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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 농다리. 천년 세월을 버티고 있는 아름다운 돌다리다
▲ 농다리 진천 농다리. 천년 세월을 버티고 있는 아름다운 돌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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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고속도로 청주에서 안성쪽으로 오르는 상행선을 가다가 보면, 버스 안에서도 볼 수 있는 다리가 있다. 그 유명한 진천 농다리다.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세금천에 놓여진 이 농다리는 고려 때 축조되었다고 전해지며,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 28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임장군은 누구인가?

1932년도에 발행된 <상산지(常山誌)>에는 '고려초기에 임장군이 축조하였다고 전해진다'고 기록되어 있다. 임장군은 고려 때의 무신으로 농다리를 그의 전성기에 고향마을에 쌓았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은 바로 임연 장군이다. 고려 때의 임연 장군은 고려 말의 무신이다. 임연은 고려 원종 때의 무신으로(? ~ 1270(원종 11년)) 몽고군을 물리친 장수다. 그런데 이 임연 장군은 아버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보이지를 않고, 어머니는 진주 사람 주리의 딸이라고 한다. 아버지가 진주에 머물면서 그를 낳아 진주를 관향으로 삼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런 점으로 보면 농다리의 역사가 고려 초기가 아니라는 설명이 된다. 그 역사 또한 750년 정도에 머무른다. 상산지에 임 장군은 과연 누구였을까? 고때 때의 무신인 임 장군이 전성기에 고향마을에 축조했다는 이 농다리는 언제 세워진 것인지 궁금하다. 임연 장군이 전성기라고 하면, 김준과 함께 최의를 죽인 공로로 위사공신의 칭호를 받았을 때일 것이다. 당시는 고종 45년인 1258년이니 750년 전이다.

1932년도에 발행된『상산지(常山誌)』에는 '고려초기에 임장군이 축조하였다고 전해진다'고 기록되어 있다.
▲ 농다리 1932년도에 발행된『상산지(常山誌)』에는 '고려초기에 임장군이 축조하였다고 전해진다'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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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고려 초기의 임 장군과 고려 말의 무신인 임연이 동일인물 인가가 정확지가 않다. 시기적으로 많은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고려 초기에 축조한 다리라고 하면 천년 세월을 버티고 있다는 것이고, 고려 말기의 무장 임연 장군이 쌓았다고 하면 750년이 지났으니, 결국 그 차이가 300년 정도다. 정확한 기록이 없어 자세히는 알 수가 없지만, 진천 농다리를 축조한 '임장군'은, 고려 말의 무장인 임연 장군과는 별개의 인물은 아닐까?      

농다리의 실제 길이는 108m?

농다리는 원래 28수(宿)를 응용하여 28칸으로 만들었다고 하였다. 그 중 세칸이 유실되고, 지금은 25칸만이 남아 있으며, 길이는 93.6m에 이르고 있다. 교각의 폭은 4m 내지 6m 정도로 일정한 모양을 갖추지 않고 있다. 이 농다리의 처음 길이는 과연 얼마나 되었을까? 남들이 생각하면 정말 할일 없는 사람이라고 핀잔을 줄 수도 있지만, 괜한 호기심이 발동이 되어 추론을 해본다.

현재 남아있는 93.6m를 남은 25칸으로 나누면 3.75m 정도가 된다. 이것을 원래 28수로 곱하면 약 105m 정도라는 계산이 나온다. 그런데 이 농다리의 교각의 폭이 일정치가 않고 4m에서 6m 정도였다면, 혹 이 농다리의 원래 길이는 108m 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다. 고려 때는 불교가 성행하였다. 이런 점을 생각한다면 원래 농다리의 길이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농다리는 원래 28수를 응용하여 28칸으로 만들었다고 전한다.
▲ 농다리 농다리는 원래 28수를 응용하여 28칸으로 만들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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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한 준비로 축조된 농다리

농다리는 똑 바로 축조가 되지 않았다. 마치 지네발처럼 구불구불하다. 이런 농다리는 사력암질의 붉은 색 돌을 물고기 비늘처럼 쌓아 올려 교각을 만들었다. 상판석을 얹은 방법도 특이하다. 상판석을 중앙에만 쌓아, 좌우로 날개를 단 듯 축조된 돌로 쌓은 기둥의 힘을 배분했다. 교각의 축조방법은 돌의 뿌리가 서로 물려지도록 쌓았으며, 속을 흙 등으로 채우지 않고, 돌만으로 건쌓기 방식으로 쌓았다.

여름철 장마가 들면 농다리가 보이지를 않는다. 물 속에 잠기게 되어있다. 그러나 장마가 끝난 뒤에 보면, 또 다시 물 밖으로 나와있는 농다리를 볼 수 있다. 그렇게 천년 세월을 보낸 것이다. 이 농다리를 돌만으로 축조한 것도 알고보면 이유가 있다. 그 쌓아 올린 교각의 돌틈으로 물이 빠져나가게 한 것이다. 그만큼 흐르는 물로 인해 받는 저항을 약화시켰다.

농다리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정말 놀랍다. 어떻게 천년이 넘는 세월을 버티고 있었는지 궁금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이해가 간다.

과학적으로 축조가 되었다고 생각이 드는 돌다리.
▲ 돌출부 과학적으로 축조가 되었다고 생각이 드는 돌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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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다리의 앞을 보면 넓게 조성이 되었다. 석축의 끝이 좁고 상판을 올린 부분은 넓게 만들었다. 이는 물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물이 교각 안으로 들어오면 빠르게 흐르도록 하였다
▲ 전면 물이 교각 안으로 들어오면 빠르게 흐르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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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각 사이로 흘러 들어온 물살이 갑자기 빨라진다. 마치 뒤에서 무엇이 잡아 끌기라도 하는 듯하다. 이렇게 빠르게 빠져나가는 물살이기 때문에 그만큼 교각에 무리를 주지 않는다.

통로는 좁게 만들어 물이 빠르게 빠져 나가도록 하였다
▲ 통로 통로는 좁게 만들어 물이 빠르게 빠져 나가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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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과 돌 사이로 흘러 들어온 물은 다시 천천히 흐르는 것이 눈에 띈다. 아마 교각 사이를 좁게 한 대신 깊이를 조절한 듯하다. 이렇게 한 것도 유속을 늦추기 위함인 것 같다.

급속히 흐르는 물길. 이렇게 교각 안으로 흘러들어온 물은 빠르게 교각 밖으로 빠져나간다.
▲ 후면 급속히 흐르는 물길. 이렇게 교각 안으로 흘러들어온 물은 빠르게 교각 밖으로 빠져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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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통로를 지나는 물은 갑자기 빠르게 빠져나간다. 교각의 후미를 경사를 지게 만들었다. 전체적으로 이러한 형태를 보이면서, 물이 교각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 시킨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 농다리가 과학적이라는 것은 바로 지네발 모양의 축조방식이다. 교각을 일렬로 쌓지 않고 구불거리게 놓아, 물의 흐름을 적당히 배분하고 있다. 이러한 과학적인 방법으로 축조된 농다리이기에, 천년 세월을 버틴 것이 아닐까? 새삼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8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 농다리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8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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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 농다리에 전설이 재미있다. 임연 장군이 매일 아침 세금천에 나가 세수를 하였다고 한다. 그날도 아침 일찍 세금천을 나갔는데 한 여인이 내를 건너지 못해 슬퍼했다는 것이다. 임연 장군이 이유를 물었더니, 부친 상을 당했는데, 내를 건널 수가 없어 슬퍼했다는 것이다. 임연 장군은 그 여인의 효심에 감동하여, 용마를 타고 돌을 날라 하루 아침에 농다리를 완성시켰다고 한다. 

전설이야 어느 시기에 만들어진 후 보태지기도 하고, 빠지기도 한다. 그것이 어떤 이유로 축조가 되었든지, 또는 그 다리를 놓은 것이 언제인지도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들의 역사를 보면 그 축조물이 갖고있는 내면의 사고가 있다. 그것이 효심에서 비롯했고 나라에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농다리의 교각이 무너지고 다리가 운다는 것은 결국 농다리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이다. 자연을 거스리지 않는 농다리. 그것은 작금의 우리에게 자연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기 위한, 선조들의 마음이었다는 생각이다.


태그:#농다리, #진천, #유형문화재, #고려, #임연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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