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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스>의 한 장면.
 <아이리스>의 한 장면.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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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거 요즘 인기 많잖아. 어때? 재밌어? 볼 만해?"
 "재밌긴 한데, 좀… 어설퍼. 이야기가 부실하달까."

지하철 안에서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 둘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 바로 옆에 앉아있던 탓에 목소리가 꽤 가깝게 들렸다. 그들이 화제로 삼았던 것은 다름 아닌, 최근 30%의 시청률을 넘기면서 인기 절정을 달리고 있는 KBS2 수목드라마 <아이리스>였다.

제작비만 200억원이 들어간 <아이리스>는 확실히 그 규모면에선 여타의 대작들을 압도한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의 총격전과 차량 추격신. 뵨사마 이병헌은 일본 아키타까지 날아가 밧줄 하나에 몸을 의지한 채 댐의 밑으로 뛰어내린다. 그리고 지난 일요일(11월 29일)에는 서울 광화문 광장 한복판에서 도로를 12시간동안 막고 총을 난사하고 차량을 폭파시키기까지. 그야말로 블록버스터란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 위엄을 내내 보여줬다.

그런데 화려한 외관과는 달리 내실은 부실하기 그지없었으니, 부실 공사한 아파트 벽면의 시멘트가 쩍쩍 갈라지고 조각 채 떨어지듯 드라마는 진행될수록 빈틈을 곳곳에서 드러낸다.

우선 멜로라인. 승희(김태희 분)가 현준(이병헌 분)에게 기습키스 당하고 그의 뺨을 후려쳤던 게 현준이 NSS에 입사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그 전까지 승희와 현준의 접점은 그저 NSS에 들어올 예비요원으로서 그의 자격검증을 위해 두세 번 만나 프로파일링했던 것이 전부.

이병헌의 매력 탓? 개연성 부족한 멜로라인

<아이리스>의 한 장면.
 <아이리스>의 한 장면.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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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희롱에 해당하는 기습키스를 당하고 집에 돌아온 승희는 화장대에 앉아 느닷없이 그의 키스를 떠올리며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짓고,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 회의실 테이블 밑을 통해 야시시한 발장난을 칠 정도의 사이로 발전한다. 그리고 본격적인 일본 아키타 화보 촬영을 위해 밀월여행을 떠나서는 눈밭에서 두세 번 뒹굴고 마우스 투 마우스로 사탕 하나 받아 넘긴 뒤로는 도무지 정신을 못 차린다.

게다가, 현준이 죽었다고 안 이후의 그녀의 행동은 쉽게 납득하기 힘든 것이었다. 명색이 국가정보기관에서 팀장씩이나 한다는 사람이 자기 연인이 죽었다고 공사 구분 못하고 규정, 절차 다 깡그리 무시한 채 온갖 편법 다 동원해서 죽은 연인 찾기에 혈안이 된다는 설정 자체가, 어딘지 모르게 어설퍼 보였던 건 왜일까?

선화(김소연 분)의 경우에는 더 처참하다. 지금까지 살아온 생의 반평생을 살인기계가 되기 위해 일체의 감정을 억누르고 없애며 살아왔던 그녀다. 현준을 죽이기 위해 장총까지 하나 메고 일본 아키타의 눈 덮인 산꼭대기까지 쫓아온 집념의 그녀가, 불과 10여분 사이에 일순간 돌변하여 그를 너무나도 애절하게 바라보는 지극히 순종적인 여인이 되고 만다.

조국인 북한과 상관인 철영(김승우 분)을 배신하는 건 그럴 수 있다 치자. 힘겨운 그녀의 삶을 지탱해주던 가족이란 끈이 떨어졌으니 그 정도는 이해 못 할 일도 아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배신과 동시에 현준에게 빠져버린 걸까? 그가 그녀를 죽일 기회가 있었음에도 몇 번이나 살려줘서? 자기 방에 데려다 눕히고 따끈한 죽 한 그릇을 면전에 가져다 놔서?

현준의 거침없는 행보도 설명이 부족하긴 마찬가지다. 부다페스트에선 죽기 살기로 쫓아왔던 철영은 그가 국정원 요원 한 명 죽였다고 곧바로 북한의 핵 테러 팀에 넣어준다. 오랫동안 아이리스와 싸우면서 반(反) 아이리스 세력을 규합한 정훈(김갑수 분)은 현준이 그를 필요로 할 때, 한국에 들어와 있었다. 정훈의 안내를 따라가다 보니 청와대 비서실장을 만났고 같이 헬리콥터를 타고 날아갔더니, 이젠 대통령까지 만났다.

왜 그러는 건지 설명을 부탁해요,현준씨

<아이리스>의 한 장면.
 <아이리스>의 한 장면.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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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이 아니었으나 간첩 혐의가 씌워졌었고, 오기가 나서 진짜 간첩이 되어버렸던 현준은 순식간에 대한민국의 국운을 양 어깨에 짊어진 영웅이 된다. 대통령이 그의 소식만 기다리고 있고, 선화는 여전히 충실하게 그를 보좌하고 승희는 변함없이 그를 찾아 헤맨다. 이제 남은 일은 서울 시내 어느 곳에서 터질지 모르는 핵폭탄을 찾는 일. 그러나 걱정할 것 없다. 지금까지 대로라면 현준은 곧 핵폭탄을 찾아 제거할 수 있을 테니까.

여기서도 그가 왜 핵 테러를 막아야 하는지에 대한 당위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극의 초반 승희에게 조국에 대한 충성심 때문이 아니라 일이 재미있다고 생각했기에 NSS에 입사했다고 말했던 현준. 조국에 대한 충성심이나 애국심, 사명감 같은 게 없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백산에게 배신당했다는 걸 알자마자 그에게 복수하기 위해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철영과 접촉해 북한에 도움을 요청한다.

그런데 그런 그가 북한 테러 팀의 진짜 목적이 핵 테러라는 것을 깨닫자 이젠 핵 테러를 막기 위해 돌아선다. 철영에게는 북남전쟁을 막기 위해서라는 당위가 있지만, 현준에겐 그것마저도 부족하다. 현준이 숨 가쁘게 뛰어다니는 이유가 핵 테러를 통해 남북정상회담을 방해하고 남한과 북한의 정권교체를 꿈꾸는 아이리스의 야욕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라면, 그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설명이 있어야만 했다.

로버트 러들럼 원작, 맷 데이먼 주연의 세계적인 첩보액션 시리즈 <본 아이덴티티> 3부작에 우리들이 열광했던 이유는 본 시리즈가 지극히 사실적이고 디테일한 묘사를 했다는 데에 있다. 세계 정복을 꿈꾸는 대악당도, 핵폭탄과 슈퍼카도, 8등신의 금발의 미녀도 등장하지 않지만 거기엔 그 어느 첩보액션 영화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긴박함과 스릴, 쾌감이 모두 들어 있었다.

영화에서 제이슨 본(맷 데이번 분)은 CIA에 쫓기는 삶을 산다. 그러나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서도 본은 가공할 신체능력과 재빠른 상황판단에 이은 기지로 아슬아슬하게 그 상황을 모면한다. 그리고 시리즈의 감독인 폴 그린그래스는 그런 순간을 결코 허투루, 얼렁뚱땅 넘기지 않는다. 관객들이 본이 어떤 방법으로 위기를 극복하는지, 그 순간을 보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아이리스>가 본 시리즈로부터 배워야 할 것들

현준은 총알도 피해간다는 첩보액션 드라마의 주인공이다. 그가 어떤 상황에서도 그것을 극복해내고 끝까지 살아남을 거란 건 <아이리스>를 보지 않는 사람이라도 알 수 있다. 중요한 건 과연 현준이 어떻게 그 위기의 순간을 극복해냈느냐다. <아이리스>는 그 과정에 대한 묘사도 지극히 불친절하다. 시청자들은 리모컨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다가도 이내 맥이 탁 풀린다.

김밥은 밥과 단무지, 햄과 여러 채소들을 모두 모아 김으로 말아냈을 때 완성된다. 밥과 각종 반찬들이 갖춰져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김이라는 고리로 모아 말지 않는다면 그것은 김밥이 되지 않는다. 지금 <아이리스>는 말지 않은 김밥과도 같다. 밥 따로 단무지 따로 채소 따로, 다 따로 놀고 김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따로 먹으면 어때? 어차피 뱃속에 들어가면 소화되는 건 다 똑같아"라고 제작진은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먹는 시청자도, 먹으라고 내놓는 제작진도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김밥이 아니라는 것을. 시청자들이 지금 그것을 허겁지겁 먹는 것은 단지 배가 고프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이다.


태그:#아이리스, #이병헌, #김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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