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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이상 길이 보이지 않았지만 산 아래에는 극적인 경관이 펼쳐지고 있었다.
 더이상 길이 보이지 않았지만 산 아래에는 극적인 경관이 펼쳐지고 있었다.
ⓒ 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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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에게 세상은 온통 모험의 장소이자 깨달음의 천국이다. 그들은 그 모든 것들을 길에서 찾는다.

길을 걷는다. 끝없이 뻗어 있는 길을 걸으며 무수한 만남을 갖게 된다. 나무 밑에 우수수 떨어진 솔방울들이 여행자의 외로움을 달랜다. 높은 산 위에 홀로 핀 작은 들꽃들은 피곤함을 금세 기쁨으로 탈바꿈시키는 마법을 가지고 있다.

하염없이 길을 걷는다. 그리고 나타나는 커다란 덩치의 바위와 산들, 그리고 산꼭대기에 버티고 있는 에르미타. 인생이라는 길은 실로 많은 이야기들을 가슴에 새겨준다.

너무나도 작은 인간과 너무나도 큰 자연.
 너무나도 작은 인간과 너무나도 큰 자연.
ⓒ 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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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바스티안의 이야기] 숲지기가 왜 내게 거짓말을 했을까

"사진 작업을 위해 말리에 갔었을 때였어. 자전거로 말리를 횡단하고 또 길이 안 보일 때는 돛단배로 강을 건넜지. 한번은 니아풍케(Niafunke)의 숲지기와 이야기를 했어. 그와 사라페레(Sarafere)에서 만날 약속을 했지. 사라페레로 가기 위해서는 니제르 강을 건너 티앙가라(Tiangara) 벌판을 지나야 했어. 그때 나는 이미 몸과 마음이 매우 지친 상태였지. 말리에서의 사진 작업을 접고 벨기에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어.

그때 그 숲지기가 내게 말했어. 이제 와서 포기하는 건 너무 어리석다고, 그리고 내 앞에 놓인 길은 그리 험하지 않을 거라며 내게 용기를 주었어. 나는 그의 말을 믿고 니제르 강을 지나 티앙가라 벌판에 도착했어. 험하지 않을 거라는 그의 말은 모두 거짓이었어. 도저히 자전거로는 건널 수 없었던 진흙밭이었지. 자전거 바퀴는 진흙투성이가 되어 더 이상 전진조차 하지 못했어. 이내 바퀴는 망가질 때로 망가지고 나는 그 벌판에서 다섯 시간 동안을 고군분투해야만 했지. 그리고 한 마을에 도착했어. 자전거 바퀴는 온통 구멍이 펑펑 나 있었어. 정확히 53개의 구멍….

나는 용기를 잃지 않을 수가 없었어. 마을 어귀에서 한 남자아이를 만났어. 나는 그에게 마을로 인도해달라고 부탁했지. 겁을 먹은 듯 처음 그 아이는 마을과는 뚝 떨어진 마구간 같은 곳으로 안내했어. 아이는 처음 보는 백인을 마을로 인도하기가 겁이 났던 모양이야. 하지만 나는 끝까지 그를 따라갔어. 몹시 배고프고 지쳐 있었지만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거든. 마을 사람들은 의외로 나를 매우 따뜻하게 맞아 주었지. 그리고 그들이 먹는 음식을 내게 대접해 주었어. 쌀과 냄새 나는 생선, 자갈 범벅인 죽, 내 생애에 맛본 최대로 역겨운 식사였어.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지.

이후 마을 사람들은 내게 한 바가지의 우유를 건네주었어. 그런데 그 우유는 어찌나 맛있었던지, 그 맛은 도저히 잊을 수 없을 거야. 나는 그들에게 내 지갑 속에 있던 사진을 보여주었어. 그들은 이전에 사진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어. 온 동네 사람들이 내 사진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지. 곧 지친 마음에 평온함이 찾아왔어. 그리고 나는 다음 날 아침 여정을 계속 이어갈 수 있었어.

사라페레에 도착했을 때 그 숲지기를 다시 만났어. 나는 그에게 따졌지, 왜 길이 험하지 않을 거라는 거짓말을 했냐고 묻자, 그가 내게 대답했어. '만약 내가 너에게 길이 험하다고 진실을 말해 주었더라면 너는 그곳을 횡단하지 않고 너의 길을 포기했을 거야. 그러나 지금의 너를 봐, 힘들었지만 건넜으니 좋지 않아?' 이후 나는 그의 말이 사실이었음을 깨달았지."

이곳에 머물렀던 수도자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밀리언 스타 호텔의 아침.
 밀리언 스타 호텔의 아침.
ⓒ 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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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높은 산꼭대기에 에르미타 익스프레스를 정차시키고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다음 날, 따스한 아침 햇살에 눈을 떴다. 구름은 산봉우리들에 모두 걸려 있었다. 승합차 안의 이불과 수건들을 햇빛에 말리며 우리는 나른한 아침을 보냈다.

바위산을 비추는 햇살.
 바위산을 비추는 햇살.
ⓒ 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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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여정은 산 살바도르 델 코르브(Sant Salvador del Corb) 에르미타. 거대한 바위산, 여차하면 미끄러질 것 같은 절벽도 건너야 했다. 아찔한 순간들의 연속이었지만 눈앞에 보이는 산들과 그 산을 비추는 햇살이 가슴을 벅차게 했다.

산을 향해 오르는 끝없는 여정.
 산을 향해 오르는 끝없는 여정.
ⓒ 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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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올랐을까? 드라마틱한 산들이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산길은 계속 다른 산길로 이어지고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산의 정상은 까마득히 보이지 않았다. 자갈 언덕을 오르며 미끄러지고 아슬아슬한 고개의 연속을 되풀이하며 나는 다시 내려올 길을 생각했다. 문득 암담함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산 살바도르 델 코르브.
 산 살바도르 델 코르브.
ⓒ 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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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살바도르 델 코르브.
 산 살바도르 델 코르브.
ⓒ 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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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우리를 연속해서 오르자 마침내 절벽에 홀로 놓인 에르미타의 반쯤 무너진 형체가 드러났다. 두 평 남짓한 좁은 에르미타는 좁은 봉우리 꼭대기를 모두 차지하고 있었다. 진입로 또한 좁은 절벽과 마주하고 있었다.

이곳에 머물렀던 수도자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이런 위험한 곳에서 몸을 사려가며 수도의 길을 행했을 그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들도 이 미끄러질 듯한 자갈 절벽에 아스라이 핀 들꽃을 바라보며 기뻐했을까?

절벽 위 에르미타 옆에 핀 들꽃.
 절벽 위 에르미타 옆에 핀 들꽃.
ⓒ 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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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길과 마주함... 또 어떤 길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 것인가

에르미타 여정은 끝없는 길과의 마주함이다. 끝없이 펼쳐질 것 같은 숲을 지나고 어떤 때는 쓰러진 나무와 돌들로 인해 전진해야 할 길이 보이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나 길고 긴 길을 어떻게 지날지를 한꺼번에 생각할 필요는 없다. 길을 지나치며 이루어지는 수많은 만남을 순간순간 느끼면 그뿐이다.

시냇가의 돌다리를 건너고, 걷고 오르고 넘어지고, 절벽을 타고, 그러다 보면 어느샌가 꿈꾸던 에르미타를 만날 수 있다. 길을 느리게 지나면서 알지 못한다. 얼마나 많은 여정을 그동안 거쳐왔는지를….

매 순간이 늘 그렇다. 별다른 변화도 특별함도 없을 것 같던 길들이지만 돌아온 길을 뒤돌아보면 정말 많은 에피소드들에 쌓인 지난 순간의 삶이 고스란히 쌓여있음을 보게 된다. 우리는 길을 향해, 인생을 향해 전진하고 발견한다고 흔히 생각하지만 어찌 보면 인생이라는 길이 우리를 매 순간 특별한 곳으로 안내해 왔다. 다음은 또 어떤 길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 것인가?

절벽 틈 사이에 자리잡은 공간은 양들을 가두던 곳이었다.
 절벽 틈 사이에 자리잡은 공간은 양들을 가두던 곳이었다.
ⓒ 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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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지은경 기자는 지난 2000~2005년 프랑스 파리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했으며, 최근 경상남도 외도 전시 기획을 마치고 유럽을 여행 중입니다. 현재 스페인에 머물고 있으며, 미술, 건축, 여행 등 유럽 문화와 관련된 기사를 쓸 계획입니다.

사진작가 세바스티안 슈티제가 핀홀 카메라로 찍은 에르미타(ermita) 등 다양한 사진을 만나보시려면 세바스티안의 홈페이지(www.sebastianschutyser.com)를 찾아와 보시기 바랍니다.



태그:#에르미타, #산 살바도르 델 코르브, #에르미타 익스프레스, #세바스티안, #스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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