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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런던을 속삭여 줄게>
 책 <런던을 속삭여 줄게>
ⓒ 푸른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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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부터 '이게 여행기야, 이야기책이야?' 헷갈리는 책을 쓰고 싶었다. 런던을 첫 도시로 택한 것은 <해리포터>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삭막한 지하철을 마법의 세계로 통하는 환상적인 공간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도시들도 환상적인 이야기로 빠지는 비밀의 통로를 모두 하나씩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에는 호그와트 최고의 모범생, 도서관의 수재 헤르미온느 버전으로 써봤다."

무수히 많은 런던 여행기가 쏟아져 나오지만 정혜윤 PD의 <런던을 속삭여 줄게>(푸른숲 펴냄)처럼 독특한 여행 이야기도 없을 것 같다. 런던의 명소들을 찾아서 그곳의 사진을 찍고 간단한 여행 정보를 덧붙인 식상한 책 질린 사람이라면, 이 책을 통해 새로운 런던을 접하면 좋을 듯하다.

저자가 서문에 덧붙인 이야기처럼 이 책은 이야기책인지 여행서적인지 헷갈리는 독특한 구성을 택하고 있다. 런던에서 유명하다는 곳을 찾아가 그 곳과 관련된 온갖 잡다한 지식을 풍부하게 늘어놓는 게 이 책의 특징이다.

자연사박물관에서 만난 다윈

예를 들면 이렇다. 세인트 폴 대성당을 찾아가서는 옥스퍼드 출신의 건축가 크리스토퍼 랜의 이야기를 늘어놓고, 이 성당이 완성된 1710년의 어느 날 풍경을 떠올린다. 시티의 상인들과 중산층의 부가 금세공업자 출신인 은행원들에게 맡겨지면서 잉글랜드 은행이 시작되던 시점 말이다.

대영박물관에서 떠올리는 온갖 다양한 나라의 이야기들은 저자의 해박한 지식을 느끼게 한다. 왕, 신하, 부유한 사람, 서민, 심지어는 황소에게까지 미라가 있는 나라, 고대 이집트. 고대 이집트의 사람들은 죽음을 눈앞에 둔 순간에도 자신을 쾌락에 내맡길 수 있는 힘을 갖도록 평소 잔칫상 위에 관을 올려놓는 관습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대단히 열광했다. 찰나를 즐기자는 생각을 밥상머리에서도 그만큼 철저하게 실천한 민족이 또 있었을까? 찰나를 즐기는 동시에 영원한 삶에 그렇게 집착한 민족이 또 있었을까? 다시 지상에 돌아오길 그렇게 열렬히 꿈꾼 민족이 또 있었을까?"

저자의 넘치는 상상력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자연사 박물관에서 채집품을 보면서 그녀는 다윈이 처음 진화론을 발견했을 당시의 느낌을 추론해 본다. 다윈의 아내는 천국에 간 다음 두 사람이 다시 만나지 못할까 봐 진화론을 싫어했다고 한다. 그만큼 급진적이었던 그의 생각은 현재 생명 과학 역사의 중심축이 되고 있다.

저자는 이 거대한 우주 안에서 다윈이 진화론을 발표하는 것이 살인을 고백하는 것과 같은 기분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연사 박물관에 얽힌 이야기에는 이외에도 공룡에 관한 것, 화석 이야기 등 무궁무진하다. 화석을 발견했다고 들고 오는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자연사 박물관에는 아예 이런 카드가 마련되어 있다고 한다.

"친애하는 선생님께
선생님께서 검사를 요청하신 표본은 말, 소, 돼지, 양, 염소, 개의 이빨, 뼈입니다. 그 표본은 최근의 것이며 화석이 아닙니다.
- 지질학과장"

책에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힌 여러 명사들을 떠올리는 장면은 마치 역사 교과서 한 페이지를 보는 듯하다. 우리에게 빛은 그냥 빛일 뿐이지만 뉴턴 학파에게 빛은 태양으로부터 6분 30초 만에 오는 것이라는 구절은 과학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듯하다.

죽는 날까지 인간적으로 누구에게도 완전히 이해받지 못했고, 많은 비밀을 갖고 있으며, 살아 있는 누구에게도 입도 뻥긋하지 않은 비밀 원고를 잔뜩 남긴 뉴턴. 그 덕분에 우리는 산업화와 기계화의 혜택 속에 살고 있다.

런던이라는 마법에 빠지다

영국을 대표하는 최대 상징은 무엇일까? 저자는 트라팔가 광장에 서 있는 넬슨 제독의 동상을 보며 영국이야말로 해군의 나라라는 생각을 한다. 세계를 재패했던 영웅 넬슨이지만 그 또한 인간인지라 아름답기는 하나 변덕스러운 여성 해밀턴 부인에게 놀아났다고 한다.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남자이나 그 남자를 지배하는 건 여성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런던에서 공원에 가지 않는다면 런던을 덜 사랑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나는 런던의 공원들을 돌며 밤마다 충만한 기분으로 시집을 읽었다. 물론 런던의 공원도 도시 개발업자나 부동산업자의 치밀한 전략이 있었겠지만, 그러나 런던의 공원은 분명히 좀 더 근원적인 뭔가가 있다. 달콤한데 강렬하다. 가까운데 멀다. 너무나 풍부한데 너무나 겸손하다. 그토록 다양하면서도 모두 다 저마다의 진실성을 갖고 있다."

이 글을 읽으며 나도 런던의 다양한 색깔을 지닌 공원들이 생각났다. 하이드 파크에 뛰어다니는 커다란 사냥개들. 점잖게 차려 입고 산책하시는 할머니들. 낡은 점퍼를 입고 바삐 걸어가는 런더너들이 그리워졌다.

런던을 가 본 사람들은 대부분 이렇게 말한다. 런던이 화려한 도시는 아니지만 아주 매력이 넘치는 도시라고 말이다. 이런 말들에 나도 공감한다. 저자가 경험한 것처럼 런던은  마법에 빠지는 것만 같은 묘한 느낌을 준다.

특히 안개 낀 런던에서 템즈 강을 따라 걸어 보면 이 도시의 숨은 꼬마 마녀들이 금방이라도 마법 빗자루를 타고 지나갈 것만 같다. 그게 바로 런던이 품은 동화적 상상력이 아닐까.


런던을 속삭여줄게 - 언젠가 떠날 너에게

정혜윤 지음, 푸른숲(2009)


태그:#여행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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