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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된 노동에도 불구하고 환하게 웃으며 견디는 이길정씨
 고된 노동에도 불구하고 환하게 웃으며 견디는 이길정씨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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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에 형성된 경기도 과천화훼집하장은 200여 명의 화훼임차상인들이 입주해 2만3천 평 규모의 화훼단지를 운영한다. 화분류 화훼의 경우 전국 유통 물량 60%를 공급할 정도로 전국 화훼 유통의 중심 화훼단지이다.

이길정(62)씨의 직업은 과천화훼집하장의 꽃이라 불리는 상차장이다. 그는 강원 인제에서 제주도까지 전국 각지로 운송되는 화물차에 꽃을 실어주는 용역업체 사장이다. 상상하면 꽃에 둘러싸인 참 아름다운 사업으로 짐작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가을 낙엽이 청소원에겐 고역인 것처럼 그에게 꽃은 조심스레 쌓아야 할 무거운 짐이다.

직원 5명을 데리고 일하는 그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차원이었다. 지난 2004년부터 상차원으로 일을 시작했다가 2007년 3000만 원의 보증금을 맡기고 상차용역을 맡았는데 연간 수입은 3000만 원가량이다. 몸으로 때워 번 수입 정도이기에 용역을 차지하려고 달려드는 경쟁업체가 별로 없다.

지난 9월 중순 과천화훼단지에서 만난 이 시장은 매우 분주했다. 울산, 광주, 대구, 전주 등지로 보낼 화훼들을 실어야했다. 울산에 보낼 4.5톤 탑차에는 귤나무, 국화, 사피니아 등 10개 종류의 화분 1300만 원 어치를 실어야 하는데 시간 짐이기 때문에 신속해야 한다. 그렇다고 빠르게 싣는 것이 대수는 아니다. 단단한 화분을 밑에 쌓고 그 다음 화분과 화분 사이로 차곡차곡 안전하게 쌓아야 한다. 짐을 잘못 쌓아서 화훼가 손상되면 변상해야 한다. 지난 6년 동안 그런 사고가 한 번 없을 정도로 그의 솜씨는 매우 숙달됐지만 육십 넘은 나이에 감당하기엔 벅찬 노동이다.

"봄철 바쁠 때는 젊은 사람들을 불러서 일 시켜보지만 그 다음 날로 못 나와는 경우가 허다해요. 요령 없이 일하면 그만큼 힘든 일입니다. 가장 바쁜 철은 봄가을인데 특히 봄철이 되면 상차 일이 힘들어서 7~8kg의 몸무게가 빠질 정도입니다. 그런데 왜 이 일을 하냐고요? 아무래도 심간 편하기 때문입니다. 이 나이에 남 밑에서 일한다면 얼마나 비참하겠어요. 누구에게 간섭 받지 않고 일할 수 있으니 할 만 하지요."

오전 내내 상차를 하느라 속옷을 흠뻑 적실 정도로 땀을 흘린 그가 한숨 돌린 것은 점심시간이었다. 주문한 점심상에 둘러앉은 그는 고향 선배를 비롯한 상차 직원 4명에게 막걸리 잔을 채워준 뒤 잔을 들이켠다. 고된 노동이 막걸리 잔으로 달래지면서 땀에 달궈진 얼굴이 꽃처럼 불그스레해진다.

오전 내내 상차 작업을 하느라 땀을 흠뻑 적신 이길정 사장과 직원들이 막걸리를 곁들인 점심식사를 나누며 피로를 풀고 있다.
 오전 내내 상차 작업을 하느라 땀을 흠뻑 적신 이길정 사장과 직원들이 막걸리를 곁들인 점심식사를 나누며 피로를 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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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 넷 대학 가르친 아버지 "내 인생은 실패 투성이"

강원 인제에서 제주도까지 화분류 꽃들을 실어보내는 상차장 이길정씨. 그는 이날도 울산, 대구, 광주, 전주 등으로 보낼 꽃짐을 배차하고 용차를 수배하는 등 화주들을 돕느라 바빴다.
 강원 인제에서 제주도까지 화분류 꽃들을 실어보내는 상차장 이길정씨. 그는 이날도 울산, 대구, 광주, 전주 등으로 보낼 꽃짐을 배차하고 용차를 수배하는 등 화주들을 돕느라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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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고향은 전남 장흥이다. 1983년부터 장흥기상관측소에서 6년간 근무하다 장흥군교육청 행정직 공무원으로 특채된 그는 지난 1998년에 22년간의 공무원 생활을 청산했다. 명예퇴직의 배경은 자식 넷(2남2여) 모두를 대학 공부를 시키느라 진 채무를 청산하기 위해서였다.

"어느 해인가는 자식 넷 모두가 대학생이더라고요. 학비와 살림으로 빚이 억대에 이르면서 상환금과 이자 독촉에 시달렸는데 하필이면 그때가 IMF 시절이었습니다. 도저히 빚 감당을 할 수 없어서 명예퇴직을 신청했는데 퇴직금으로 빚을 갚고 나니 손에 남은 돈은 1500만 원 정도 밖에 안 되더라고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자식들 모두가 국립대에 진학해서 다행이지 만약에 사립대였으면 뼛골이 더 휘었을 겁니다."

그렇게 키운 자식 넷 모두는 지금 어엿하게 살고 있다. 서울대 농대를 졸업하고 박사 과정까지 마친 막내아들은 유수의 기업체 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으니 여한이 없다. 그런데 보람찬 인생을 보낸 아버지의 얼굴엔 그늘이 서려 있다. 1994년 아내와 별거하면서 그 괴로움을 잊고자 상경한 그는 홀아비로 살고 있다. 그 사연을 다 들을 순 없었다. 다만 회한처럼 "남에게 해를 입은 적은 있어도 해를 끼친 적은 없다"면서 "가정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내 인생은 실패 투성이 인생"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육십 넘은 그가 고되게 일하는 것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는 "이렇게 일하지 않았으면 우울증에 걸렸을지도 모른다"면서 "명예퇴직 한 뒤엔 닥치는 대로 일을 해왔다"고 말했다. 열심히 산 인생이었다. 자식 넷 모두를 대학까지 가르치느라 수중에 남은 게 거의 없었던 홀아비 아닌 홀아비 이길정씨. 아내와 자식 넷 모두와 상관없이 타관객지에서 홀로 살아남아야 했던 그는 닥치는 대로 일했다.

그는 명예퇴직 한 뒤에 정수기 판매원과 택시운전사 생활을 했다. 택시기사로 3년간 일할 때는 사납금 8만 원을 맞추고도 6~7만 원을 손에 쥐었다. 끼니도 휴식도 거른 덕분에 수입은 동료 기사들에 비해 월등히 많았지만 건강이 훼손됐다. 그래서 시작한 게 상차원이었다. 그렇게 뼈 빠지게 일해서 모은 돈과 융자를 끼고 지난 2005년에 서울 노원구 상계동에 17평 아파트를 장만했는데 8천만 원짜리 아파트는 지금 3억 원대로 껑충 뛰었다.

꿈에 그리운 내 고향 '장흥 앞바다'... 과연 돌아갈 수 있을까?

고향 떠나 홀아비 생활을 하고 있는 이길정씨. 그는 꿈을 꾸면 고향 '전남 장흥' 앞바다가 어른거린다고 했다. 안식처도 고향도 아닌 서울을 떠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과연 떠날 수 있을까?
 고향 떠나 홀아비 생활을 하고 있는 이길정씨. 그는 꿈을 꾸면 고향 '전남 장흥' 앞바다가 어른거린다고 했다. 안식처도 고향도 아닌 서울을 떠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과연 떠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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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생활 15년째인 그는 홀아비 표를 내지 않으려고 깔끔하게 차려 입고 다닌다. 물론 외로운 흔적도 티 내지 않으려고 애쓴다. 상차가 없는 일요일이면 교회 성가대원이 된다. 서른아홉의 이른 나이에 장흥의 한 교회에서 장로로 임직된 그는 서울 노원구의 한 작은 교회 협동장로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그는 "신앙생활과 찬양생활 하는 게 유일한 기쁨"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매일 아침 6시 20분에 지하철 7호선 마들역에서 승차한다. 매일 같은 시간 마들역의 같은 승강장에 도착하면 귀여운 20대의 아가씨를 만날 수 있다. 마들역을 출발해 세 번째 정거장인 하계역에 도착하면 40대 부부가 어김없이 승차하고 그들은 언제나 변함없이 눈감고 존다. 다시 중화역에 이르면 날마다 구두가 바뀌는 50대 남성이 승차한다.

6년째 한결 같은 출근 풍경이다. 매일 만나는 그들이 보이지 않을 때도 있는데 그러면 궁금하고 걱정스럽기까지 하다. 집안에 무슨 일이 있어난 걸까? 이 정도 안면을 텄으면 인사라도 나눴으면 좋으련만…. 마들역에서 군자역까지 스무 정거장을 지나는 동안 지하철에선 어떤 말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먼저 인사를 청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게 하면 팔푼이 취급을 당할까봐 안면 몰수한다. 도시인의 삶에 적응한 것이다.

그는 이 도시를 떠나고 싶다. 가정도, 자식도, 일도 지치게 할 뿐이니 이젠 쉬고 싶다. 잠들면 어린 시절의 고향 앞바다가 어른거린다. 그래서 고향 장흥에 텃밭 딸린 집을 사놨다. 사논 아파트 값이 몇 배 뛸지라도 그 곳은 뼈를 묻을 고향도 안식처도 아니다. 고향집이 그리운 그의 꿈은 소박하고 애틋하다. 고향 앞바다에 삼마이 그물 세 통 쳐놓고 아침 물때가 되면 건져서 먹을 만큼 먹고 남은 것은 이웃과 나누고 그래도 남으면 시장에 내다 팔면서 살고 싶다.

서울을 떠나고 싶다. 떠날 채비도 했다. 그런데 떠날 수 있을까? 고향 떠난 대다수의 도시인들이 타관객지의 외로움에도 불구하고 끝내 불귀(不歸)의 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과연 그는 오매불망의 고향 앞바다로 돌아갈 수 있을까?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전라도닷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과천화훼집하장, #상차장, #귀향, #장흥, #앞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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