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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김포 인근에는 약 50여명의 줌머인들이 공동체를 형성하며 살고 있다. 2002년 8명의 줌머인들로 시작한 이들 '재한줌머인연대'는 한국 땅에서 치타공 산악지대의 현실을 알리고 연대를 호소하는 활동을 9년째 해오고 있다.

'줌머'는 치타공 산악지대의 선주민으로 챠크마, 마르마, 트리퓨라, 탄챵갸, 미로, 루샤이, 큐미, 챡, 컁, 바움, 팡콰 11개 종족이 모인 소수민족이다. 치타공 산악 지대가 방글라데시의 영토인 관계로 줌머인도 방글라데시인으로 분류될 수 있지만, 이들은 방글라데시의 절대 다수를 이루는 벵갈리족과 인종은 물론 언어와 종교를 비롯한 모든 문화가 다르다. 오랜 세월 동안 치타공 산악지대를 삶의 터전으로 삼아왔던 이들이 내몰리기 시작한 것은 파키스탄 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1947년,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고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리되면서, 치타공 산악지대는 파키스탄 정부의 관할지역이 되었다. 이후 60년대에 파키스탄 정부가 치타공 산악지역에 수력발전소를 건설하면서, 경작 가능한 땅의 40%가 수몰되고 줌머인10만 명이 인도로 강제 이주되었다.

 

뿐만 아니라 파키스탄 정부는 치타공 산악 지대에 수백 가구의 이슬람인들을 정착시키고,줌머인들을 내쫓기 시작했다. 반세기 동안 줌머인들을 괴롭힌 인종청소의 시작이었다. 파키스탄 정부에 의해 박해 받던 줌머인들은 1971년, 동파키스탄(현재의 방글라데시)의 독립전쟁이 일어나자 벵갈리인들과 함께 전쟁에 참가해 파키스탄에 맞섰다. 그리고 이해 12월, 방글라데시 정부가 들어섰다.


전호후랑(前虎後狼)이라는 말이 있다. 앞문에서 호랑이를 막다보니 뒷문으로 늑대떼가 들어온다는 뜻이다. 방글라데시 군은 줌머족이 파키스탄을 돕는다는 구실로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고, 줌머인들의 땅에 벵갈리 이주민들을 정착시켰다. 줌머인들은 방글라데시 정부에 자치권을 요구했지만 정부는 '인종에 대한 정체성을 버리라'는 대답을 할 뿐이었다. 그러나 정부와 벵갈리족의 줌머족에 대한 인종탄압이 그들의 정체성을 더더욱 강하게 만들고 있었다.

폭력, 살해, 성폭행 등 끈질기게 이어지는 탄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줌머인들은 자신들의 정당 PCJSS(ParParbattya Chattagram Janasamhati Samity: 치타공 산악 지대 사람들의 연대 연합)를 만들고, 무장조직 '샨티 바히니'를 만들어 무장투쟁을 시작했다. 방글라데시 전체인구의 고작 0.7%에 불과한 소수의 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방글라데시 정부와 군대, 벵갈리 정착민들의 탄압은 더욱 거세졌다. 군대는 무장 세력을 색출하겠다며 줌머인들의 집을 수색했고, 민간인들을 잡아다 고문했다. 벵갈리 정착민들은 정착촌을 점점 늘려나가며 방화와 폭행, 집단 성폭행을 일삼았다. 이 싸움은 1997년까지 이어졌고, 그동안 20만 명 이상의 줌머인들이 고향을 떠나야했다.

1997년 12월, PCJSS와 정부 사이에 평화협정이 체결되었고, 샨티 바히니는 총을 내려 놓았다. 줌머인들은 이제 평화협정의 조항들이 이행되고 자치권을 얻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런 시대는 협정을 맺은 지 13년이 된 오늘까지도 오지 않았다. 탄압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고, 그에 맞선 줌머인들의 싸움도 현지에서, 그리고 타지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다. 재한줌머인연대도 그 중 하나.

재한줌머인들은 낯선 땅에서 이주노동자로 살면서, 치타공 산악지대의 현실을 한국인들에게 알리고 방글라데시 정부에 인종탄압 중단을 요구하는 활동을 매일같이 해왔다. 그들이 그동안 가장 많이 썼던 글자는 'STOP RAPE', 'STOP KILLING'등이다. 방글라데시 대사관은 눈 감고도 찾아갈 수 있을 정도다.


 


그런 그들도 1년에 한번, 새해를 맞이하는 보이사비(Boi-Sa-Bi) 때는 고뇌를 내려놓고 축제를 벌여왔다. 보이사비는 Boisuk, Sangrai, Bizu라는 세가지 말을 합친 것으로, 종족마다 이날의 명칭을 다르게 부른 데서 유래했다.

 

이날은누구나 다른 사람의 집에 초대 없이 놀러갈 수 있고, 술과 식사를 대접받을 수 있는 평등과 평화의 날. 그러나 올해는 그나마도 즐길 수 없었다. 보이사비가 한 달도 남지 않은 지난 2월 19일, 방글라데시 군과 벵갈리 정착민들의 무차별 공격으로 인해 많은 줌머인들이 사망하고, 400채 이상의 집이 불태워졌기 때문이다. 이 소식에 놀란 재한줌머인들이 방글라데시 대사관 앞에서 항의 기자회견을 하다가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방글라데시 현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힐 청소년포럼 (Hill youth forum), 힐 학생연합(Hill Studentcounsil)등의 단체들은 이 사건에 항의하며 올해 보이사비를 지내지 않기로 했다. 재한줌머인연대 역시 보이사비 축제를 대신해 지난 11일 '평화난장'을 개최하고, 홍대 일대에서 평화행진을 벌였다. 이날 줌머인들은 평화를 염원하는 글귀들로 채워진 풍선을 손마다 들었다. 조용히 인도를 걷는 이 행렬은 홍대 일대의 행인들에게 많은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들의 손에 든 풍선에 쓰인 글귀들을, 그 의미를 알아챈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1997 평화협정 이후의 줌머인 탄압 사례>

1999년 4월 22일: 경찰이 자치를 요구하는 <연합민족민주전선(UPDF)>의 모임에 최루탄을 무차별 발포,2명의 줌머인들이 현장에서 사망, 150명이 중상. 많은 사람들이 체포돼 수감되었다.(카그라차리(Khagrachari) 학살)

1999년 10월 16일: 방글라데시 군대와 정착민들에 의해 대규모 약탈과 방화가 발생. 사망자의 숫자는 많지 않았으나수백명이 부상당하고 가옥과 상점이 약탈당한 후 불탔으며, 미성년자들을 포함한 여성들이 성폭행을 당했다.(바부차라(Babuchara) 시장 학살)

2001년 6월 25일: 방글라데시 군대와 정착민들의 공격으로 6명이 사망하고 수백명이 부상.(람가르(Ramgarh) 학살)

2003년 4월 19일: 방글라데시 군대와 정착민들이 줌머족의 마을을 공격해 9채의 가옥을 방화.(부이오차라(Bhuiochara) 방화)

2010년 2월 19일: 벵갈리 정착민 및 방글라데시 군대에 의해 줌머인 8명 사망, 25명 부상. 400채 이상의 줌머족 가옥이 방화로 파괴.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프로메테우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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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줌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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