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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세폴리스에서의 작은 애. 공부에는 그다지 흥미를 보이지 않는 작은 애가 오직 욕심을 내는 게 미술상인데 장차 유명한 미술가가 되기를 기대한다.
 페르세폴리스에서의 작은 애. 공부에는 그다지 흥미를 보이지 않는 작은 애가 오직 욕심을 내는 게 미술상인데 장차 유명한 미술가가 되기를 기대한다.
ⓒ 김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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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 그림 대회에서 상을 못 받았으니 이번 대회에서는 꼭 상을 받을 것이다. 지난 번  대회에서는 컴퓨터에서 베낀 ○○에게 은상을 준 건 말도 안 된다. 컴퓨터에서 베낀 그림을 은상으로까지 한 것을 보면 우리 선생님은 컴퓨터를 잘 안 보시는 것 같다. 그래도 이번에는 내가 꼭 상을 탈 것이다.'

학교에서 집에 도착하자마자 작은 애는 금요일까지 불조심 포스터를 그려서 내면 그 중 잘 된 것을 뽑아서 상을 준다면서 이번에는 자신이 꼭 상을 받겠다고 열의를 내비쳤습니다. 그러더니 일기장에까지 이런 글을 남긴 걸 보면서 조금 놀라웠습니다. 왜냐하면 작은 애는 그런 애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과자나 노는 것에 대한 열의는 어디 내놓아도 빠지지 않지만 상을 욕심내거나 공부를 욕심내는, 즉 잘 나가는 애들 축에는 못 끼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상하게 이번 포스터에 대해서는 남다른 열의를 보였습니다.  포스터를 제출하는 그 주 내내 포스터에 대한 얘기만 했습니다.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다면서 걱정하면서 포스터에 들어갈 글귀가 어떤 게 좋겠냐며 나에게도 계속 생각해 보라고 재촉했습니다.  작은 애의 포스터에 대한 적극성은 정말 지금까지 보지 못한 모습이라서 좀 뜻밖이면서 무엇에라도 적극성을 보이는 모습이 결코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다고 끙끙 앓으며 그림에만 몰두해 있더니 마침내 찾아냈다면서 이면지에 자신의 아이디어가 어떤지 한 번 보라면서 대충 그려 보여주는데 그 모습에서는 정말 창작의 고뇌가 보였습니다.

자신의 아이디어에 만족한 작은 애는 정말 평소에 보지 못한 집중력과 인내력을 가지고 그날 저녁 내내 그림을 그렸습니다. 작은 애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시간이 저녁 6시 무렵이었는데 나중에 10시에 하는 드라마를 보기 전까지 한자리에서 그림에만 매달렸습니다. 평소 부산했던 작은 애의 모습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낸 작은 애의 그림은 정말 내가 보기에도 괜찮았습니다. 그래서  이번 대회에서는 상을 받을 것 같다고 칭찬해주었습니다.

작은 애가 그린 불조심 포스터.
 작은 애가 그린 불조심 포스터.
ⓒ 김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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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작은 애의 자랑스러움과 기대가 하루를 넘기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작은 애와 같은 반 애는 미술학원에서 학교에 가져갈 포스터를 그렸는데, 아직 표현이 서툰 그 애를 대신해서 미술학원 선생님이 많이 그려주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애가 그린 것도 있지만 선생님이 그려주고 색칠도 해주면서 윤곽을 드러내는 그림은 작은 애를 매우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물론 작은 애도 지금까지 자신이 그린 그림 중에 최고로 잘 그렸기에 만족감과 뿌듯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지만 미술학원 선생님이 그려준 것에는 비길 수가 없었습니다. 상에 대한 강한 집착을 갖고 있던 작은 애의 불안은 점점 깊어져만 갔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없이 선생님이 보는 일기장에 이렇게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와 같은 미술학원에 다니는 애는 그림을 선생님이 그려주었습니다. 그런데 난 내가 집에서 그렸습니다.'

같은 미술학원에 다니는 애라고만 표현해도 선생님께서 누군지 짐작할 거라고 생각하고는 안심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결전의 날이 왔습니다. 이름은 정확하게 밝히지 않았지만 선생님한테 친구의 비리를 고발했겠다, 자신의 그림은 지금까지 그린 그림 중 최고로 잘 그렸겠다, 상을 받을 확률이 자신에게 있다고 확신한 작은 애는 걸작을 들고 학교 가는 날 마치 국보급 보물을 들고 가는 사람처럼 조심스럽고 설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일주일간 모든 에너지를 집중해서 만든 작품이니 애지중지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결과는 미술선생님이 그려준 작은 애 반 친구의 작품이 상을 받게 됐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작은 애의 일기를 읽으셨는지 그 친구를 따로 불러내서 물었다고 합니다. 이 그림을 네가 그린 게 맞니, 하고요. 물론 그 애는 선생님이 그려준 부분도 있지만 자신도 나름대로 열심히 그렸기 때문에 자기가 그렸다고 대답했고, 상은 당연 그 애에게로 돌아갔습니다.

대입에 떨어진 사람보다도 처참하게, 직장을 잃은 사람보다도 더 낙담해서 힘이 하나도 없는 모습으로 패잔병이 돼서 작은 애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이날 이렇게 다시 선생님한테 일기를 썼습니다. 이 날은 분노에 찼는지 이름까지 밝혀서 고발했습니다.

'나는 집에서 무려 4일간 고생하면서 그렸지만 ○○는 미술학원 선생님이  10분의 9를 그려주고, 10분의 1을 자신이 그려 낸 것은 심하다. 그래서 정의를 바로 세우려고 이 일기를 쓴다. ○○가 상을 받으면 ○○는 물론 선생님도 편치 못할 것이다. 편치 못한 것은 걔가 매일 그러다가 큰 대회에 나가면 그림을 못 그려 상을 못 타면 망신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가 자신이 열심히 그려서 내면 좋겠다. 지난번에 ○○가 그림을 베껴서 상을 탄 것은 봐줄만 했지만 미술 학원 선생님이 그린 것으로 상을 탄 것은 정말 참을 수가 없다. ○○야, 앞으로는 더 연습해서 네가 그려!'

이런 식으로 미술 상을 고발한 작은 애를 난 이렇게 위로했습니다.

"열심히 그린 것에 만족해야 해. 남이 그려줘서 상을 받았지만 그건 떳떳하지 않기 때문에 크게 자랑할 것도 못 돼, 차라리 상은 못 받았지만 자신이 최선을 다해서 그렸으면 그게 더 훌륭한 거야."

낙심에 빠지고, '미술 상 비리'와 관련해서 분노에 찬 작은 애를 위로하기에 역부족인 줄 알았는데 작은 애는 특유의 낙천성으로 이 말에서 많은 위로를 얻었는지 금방 마음이 좋아졌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던 분노에서 해방됐는지 친구 이름까지 거론하면서 썼던 고발 일기장은 선생님한테 제출하지 않겠다고 하더군요.


태그:#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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