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솟을대문 신후재 선생의 영정을 모신 사당 앞에 솟을대문
▲ 솟을대문 신후재 선생의 영정을 모신 사당 앞에 솟을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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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후재(1636~1699) 선생은 조선시대의 문신이다. 본관은 평산이며, 호는 여암 또는 규정이라 했고 자는 덕부이다. 조선 현종 1년인 1660년에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강원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그러나 숙종 6년인 1680년에 남인 세력을 정치적으로 대거 축출한 사건인 '경신대출척'에 삭직이 되었다. 그 후 숙종 19년인 1689년에 숙종의 후궁인 소희 희빈 장씨가 낳은 소생을, 원자로 책봉할 것을 반대한 송시열 등이 정권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때 서인들이 물러나고 남인들이 다시 정권을 장악한 사건을 '기사환국'이라 하는데, 신후재도 이때 벼슬길에 나아가 우승지와 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사은사 겸 진주주청부사로 청에 다녀왔으며, 강화와 개성부 유수, 한성부 판윤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 후 숙종 20년인 1604년 폐비 민씨의 복위운동을 둘러싸고 소론에 의해 남인들이 몰락한 갑술옥사에 관련이 되어 여주로 귀향을 갔다가, 풀려난 후에는 음성군 감곡면 오궁리에서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300년이 지났다는 백년서재와 연못

백년서재 장대석 기단을 층계로 쌓고 지은 백년서재. 앞에 조성된 연못에 백련이 피는 것일까? 정면에 차를 대놓아 옆으로 촬영을 했다.
▲ 백년서재 장대석 기단을 층계로 쌓고 지은 백년서재. 앞에 조성된 연못에 백련이 피는 것일까? 정면에 차를 대놓아 옆으로 촬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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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안 백년서재는 300년이 넘었다고 한다. 신후재 선생이 생전에 사용을 했다고 하는 이 서재는 많이 고쳐지은 듯하다.
▲ 서재 안 백년서재는 300년이 넘었다고 한다. 신후재 선생이 생전에 사용을 했다고 하는 이 서재는 많이 고쳐지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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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 300년이 지났다는 연못의 가운데는 섬을 만들었다. 그리고 다리로 연결하여 운치있게 하였다.
▲ 연못 300년이 지났다는 연못의 가운데는 섬을 만들었다. 그리고 다리로 연결하여 운치있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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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후재의 영정을 모신 규정영당을 찾아가는 길은 어렵지가 않다. 그러나 새로 난 입구에 이정표가 서 있지를 않아, 마을의 소로를 몇 바퀴를 돌아 입구에 도착했다. 영당의 입구 좌측에는 '백년서재'라는 신후재 선생이 사용하였다는 서재가 있다. 그리고 그 앞으로는 연못이 있는데, 봄이 되면 연꽃이 피어 아름답다고 한다.

한겨울에 찾아간 연못은 얼음이 얼어있다. 연못 안에는 작은 섬을 만들고, 다리를 놓아 운치 있게 만들었다. 영당을 올라가면 솟을대문 앞 우측에 있는 집에, 신후재 선생의 9대손이라고 하는 신현풍(남, 80) 옹이 살고 계시다. 마침 이 집에 기거하시는 분에게, 영당에 있는 신후재 선생의 영정을 보겠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신현풍 옹께 말씀을 드리겠노라고 안으로 들어가신다.

잠시 난 짬을 이용해 백년서재를 들러보았다. 지금은 많이 고쳐 옛 모습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고택답사를 하면서 보아온 눈썰미가 있어서인가, 예전의 형태가 대충은 그려진다. 서재는 장대석으로 기단을 계단식으로 쌓아올렸다.

지금은 앞으로 유리문을 달았는데, 아마 이곳이 서재의 툇마루였을 것이다. 서재를 바라보고 좌측으로 문이 나 있다. 안으로 들어가니 ㄱ 자형의 집이다. 부엌을 뺀 전체를 꺾은 툇마루를 놓았다. 부엌 옆으로 두 칸의 방이 마련되어 있고. 대문 곁으로는 마루방을 들인 듯하다.

좌안팔분면의 정장관복 영정

신후재 영정 충북 유형문화재 제154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영정. 앞을 유리로 막아 그림자가 반사되었다.
▲ 신후재 영정 충북 유형문화재 제154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영정. 앞을 유리로 막아 그림자가 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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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판 신후재 선생의 영정을 모셔 놓은 채영영당의 현판
▲ 현판 신후재 선생의 영정을 모셔 놓은 채영영당의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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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정을 보기 위해 솟을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 자로 꾸민 규정영당이 있다. 영당은 밖으로는 아래편을 판자벽으로 둘렀다. 그리고 앞으로는 모두 세 칸으로, 네 짝씩 문을 달았다. 신현풍 옹이 문을 열어주신다. 중앙에 난 문을 열자, 안 쪽 뒤편에는 신후재 선생의 영정이 걸려있고, 앞으로는 제상이 놓여 있다.

충북 유형문화재 제154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선생의 영정은, 관복을 입고 의자에 앉아있는 전신상이다. 신후재 선생의 후손들은 이 영정이 사은사로 청에 갔을 때, 그곳에서 가져 온 것이라고 한다. 그런 점으로 본다면 이 영정은 조선조의 초상화 연구에 소중한 자료로 볼 수 있다. 이 영정이 청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우선 같은 시대의 초상화와 그 화법이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초상화를 그릴 때는 공수를 하는데 비해, 신후재 선생의 초상화는 두 손을 홀에 대고 있다. 그리고 단령 위에 각대를 나타내지 않은 점도 다르다.

답사 길에 느끼는 정이 고마워

판자벽 영당의 건물은 담 아래를 모두 판자벽으로 둘렀다.
▲ 판자벽 영당의 건물은 담 아래를 모두 판자벽으로 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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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호 세 칸으로 된 영당의 앞면은 모두 창호를 내었다
▲ 창호 세 칸으로 된 영당의 앞면은 모두 창호를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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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후재 선생의 영정을 촬영하려고 하니, 앞을 유리로 막아놓아 유리에 솟을대문이 비친다. 이리저리 찍어보아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유리에 반사된 그림자를 보이지 않게 찍을 수 있는 사진기술이 없음이 안타깝다. 그래도 어떻게라도 해보려고 자리를 옮겨 찍고 있는데, 마나님이신 듯한 마디 하신다. 들어가서 차라도 한 잔 하고 가라고 권유를 한다.

문화재 답사를 하다가보면, 아주 가끔은 이런 대접을 받기도 한다. 문화재가 어디 집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들이고 산에 있다 보니 주변에 사람들이 있을 때가 거의 없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것조차 생소하다. 그래도 가끔은 불교문화재를 답사하면서, 절에서 향기 좋은 차를 얻어 마시기도 하지만 말이다.

직접 문을 열어주시고, 설명까지 해주신 신현풍 옹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돌아섰다. 전국에 산재한 수많은 문화재들. 그 하나하나가 다 소중하다. 우리 모두가 그 소중함을 마음 속 깊이 깨달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마 그런 날이 올 때까지는, 이 답사 길이 멈추지 않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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