회는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이 사회의 분위기는 "시간강 3만원? 식당 아주머니는 하루종일 일하고 5만원 받습니다!"라고 따진다. 그러니 이렇게 사람이 죽어도 동정은 하지만 '한없이 나약한 인간' 그 이상의 논의를 하지 않는다.

시간강사는 이러한 상황을 매우 공포스럽게 느낀다. 시간강사가 이런 존재라는 것에 심각한 회의를 느낀다. 공포는 사람을 위축시킨다. 그리고 비틀어가기 시작한다. 그래서 어떤 시간강사는 다가오는 미래에서 희망을 볼 자신이 없다. 그래서 자살을 택한다. 내가 미친듯이 이번 학기를 보내는 것도 미래에 대한 희망이 아니라 공포로 위축된 내 심리적 상황 때문이었다.

답? 그건 나도 모르겠다. 몇몇의 요구사항을 보면 이론적으로는 전혀 손색이 없지만 과연 '한국사회'가 여기에 답을 해 줄지는 의문이다. 다만 이런 삶이 오랫동안 공부한 사람 앞에 놓여있다는 것이 분명한 사회적 낭비라는 것은 알아주었으면 한다. 사회는 시간강사를 '잘' 활용할 생각을 했으면 한다.


태그:#시간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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