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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인데 아침 일찍 수리산엘 가자고 전화가 왔다. 일요일인 데다 남편도 외출 중이라서 그냥 집에서 여유를 만끽하고 싶은데 굳이 함께 가기를 재촉한다. 내가 특별히 누군가에게 감동을 줄 만한 사람도 못되고 그렇다고 누군가를 이끌어 줄 만한 소양도 갖추지 못한 줄은 안다. 그런데 누군가가 함께 하기를 원하는 것은 슬며시 기분좋은 일이기도 하다.

 

그 부부는 함께 어울리기를 좋아한다. 좋은 일이면 자신의 일인양 기뻐해주고 슬픈 일이면 마다 않고 찾아와 같이 슬퍼해주고 도닥여주는 정이 많고 꽃을 좋아하는 부부다. 천생연분이라지만 그렇게 닮은꼴의 부부는 아마도 만나기 힘들 것이다. 요즘 들어 움직이는 시간이 줄어들고 있는데 그 부부의 부추김은 몸과 마음을 자꾸 움직이게 해주어서 활력소가 되기도 한다.

 

수리산으로 먼저 갈테니 볼 일 보고 빨리 달려 오라고 한다. 수리산 봄바람을 쐬러 가는 일은 바람을 만나는 일이었다. 올 들어 처음 만나는 바람이다. 부천 예식장에서 평소에 알고 지내던 꽃 동호인을 만났다. 수리산 바람꽃을 만나러 간다고 했다.

 

그 분은 선뜻 함께 하기를 허락하고 예식이 끝나자 먼저 간 부부를 향해서 차를 달렸다. 막상 수리산 바람을 만나러 간다고 작정하고 나니 그 순간부터 설렘이 물밀듯 몰려왔다. 아마도 녀석들을 만난 지 2년만일 거다. 가는 내내 곁에 있는 지인과 대화를 하는 중에도 계속 가슴이 두근두근한다. 참 바보같다.

 

예식장 갔던 정장을 점퍼차림으로 바꿔입고 산을 올랐다. 비가 한 방울씩 내려서 우산을 들고 나섰다. 어느 정도 산을 오르니 산에는 한두 방울 내리는 비 때문에 사람들이 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만나기로 했던 부부는 보이지 않는데 동행한 지인이

 

"여기, 녀석이 있네. 멋진 녀석이로구만."

"뭔데요?"

"꿩의 바람."

"와. 넘 이쁘다. 이 추위를 비집고 이렇게 꽃을 피우기 시작하네"

 

바위 틈바구니에서 아주 작은 얼굴을 삐죽이 내민 몇 송이가 있는데 녀석이 얼굴을 펴지 못하고 웅크리고 있다.

 

"얘는 활짝 웃는 얼굴을 볼 수가 없단 말야. 대체 왜 울쌍이지?"

"꿩의 바람은 이렇게 흐린 날은 절대 얼굴을 안 보이는 녀석이야, 해가 나야 제 얼굴을 활짝 열거든."

"그렇구나, 아쉽지만 이리 쉽게 만나니 나야 반갑지 뭐."

 

사진은 몇 컷 찍지도 못했는데 비가 후두둑 거리기 시작한다. 그 때 산 위쪽에서

 

"여기. 여기요. 어서 와요."

 

위쪽을 올려다보니 부부와 나와 갑장인 친구 한 명이 더 자리를 잡고 사진을 찍고 있다.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하는데 후두둑대는 비에 우산을 받고 선 동행한 지인은 다시 한 쪽을 가리킨다.

 

변산바람꽃이다. 아마도 바람꽃 중에 제일 화려하고 품위있는 꽃이란 생각이든다. 변산바람꽃 한 송이가 뿌옇게 가린 나의 시야를 환하게 밝혀주는 듯하다. 선명한 다섯 장 타원형의 활짝 핀 꽃잎 위에 뿌린 몇 방울의 빗방울이 더욱 꽃을 아름답게 한다. 꽃과 한참 눈맞춤을 하고 있는데 큰 소리가 났다. 주변의 꽃사진 찍는 사람들에게 하는 소리다.

 

"어서 어서 와요. 여기 또 있는데 녀석들의 아지트군."

"아. 너무 작은 꽃. 얘들은 뭐라 했더라,"

"노루귀야, 여기가 노루귀 밭이었는데 손이 너무 탔나봐. 예전 같지 않아."

"야. 정말 너무 예뻐서 녀석들하고 한참 눈맞춤해야 할 것 같은데 대체 빗방울이 왜 이리 굵어지지?"

 

노루귀는 내가 꽃사진을 찍기 시작한 첫 꽃인데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댄다. 그 해 3월 초쯤이었다. 아침 나절 눈이 희끗희끗 내리는데 전화가 왔다.

 

"언니. 수암산 노루귀 보러가자."

 

나는 그때 노루귀가 뭔 꽃인 줄도 모르던 때다. '이 추운 계절에 노루귀라는 꽃이 얼마나 멋지고 좋길래 저리 노루귀. 노루귀. 할까' 생각하고 함께 나섰던 수암산 노루귀는 지금도 만나지 못하는 설중 노루귀였다.

 

설중 노루귀는 나의 꽃사진 여행의 시작이었다. 아마도 작년엔 내가 노루귀를 못 만났던 거 같다. 그래서 오랜만에 다시 노루귀를 만나니 예전의 그 느낌이 마음 가득 차올랐고 그때 함께 했던 그녀. 그리운 그녀가 문득 떠올랐다.
 
작고 당찬, 그녀를 만나면서 작지만 한없이 큰 사람을 만난다는 느낌을 가지게 했던 후배였다. 그래서 지금도 이렇게 노루귀를 만나면서 애잔한 기쁨 중에도 거침없는 그녀의 모습이 먼저 가슴에 온다.

 

카메라를 꽃에 대고 요리조리 인사를 하는데 빗방울은 굵어지고 동행한 지인은 먼저 온 부부와 인사를 나누는 동안 나는 모자를 써서 비를 막으며 빗방울 맺힌 노루귀와 눈맞춤을 하였다.   

 

봄꽃은 참 신통한 녀석들이다. 지금 산중 어디를 둘러봐도 기척이 없다. 누런 가랑잎과 차디찬 바위들만 여기저기 널려있는 아직은 겨울산이다. 나뭇가지들은 앙상하게 하늘을 찌를듯이 서 있고 어디에도 생명의 기운이 없는 3월의 산이다.

 

그런데 새끼 손톱보다 작은 얼굴을 세상에 내밀고 꽃샘추위를 견디고 이 을씨년스런 산에 불을 붙이고 있는 것이다. 작아도 화끈한 녀석들인 것이다.

 

노루귀는 꽃대와 받침대쪽 전체에 솜털이 잔잔하게 깔려있다. 꽃이 덜 피었거나 활짝 피었을 때 노루귀 꽃받침을 보면 천생 노루의 귀 모양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노루귀에 대한 나의 견해다. 그 꽃받침이 먼저 열렸을 때 모양은 더욱 그렇다.

 

노루귀를 한참 찍다가 비 때문에 일어서려는데 부부 중의 한 분이 내려오면서 우산을 받쳐준다.

 

"이렇게 예까지 왔다가 허술하게 그냥 갈수는 없잖아요. 빗 속의 노루귀도 좋을 거예요. 찍을 수 있을 때까지 맘껏 찍어봐요."

 

하며 노루귀 있는 곳을 알려준다. 가까운 곳에 꽃사진 찍는 다른팀들도 우산을 받쳐 들고 땅바닥에 엎디어서 노루귀를 찍느라고 정신이 없다. 비가 와도 시기를 놓치면 올해 다시 볼 수 없는 꽃이기에 비 때문에 불편함도 이기고 작은 꽃을 찍어대기에 여념이 없다.

 

비가 너무 와서 몇 컷 찍고 일어서려는데 한쪽에서 노루귀 찍던 사람들이 일어선다. 그 자리에 노루귀가 넘 예쁜 포즈로 날 그냥 가게 놔두질 않는다. 우산을 받쳐주는 분에게 미안한 마음이지만 다시 그곳으로 가 자세를 낮추었다.

 

이 봄꽃들은 자세를 낮추지 않으면 절대로 눈맞춤 할 수 없는 꽃들이다. 그동안 우리들은 살면서 너무 고개를 들고 몸을 세우고 살지 않았던가? 이 비를 맞으며 지극히 낮은 자세로 앉아 가만히 눈맞춤하였다. 그들 두 송이가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마주 보는 노루귀 두 송이가 나의 눈맞춤까지 삼각의 모양이 되는 순간이다.

 

오늘 함께 있어서 즐거운 사람들 때문에 겨우내 뿌연 세상만 보던 내 시야가 호강을 했다. 작고 여리지만, 매몰차고 쌀쌀한 꽃샘바람도 아랑곳없이 지그시 추위를 누르고 이 커다란 산을 깨우고 있는 바람꽃들과 노루귀.

 

이제 산의 호흡이 시작되었다. 가랑잎을 젖히고 올라오는 저 봄꽃들과 함께 우린 침체되지 않는, 새로워지는 나날을 위해 다시 한 번 힘을 다해보는 것이다.

 


태그:#수리산, #변산바람꽃, #꿩의바람꽃, #노루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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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시민뉴스에 기사를 20 건 올리고 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오마이 뉴스에도 올리고 싶습니다. 그동안 올렸던 기사는 사진과 함께 했던 아이들의 체험학습이야기와 사는 이야기. 문학란에 올리는 시 등입니다. 이런 것 외에도 올해는 농촌의 사계절 변화하는 이야기를 사진을 통해서 써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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