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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5일, 시간강사 서아무개씨가 교수 채용비리를 폭로하는 유서를 남긴 채 자살했습니다. 서씨는 5장의 유서 안에 돈으로 사는 교수직과 대필논문 등 대학내 만연한 풍조를 고발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현재 시간강사로 강단에 서거나, 그들을 옆에서 지켜보는 지인들을 통해 '비정규교수의 삶'을 들어봅니다. [편집자말]
비정규 교수의 자살을 대면할 때마다 착잡함과 불안감이 밀려든다. 나 역시 다르지 않은 삶을 살기 때문이다. 유서를 접하고 눈물이 흘렀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들끓었을 열정과 분노가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학생들에게 :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죄송합니다. 여러분 성적이라도 처리하고 생각하려고 했는데,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라는 글은 무거웠다. 채 보름도 남지 않은 학기,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죄송하면서도 생을 보름만이라도 더 유예할 수 없을 정도의 치욕스러움과 분노를 느꼈음이 글에서 고스란히 전해졌다.

"전국의 시간강사 선생님들에게 : 힘내십시오. 그날이 오지 않겠습니까." 아, 이 말은 또 뭔가. 과연 그의 말처럼 힘을 낼 수 있을지, 생존권도 보장받지 못하는 오늘을 보면서 그날을 기약할 수 있을지 착잡하기만 하다.

진화하는 논문 부정, 유혹과 착취

죽음으로써 50여 편의 논문이 내 논문이었다고 수사를 요청한 논문대필 사건이 과연 어느 정도 밝혀질지 의문스럽다.
 죽음으로써 50여 편의 논문이 내 논문이었다고 수사를 요청한 논문대필 사건이 과연 어느 정도 밝혀질지 의문스럽다.
ⓒ 박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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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이 쓴 50여 편의 논문에 지도교수는 이름만 올렸다고 수사를 의뢰했다. 대학은 연구와 교육을 위해 존재하고, 교수는 연구와 교육을 위한 직업인이다. 논문은 연구의 가시물이므로, 교수들은 당연히 논문을 써야 한다. 그 일 하라고 월급 받으니까. 그럼에도 대학사회에는 논문 대필이 만연해있다. 논문 편수를 채우거나 늘리려는 정규직 교수들의 욕망이 약자인 대학원생들이나 비정규 교수들을 악마적 유혹에 흔들리게 하고 스스로 착취의 현장에 빠져들게 한다.

당장 재임용이 걸린 정규직 교수들은 논문 편수 채우기가 중요하다. 재임용이 아니라도, 논문 편수를 늘리면 개인 성과와 명성을 얻는 데다 대학들은 월급 이외에 달달한 논문지원비까지 한몫 챙겨준다. <네이처>지와 <사이언스>지에 쓰면, 논문 1편에 1억, 2억까지도 퍼부어준다. 직위와 명예와 돈까지도 보장해주는 게 논문이다.

욕망에 눈이 어두운 정규직 교수들은 논문 부정을 저지른다. 예전에는 논문 표절이 문제되었으나, 현재 학계는 논문 부정이 진화하고 있다. 표절하면, 인터넷이 발달한 요즘에는 금방 들통난다. 그래서 예전처럼 남의 논문이든 자기 논문이든 대놓고 표절하지는 않는다. 대신, 논문에 기여한 바가 전혀 없거나 공동연구가 아님에도, 논문에다 슬쩍 이름 올리기를 한다. 무임승차요, 약자들을 착취하는 행위이다.

비정규 교수나 대학원생들이 정규직 교수들이 던지는 논문 부정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는 까닭은 생명줄이 걸렸기 때문이다. 대학원생들은 학위논문 통과가 걸렸고, 학위소지자들은 정규직 교수 손에 강의나 취업이 달렸기 때문이다. 집단연구가 많은 이과계열과 달리, 단독 연구가 많은 인문사회계열에서 최근 공동연구가 증가한 한 가지 이유이다.

주변의 교수들 가운데는 최근 몇 년 동안 단독연구는 없고, 순전히 대학원생들과 비정규 교수의 논문에 자기 이름 올린 논문들로 잔뜩 배불린 교수들이 많다. 교수가 노골적으로 요청하거나 아니면 학과의 관행이 되어버려서 내 논문을 내 논문이라 부르지 못한다.

표절과는 달리, 이름 올려주기는 권력 쥔 교수들의 억압에 의해서이지만 결국 이름을 올려준 사람이 논문을 쓴 당사자이기에 '공모의 덫'에 놓이게 된다. 그래서 밝혀내기가 매우 어렵다. 논문 부정을 까발릴 자는 논문을 쓴 사람인데, 그는 생명줄이 걸린지라 쉽게 까발리지 못한다. 까발린다 해도, 나도 거들었다느니, 관심이 있었다니, 지도했다니 하는 말로 얼마든지 논문 부정을 피해갈 수 있다. 죽음으로써 50여 편의 논문이 내 논문이었다고 수사를 요청한 논문대필 사건이 과연 어느 정도 밝혀질지 의문스럽다. 그 결과를 기다린다.

강의노동만 샀다고? 몸의 반쪽만 사겠다는 대학

지난 5월 14일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은 교육과학기술부 후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비정규직 천대하는 교과부 장관 각성하라"며 "비정규직 착취 제도의 원형인 대학시간강사제도를 철폐하라"고 촉구했다.
 지난 5월 14일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은 교육과학기술부 후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비정규직 천대하는 교과부 장관 각성하라"며 "비정규직 착취 제도의 원형인 대학시간강사제도를 철폐하라"고 촉구했다.
ⓒ 한국비정규교수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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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교수노동조합에서 대학과 단체협상을 하면, 대학 측은 늘 목소리를 높인다.

"당신들의 강의노동만 샀다. 정규직 교수들은 연구도 하니까 당신들과는 차별적 존재이다. 강의노동의 대가로는 현재 시간당 임금만으로 충분하다. 오히려 시간당 임금으로 보면, 임금이 많다."

대학 측은 비정규교수들에게 철저히 연구와 교육을 분리해서 대응한다. 강의노동만 샀다는 논리는 억지이다. '분리하라 그리고 통치하라'는 식민지배자들의 사회지배논리이기도 하지만, 지배자들이 가장 쉽게 써먹는 논리이다.

대학에서 교육과 연구는 한 몸이다. 학교마다 강의를 할 수 있는 사람들 절대 다수가 석박사과정을 수료하였거나 학위소지자들인데, 이들의 정체성은 연구자이다. 왜 석박사과정을 밟고 학위논문을 쓰는가. 바로 연구자가 되기 위해서이다. 그 연구자들에게 대학들은 교육을 맡긴다. 교육과 연구가 아무리 한 몸이어도, 대학들은 한 몸을 어떻게라도 쪼개서 반값만 지불하겠다고 억지를 부린다. 

대학에서 교육과 연구가 한 몸이라는 증거는 곳곳에 있다. 강의노동만 사겠다는 대학에서조차 강의배정 원칙으로 최근 'O년간 논문 O편'이라는 내부규정을 내세우는 학과들이 여럿 있다. 강의전담교수를 선발할 때도 '논문 O편 이상'이라는 규정을 둔 학교들이 많다. 대학 스스로가 연구능력이 없으면 강의를 안 주겠다고 공표하면서도, 강의노동에만 임금을 지불하겠다는 것은 정당한 임금을 주지 않으려는 도둑 심보일 뿐이다.

그러면 어느 대학교수는 이렇게도 말한다.

"물론 연구를 열심히 하는 선생들도 있겠지만, 안 하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사실 정규직 교수들이 더 잘 안다. 취업을 위해서라도 비정규 교수들이 누구보다 더 연구에 매달리고 그 성과물도 많다는 사실을. 그런데도 연구하지 않는 몇몇 사례들을 적시하여 비정규 교수들을 반쪽짜리 인간으로 만들려고 한다.

정규직 교수 중에도 논문 한 편 없이 몇 년 동안 수업만 근근이 하고 임금을 받는 선생들이 있듯이, 비정규 교수들 가운데도 그런 사람은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정규직 교수들의 연구를 통째로 부정할 수 없듯이, 비정규 교수들의 연구노동 전체를 깡그리 부정할 수 없다. 연구하지 않는 이들에게 적절한 조치를 취할 문제일 뿐이다. 

대학엔 지원금 남아도는데 비정규 교수는 여전히 헐값

2010년 대학교육역량사업을 위해 교육과학기술부는 85개 대학에 2600억을 쏟아 부었다. 수십억의 뭉칫돈을 받아든 대학들은 '교육역량의 질적 제고'를 하면서 비정규 교수들의 교육역량은 모르쇠 한다. 각 대학에서 강의담당비율이 30~60%에 이르는데도, 비정규교수들의 교육역량 제고는 외면한 채, 남아도는 돈을 어떻게 반납하지 않고 다 쓰나 고민에 빠져있다.

2009년 교육역량사업으로 50여 억 원을 지원받은 한 대학은 단대별로 강의 잘 하는 교수 한 명에게 지원금을 주던 것을 돈이 남아돌자, 다음 학기에는 각 과에 한 명씩 돈을 돌렸다. 물론 비정규직은 강의를 아무리 잘 해도 그 대상이 될 수 없다. 지원금을 받느냐 아니냐 문제가 아니다.

대학이 조금만 생각이 있다면, 이런 짓은 하지 않을게다. 오히려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강의자 모두에게 훌륭한 강의를 장려한다면 대학교육의 질이 더 높아지게 된다. 그런데도 혹시나 그 돈이 자기 주머니를 떠날까봐 전전긍긍한다. 대학발전에 대한 고민도, 학습권을 가진 학생에 대한 고민도 없다.

또한 교수와 교직원들이 교재개발비 명목으로 한 달에 수십 만원을 받아 챙기면서도, 정작 비정규 교수들에게는 수업자료 복사조차도 허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수업시간에 필요한 영상을 보려면 노트북을 들고 오라는 대학까지 있다. 그러면 자료복사 안 해주고, 장거리를 이동해야 하는 비정규교수가 영상을 보여주지 않으면 된다. 그런데도 비정규 교수들은 오늘도 자료복사하고 노트북을 끼고 차에 오른다.

절반의 강의를 담당하는 비정규 교수들의 생존권마저 위협하면서 과연 교육역량을 제고할 수 있는가. 비정규교수들도 먹고 살아야 하는 인간이다. 비정규 교수가 한 가정을 꾸리자면, 대개 20시간 내외의 강의는 맡아야 한다. 20시간 강의를 하자면, 한 학교에서 그만큼의 시수가 나오지 않는다.

그 중에는 노동조합이 있어 시간당 임금이 나은 학교도 있지만 2~3만원 하는 학교도 섞여있기 마련이고, 가까운 거리의 학교도 있지만 몇 시간을 자동차로 달려가야 하는 학교도 섞여있다. 그렇게 20시간 정도를 강의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 강의의 질을 보장하기가 얼마나 어렵겠는가.

시간강사의 유서처럼, 힘낼 날이 올까

그런데도 놀랍게 몇 년 전 한 대학의 강의평가 결과를 보니 정규직 교수의 강의와 비정규직 교수의 강의결과는 별 차이가 없었고, 더 나은 결과들도 있었다. 죽을 힘을 다해 비정규교수들이 오늘을 버티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도 몇 년, 십 몇 년을 그렇게 버티지는 못한다.

자살 소식을 듣고 내 미래를 떠올려보는 이 착잡함. 비정규 교수 문제는 교원에게 교원지위를 주지 않는 정부의 반교육적 문제이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소리 소문 없이 잘라버리는 봉권적 권력구조의 문제이며, '강의노동'이라는 이름으로 임금을 후려쳐서 생존권을 파괴하는 인권말살의 문제이다.

강의 10여 년, 한 '시간강사'의 자살을 보며 생각에 잠긴다. 과연 그의 말처럼 힘을 낼 수 있을지, 그날이 올지 의문에 잠긴다.


태그:#비정규교수, #'시간강사', #'시간강사'의 자살, #논문 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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