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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오지 않았다. "교육적 차원에서" 누리꾼을 고소하고, "찍찌마 XX, 성질이 뻗쳐서 정말" 식의 각종 명언(?)을 남긴 유 장관. 한 나라의 문화 정책을 책임지는 그에게는 "교육적 차원에서"라도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그래서 <오마이뉴스>는 4월 27일 "유 장관에게 필요한 맞춤형 특강"이라며 공개적으로 그의 특강 참여를 제안했었다. 유 장관이 와 줬으면 하는 강의는, 김정헌 전 한국문화예술위원장의 '예술가인 내가 MB와 유인촌에 분노하는 까닭'이었다. 이 강의는 4월 29일 저녁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에서 진행됐다.

 

유 장관은 취임 후 "이전 정권의 정치색을 가진 문화예술계 단체장들은 스스로 물러나야 한다"며 문광부 산하 기관장 여러 명을 강제로 내쳤다. 김 전 위원장도 후배의 강압에 내쳐진 선배 문화예술인 중의 한 명이다. 그러다가 김 전 위원장은 법원의 결정으로 지난 2월 약 1개월 동안 문화예술위로 다시 출근을 하기도 했다.

 

문화예술인으로서 보기 드문 일종의 '출근 투쟁'이었다. "조용한 화실에서 자신이 상상하는 세계를 그림으로 표현하면" 행복한 미술가 김정헌은 왜 시끄러운 세상의 한 복판에서 홀로 싸웠던 것일까.

 

"세상이 이렇게 파괴되고 있는데 어떻게 분노를 안 하나"

 

그건 부당한 세상에 대한 한 인간의 의사표현이자, 한 예술가가 몸으로 재현한 부조리한 세상의 한 단면이었다.

 

"이 시대 예술가는 분노할 줄 알아야 합니다. 분노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예술을 잘 할 수가 없어요. 감정이 열려 있어야 분노도 할 수 있는 겁니다. 예술의 바탕이 되는 세상과 삶이 이렇게 파괴되고 있는데 아무 감정이 없다? 예술가로서 자격이 없는 것이죠."

 

결국 김 전 위원장에게 '분노'는 아주 자연스런 감정이었다. 게다가 세상에 예민한 촉수를 내밀고 소통하면서 자신의 감성과 상상력을 표현하는 예술가에게 최근의 사회는 얼마나 답답한 감옥 같았을까.

 

김 위원장은 "이 정부의 가장 큰 문제는 거짓말"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눈에 뻔히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누구나 다 아는 상식적인 일에도 이 정부는 온갖 거짓말로 대충 둘러댄다"고 혀를 찼다.

 

"4대강 사업 공사 현장을 갔다 온 사람과 안 간 사람의 느낌은 확연히 다릅니다. 강을 전부 파헤치고, 밤새도록 불 밝히고 큰 덤프트럭이 왔다갔다 하는데…(한숨) 그걸 봐야 실감을 합니다. 정말 강을 죽이는 일인데, 강을 살리는 사업이라고 하니… 정말 어떻게 저렇게 뻔뻔한 거짓말을 하는지 놀랍습니다."

 

그는 "예술가는 물론이고 사람들은 자연과 사회에서 영감을 받는데, 그렇게 멋있는 강을 싹둑 자르고 직선의 뚝을 쌓는 것을 보면 분노 이외에 다른 감정을 가질 수 없다"고 탄식했다. 그러면서 그는 "4대강 사업을 녹색성장이라고 하는 건 '거짓말의 알짜배기'"라고 일갈했다. 이어 죽비 소리 같은 충고도 빠뜨리지 않았다.

 

"나는 거짓말이 이 정권을 붕괴시킬 것이라고 봅니다. 거짓말은 결국 국민들을 속이는 것이고, 자기들 스스로 붕괴할 성을 만들고 있는 겁니다. 거짓말은 하다 보면 계속 할 수밖에없고, 끝내 밑바닥까지 가게 됩니다. 정권이 자신들의 안위를 정말 생각한다면 지금이라도 '거짓말 하지 말라'는 명진 스님의 말씀을 새겨듣고 반성해야 합니다."

 

"거짓말이 이 정권을 붕괴시킬 것... 명진 스님 말씀 새겨들어라"

 

김 전 위원장이 서울 삼성동 봉은사 주지 명진 스님의 '말씀'을 괜히 인용한 게 아니다. 그는 얼마 전 봉은사를 방문했다가 그곳에 걸린 "아주 멋진 현수막을 봤다"고 했다. 예술가의 눈에는 그 현수막이 기가 막한 예술 작품으로 보였던 것일까? 치장이라고는 테두리밖에 없는 현수막에는 검은색 글자 9개가 담백하게 새겨져 있었다.

 

"거짓말을 하지 맙시다."

 

김 전 위원장은 "이 글귀는 종교계가 이 정권에게 보내는 가장 멋진 메시지"라며 웃었다. 사실 봄이 오는 길목이었던 지난 2월, 김 전 위원장의 '출근 투쟁'과 꼿꼿한 모습으로 많은 이들은 통쾌해 하고 즐거워했다. 곧이어 꽃피는 4월이 오자, 이번엔 명진 스님이 나섰다.

 

사실 김 전 위원장과 명진 스님은 과거 80년대부터 알고 지낸 '절친'이다. 그래서 김 전 위원장은 "내가 나섰다가 좀 가만히 있으니까, 이번엔 명진 스님이 나서더라"며 "아마 이런(?) 사람들끼리는 서로 네트워킹이 돼 있나 보다"며 웃었다.

 

예술가가 죽비 소리를 날리고, 스님이 예술적인 담백한 문장으로 세상과 불화하는 지금. 이런 세상이 꼭 정상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김 전 위원장은 "요즘 '회피 연아'라는 게 인기인데, 요즘은 날씨도 이 정권을 회피해 그야말로 '회피 봄날'이다"며 "64번째 봄을 맞이하고 있는데, 정말 이런 봄은 처음이고 '봄도 이 세상을 뜨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씁쓸하게 웃었다.

 

김 전 위원장은 "이명박 정부의 문화 정책은 한 마디로, 경박·천박·명박스럽다"며 "어떻게 문인들을 지원하면서 집회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확약서를 요구할 수가 있느냐,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문화정책의 원칙을 다시 되새겨야 할 것"이라고 문화정책의 변화를 촉구하기도 했다.

 

"'회피 연아'라더니... 이젠 봄마저 이 세상을 회피하고 있다"

 

또 김 전 위원장은 지난 2월의 '출근 투쟁'을 회고하며 "많은 사람들이 내 모습을 보고 즐거워했는데, '아, 나도 세상을 즐겁게 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즐거운 마음으로 지냈다"고 밝혔다.

 

그의 '해고 효력'에 대한 다툼은 지금 대법원에 올라가 있다. 여기서 승소를 하면 김 전 위원장은 다시 '출근 투쟁'을 해야 할까? 사실, 그걸 바라는 건 너무 가혹한 것 같다. 한 예술가를 또 투쟁의 한복판으로 밀기 전에, 이 세상이 다시 온전한 모습을 되찾길 바라는 게 순서일 것 같다.

 

예술가 김정헌은 이미 즐기면서 싸우고, 웃으면서도 원칙을 버리지 않으며, 불의에 태연하게 맞서는 '예술적인 투쟁'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줬다. 그리고 이날 강연에서 그는 '회화 적인' 기억을 청중 70여명에게 들려줬다. 그가 80년대 공주교도소 내부 벽화를 그렸을 때의 기억이다.

 

"벽화 중 농촌 처녀가 참을 들고 걸어가는 모습을 그릴 때였어요. 벽에 매달려 그리고 있는데, 징벌방에 홀로 갇혀 있는 재소자가 그런 나를 창문으로 보면서 '선생님! 여자 치마 좀 짧게 그려주세요!' 뭐 그렇게 외치더라고요. 나도 그냥 뭐 '응, 알았어!' 대답했죠.

 

그 친구는 징벌방에서 할 일이 없으니, 종일 내가 어떻게 그리나 지켜본 겁니다. 그 친구가 당시 내 유일한 관객이자 비평가 역할을 했덤 셈이죠. 그런데 지금 돌아보니, 치마를 짧게 그리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에게 좀 더 만족감을 줬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움이 남습니다.(웃음)"

 

그 재소자는 출소해 지금 김 전 위원장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는 '긴 치마의 실망' 쯤은 지우고, 매우 만족해하고 있을 것 같다.

 

2010년, 김 전 위원장은 20여년 전 공주교도소 벽화보다 더 큰 그림을 이미 세상에 그려 보였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김 전 위원장의 '행위 예술'을 보고 많은 감동을 받았다. 봄마저 이 세상을 떠나버렸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웃으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건 김정헌 같은 예술가 때문인 것 같다.

 


태그:#김정헌, #10만인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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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시랭은 고양이를, 저는 개를 업고 다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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