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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출구전략'(위기에서 정상으로의 복귀)으로부터 시작된 세계 경제질서의 새로운 '표준' 정립과 관련된 논의가 '뉴 노멀(New Normal, 금융위기 이후 새롭게 변화하는 특징, 현상, 추세를 말함)'이라는 다소 생소한(?) 개념으로 모아지고 있는 것 같다. 과거 '글로벌 스텐더드'로 특징되던 신자유주의 세계화, 금융화, 민영화 등의 기준은 더 이상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낡은 기준(올드 노멀, Old Normal)이 되었으므로, 새로운 설명의 틀(frame)과 표준(standard)이 필요하다는 것이 이 논의의 핵심이다.

최근 삼성경제연구소의 보고서에서 밝힌, 뉴노멀로의 변화(이행) 방향은 크게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과거 성장 이데올로기를 축으로 구조화된 과도한 위험투자와 레버리징이 심각한 금융위기로 표현되었으므로 필연적으로 '과잉과 탐욕의 해소과정'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 둘째, 미국 중심의 질서체계가 약화되고 중국을 위시한 신흥국들이 부상하는 다극체제로 바뀔 것이라는 것. 끝으로 시장의 자율 조정능력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으므로 국가(정부)의 역할을 새롭게 조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세계경제가 '저성장'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큰 이견이 없어 보인다.

삼성경제연구소 (2010.3)
▲ 위기 이후 세계경제의 뉴 노멀 삼성경제연구소 (2010.3)
ⓒ 문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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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간 해석의 차이(시스템 자체의 붕괴인가, 전성기의 종말인가)는 있을지라도, 신자유주의로 상징되는 세계경제의 운영 시스템이 상당한 기간 동안의 '입원 가료'를 요하는 큰 상처를 남기고 무너졌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 새로운(뉴노멀) 시대가 도래함으로 인해, 이제 과거(올드노멀)의 틀에 의존한 사고방식으로는 더 이상 현재를 설명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 경제는 물론 개별 국가의 각 경제주체들에 이르기까지 당면한 변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전환'을 요구 받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뉴노멀'과 일반 가정경제는 서로 어떤 관련성을 가지고 있을까? 경제성장이 정체되고, 중국이 새로운 강자로 등장하고, 정부 역할이 확대되는 것이 우리들 삶에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친다는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깊은 관련이 있고,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특히 첫 번째 주제(과잉과 탐욕의 해소)는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보통사람들의 삶과 깊은 상관관계를 지닌다. 그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전환기'에 발생하는 '디레버리징'(de-leveraging, 부채축소) 문제다.

디레버리징이란, (개인이건 국가건 상관없이) '빚의 규모를 줄여가는 것'을 뜻한다. 빚이 줄어드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개별 가정경제 측면에서 볼 때, 부채란 언젠가는 갚아야 할 돈이므로 빚을 줄이는 것은 바람직한 경제 현상이다. 하지만 신용(부채) 과다로 인해 경제주체(가계, 기업, 정부)의 태반이 빚더미에 올라 앉은 상황에서는 문제가 그리 간단치 않다.

돈을 빌린 자는 아직 갚을 준비가 안되어 있는데, 돈을 빌려준 자가 갑자기 빚을 갚으라고 하면 아주 곤란한 문제(상환 불능)가 생기게 될 것이고, 반대로 돈을 빌린 사람들이 빚을 갚는 것에 소득의 대부분을 사용하게 되면 돈이 '돌지 않음'으로 인해 경기 순환에 문제(소비 둔화)가 생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컨설팅업체 맥킨지(McKinsey) 보고서에 따르면, 2009년 2분기를 기준으로 볼 때 미국, 영국을 포함하여 총 5개 국가의 '가계부문' 부채가 매우 심각한 수준이고 따라서 디레버리징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디레버리징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빚이 많다는 것과 같은 뜻임).

아래 그림에서 빨간 색으로 표시된 부분이 부채축소가 요구되거나 또는 축소가 예상되는 국가 및 영역이다.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발생 가능성을 기준으로 볼 때 (가계부문) 디레버리징 가능성이 높은 나라는 5개 국가(스페인, 영국, 미국, 한국과 캐나다)다. (참고로 이 그림에서 빨간 색으로 표시된 영역은 매우 심각한 상태를 의미한다)

맥킨지 글로벌 연구소 (2010.1)
▲ 부채와 디레버리징 (세계 신용버블과 그로 인한 경제적 효과) 맥킨지 글로벌 연구소 (2010.1)
ⓒ 문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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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여기서 맥킨지 보고서에 나온 다른 그림 하나를 더 보도록 하자.

이 그림은 앞서 보여준 그림과 마찬가지로 디레버리징 가능성을 나타낸 것인데, 이전 그림과 차이가 있다면 기준 시점이 2006년 4분기라는 점이다. 두 그림 사이에는 대략 2년간의 시차가 존재한다. 이제 두 개의 그림을 비교해 보자. 금융위기 이후 지난 2년간 영국과 미국 그리고 스위스는 금융 부문의 디레버리징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어 현재는 가능성이 현저히 줄어들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달리 캐나다는 가계부채가 더 늘었고, 스페인의 금융기관도 재무건전성이 악화되었다.

맥킨지 글로벌 연구소 (2010.1)
▲ 부채와 디레버리징 (세계 신용버블과 그로 인한 경제적 효과) 맥킨지 글로벌 연구소 (2010.1)
ⓒ 문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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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부문에서의 디레버리징이란 개별 가정에서 '부채를 줄여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과연 위 4개 국가의 개별 가정들은 빚을 줄였을까? 2년 전이나 지금이나 색깔(빨강)은 바뀌지 않았다. 여전히 부채규모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국가들과 우리나라 사이에는 한 가지 사실이 은폐되어 있다. 바로 '가계 저축률'이다(저축률은 부채가 줄어들고 있다는 구체적 증거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래 저축률 그래프를 보라. OECD 보고서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2010년도 예상 저축률은 3.2%로, 일본과 함께 비교 대상 17개국 가운데 최하위다. 금융위기 이후 미국 등 선진국들은 빚을 줄이고 저축을 늘려가는 반면, 우리 저축률 그래프는 반대로 움직이고 있다(스페인, 미국, 영국과 우리나라를 비교해 보라).

주요국가 가계 저축률 전망치(단위 : %) OECD (2009.7)
 주요국가 가계 저축률 전망치(단위 : %) OECD (2009.7)
ⓒ 문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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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2000년 10.7%였던 개인저축률은 2001년(6.4%), 카드대란이 일어났던 2002년(2.2%) 이후 현재까지 한 자리 숫자를 맴돌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지난 2년간 가계부채 규모는 오히려 더 늘었다. 왜? 재론할 여지도 없이 주택담보 대출이 지속적으로 증가했기 때문이다(현재 우리나라 가계 대출총액은 300조원을 훨씬 상회하며, 가계 대출금액 중 주택담보대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반 이상이다).

이미 지난 2006년에 가계 디레버리징 가능성이 높았음에도 빚이 줄어들지 않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 마디로, 빚을 줄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2008년 말을 기준으로 가처분소득 대비 금융부채 비율은 1.4배다. 쉽게 말해, 은행 빚을 갚으려면 1년간 벌어들인 소득의 1.4배를 지출해야 한다는 뜻이다. 지난 10년간 평균 소득증가율은 4.2%인데 반해 소비 증가율은 6.9%였다. 소비지출이 늘어난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들의 과소비 때문에? 그렇지 않다. 더 크고, 더 심각한 사회경제적 요인이 존재한다. 바로 주거비와 교육비다. 빚 권하는 사회, 부채(주택담보대출)를 양산하는 정부 정책이 문제의 상당한 원인을 제공했다. 과도하게 은행 빚을 얻어 집을 장만하다 보니 부채 상환에 무리가 갈 수밖에 없고, 식을 줄 모르는 사교육 열풍으로 한국의 가정들은 돈을 모두 털렸다. 지금 대한민국 가정경제는 이른바 '비선택적 지출'이라 불리는 두 개의 암초 사이에 걸려 오도가도 못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러므로, 현 시점에서 가계부문의 디레버리징(부채 축소)이 자발적으로 발생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오히려 디레버리징은 금융부문에서 발생할 가능성이 더 크다. 만일 금융부문에서 디레버리징(부채 회수)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한 마디로 '끔찍한' 사태가 발생한다. 왜 그런가? 주택가격 하락을 축으로 전개되는 이 한 편의 '시나리오'가 그 이유를 잘 설명해준다.

① (가계부채 중 주택담보대출 비중이 큰 우리나라의 경우) 만일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면 대출기관 입장에서는 담보물의 가치가 떨어지게 되므로 재무 건전성에 문제가 발생한다.
② 정부는 금융기관의 부실화를 막기 위해 은행에 대한 관리 감독을 강화한다(자기자본비율의 상향 조정).
③ 은행은 신규 대출을 줄이고 기존 대출금에 대한 빠른 회수에 착수한다(가격 하락에 따른 추가 담보 요구 및 대출금 일부 상환).
④ 이미 가계부채로 중병을 앓고 있는 가계 경제는 더 큰 어려움에 빠진다(채무불이행 상태에 빠지는 개인 및 가계 수 증가).
⑤ 자산매각 이외에 부채 상환의 대안이 없는 가정들이 하루라도 빨리 집을 팔기 위해 (경쟁적으로) 싼 값에 매물을 내놓는다.
⑥ 부동산 가격이 폭락하고 시장은 대혼란(패닉)에 빠진다.

최근 정부가 부동산 가격 안정을 최우선 목표로 놓고 '고정금리 대출 확대와 기존 대출금의 장기대출 전환 등의 방법으로 가계대출의 구조를 바꾸겠다'(2010년 4월14일/김종창 금감원장)고 말하는 배경에는 만일 이 시나리오가 현실화된다면 그 자체가 '파국'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격적인 출구전략을 구사하기 이전에 다소라도 충격을 완화할 수 있는 사전 조치를 취하겠다는 뜻이다(전세계적으로 디레버리징 가능성이 가장 높은 부문은 가계부채이며, 한국 역시 예외가 아니라는 것이 맥킨지 연구소 측 주장이다).

출구전략에 대한 해법 마련은 정부가 고민할 일이니 이쯤 하도록 하고, 이제 작금의 우리 현실을 돌아보도록 하자.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이미 고용사정은 악화될 대로 악화되어 있고, 가계부채 규모는 위험 수위를 넘어선 지 오래며, 사회적으로는 중산층의 붕괴로 인해 신 빈곤층들이 늘어나고 있다.

고용 불안에 따른 구매력 저하는 내수 시장을 피폐하게 만들고 있고, 대기업 중심의 수출 이외에 '무엇을 미래 성장동력으로 설정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분명한 방향성이 제시되지 않고 있다. 또한 급속하게 변하고 있는 세계 경제질서 하에서 정부는 (맞든 틀리든) 어떤 '뉴노멀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한편, 최근 민간 연구소들은 디레버리징의 위험성을 경고하면서 그 대응 전략으로 '금융기관 감독 강화와 재무 건전화 조치의 필요성'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위험투자에 따른 대규모 손실위험을 제어하지 못해 금융시스템의 안정성 확보에 실패했으므로, 자기자본 규제와 감독을 강화하여 금융기관의 안정성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 주장의 핵심이다. 서브 프라임 부실로 미국에서 다수의 금융기관이 파산한 것이 불과 얼마 전의 일 아닌가? 따라서 이러한 접근방법은 합당한 논리로 생각될 수 있다.

하지만 이 논리의 배경에는 큰 목적(금융회사는 죽으면 안 된다)을 위해서는 작은 희생(채무자들의 개인적 사정)은 어쩔 수 없다는 무서운 '칼날'이 숨겨져 있다(다수의 채무자들을 보호할 수 있는 '금융 안전망'이 부재한 상황에서 '금융회사의 안전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논리가 과연 정당한 것인가?'에 대해 반대 입장을 분명히 밝힌다). 따라서 만일 어떠한 이유든 금융기관 '주도'의 디레버리징이 시작된다면, 중산층 이하 많은 서민들은 심각한 압박(부채 회수에 따른 신용경색 및 가계 재무구조 악화)을 받을 것이 자명하다. 그리고 이 게임은 이미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지난 수년간 경기 진작 혹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빚(신용)을 남용했고, 그 결과 많은 국민들이 빚더미에 올라 앉아 있는 상황에서 만일 목적이 바뀌어 새로운 '출구'를 찾고자 한다면 응당 과거의 문제(과잉 생산된 부채)를 풀 수 있는 해법이 제출되어야 한다. 대안은 있는 것인가? 지금 대안의 부재보다 더 불길하고 위태롭게 생각되는 것은 '한 쪽을 살리기 위해 다른 쪽을 희생하는' 잘못된 대안의 제출이다. 하지만 국민경제의 틀 안에서 정부, 기업, 가계가 가지는 상호 연관성은 '한 쪽의 행복과 다른 쪽의 불행'으로 끝나지 않으며, 곧바로 '더 크고, 위험한 모두의 불행'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이미 과다채무를 안고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상식의 범주로 볼 때, 채무부담을 가진 사람이 '빚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크게 3가지가 있다. 인플레이션 효과로 빚의 무게가 줄어들거나, 파산하거나, 허리띠를 졸라매는 방법이 그것이다. 인플레이션 효과는 기대값이 낮고 효과도 크지 않다. 개인파산이란 말 그대로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것이므로 재고의 가치가 없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절약하는 것뿐이다(절약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소프트 랜딩(Soft landing)이라는 말을 써도 좋다). '부채 청산'을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고 씀씀이를 조절하면서 수입과 지출의 균형을 잡아가는 것. 재량 소득의 범위 안에서 합리적 지출을 하는 것. '덜 벌고 적게 쓰지만' 다운시프트(Down-shift)를 통해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소비의 미학'을 만들어가는 것. 그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길을 걸어가야 한다. 그리고 이 길은 그렇게 심각한 고통을 수반하는 것도 아니고, 실현 불가능한 일은 더욱 아니다.

보통의 일반 가정에서는 당면한 '저성장'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말할 필요도 없이 가계 재정운영의 기본원칙은 첫째도 안정, 둘째도 안정이다. 저성장(경기 불황)과 고용불안의 사회경제적 조건 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벌어들인 소득을 잘 지켜나가는 것이다. 대박의 꿈을 접고, 빚과 위험 자산을 멀리하고, 적은 규모라도 저축을 늘려나가야 한다. 가계든 기업이든 국가든 이른바 '지속 가능성'이란 오직 안정된 기반 하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가계 재무구조를 마이너스(빚)에서 플러스(저축)으로 바꿔내는 작업이 최우선적으로 따라주어야 한다. 여전히 문제의 핵심은 소득이 아니라 '소비'다. 절약과 절제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가계 재정을 흑자상태로 가져가는 것. '자산소득에 기댄 불안정한 생활이 아니라 노동소득에 기초한 안정된 생활'을 유지해 가는 것. '더 많은 것'이 아닌 '더 나은 것'을 추구해 가야 한다. 이 땅의 보통사람들에게 필요한 '뉴노멀' 기준, 그 처음과 끝은 '안정'이다.



태그:#뉴 노멀, #출구전략, #디레버리징, #저성장 시대, #가정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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