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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가방 하나 메고 무작정 출발

남편의 갑작스런 여행 결정으로 혼자 애를 봐야하는 아내에게 미안해, 아침부터 소고기국을 끓이고 밑반찬을 몇 개 만들어 놓는다. 어제 챙겨놓은 짐에 빠진 것은 없는지 살피고, 충전해 놓은 각종 장비들을 챙긴다. 버스시간이 빠듯함을 느끼며 허겁지겁 집을 나선다.

안양은 고속버스 터미널이 없다. 역앞에 버스들이 서있는 간이 터미널이다. 광주행 고속버스, 평일이라 그런지 손님은 10명도 안된다. 한산하고 작은 터미널을 거쳐, 거의 텅비어 있는 고속버스에 올라서야 여행이 실감이 난다.

사람들과 여기저기 많이 다녔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니 혼자서 며칠씩 떠나는 여행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서 이번 여행은 '서른셋, 첫번째 단독여행'이라고 명명하기로 한다.

워낙 갑작스레 결정된 휴가 그리고 여행이라 여행준비가 부실하다. 5일짜리 여행 중 계획되어 있는 것은 죽녹원과 메타세쿼이아길, 관방제림을 둘러보는 담양 1박2일, 첫날(9월 25일)의 계획 뿐이다. 청산도를 갔다가 보성이나 해남까지 가는 것이 목표지만 세부 계획은 아직도 세우지 못했다. 잠깐 조바심이 나다가 이내 '어차피 혼자가는 여행, 발길 닿는대로 가보자'고 마음 먹는다. 조바심을 접으니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고속버스 좌석에 몸을 편히 기대고 앉아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1. 광주터미널의 기억

4시간 정도를 달려 광주에 도착했다. 3년간 고등학교를 다니며 살았던 도시다. 만들어질 당시 아시아에서 몇 번째로 크다고 이야기되던 광주터미널도 그 고교생 시절에 지어진 건물이니 15년 정도된 건물이다. 고교생 시절, 매주 주말 이 터미널에서 시골집에 가는 직행버스를 타곤 했으니 나름 추억의 터미널이다.

이제는 유스퀘어라는 이상한 이름이 되어버린 광주터미널
▲ 광주터미널 이제는 유스퀘어라는 이상한 이름이 되어버린 광주터미널
ⓒ 문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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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벌써 오후 1시. 우선 배를 채우기로 하고 식당들을 둘러본다. 식당을 찾으려고 둘러보니 이 추억의 터미널도 많이 변했다. 터미널 내로 길게 뻗어있던 매표소들은 무인매표기로 변했고 그 자리에는 전국 어디에나 있는 무슨무슨 체인점들이 들어차있다. 잠시 밖으로 나와서 보니 터미널 이름도 '무슨 스퀘어'로 변해있다. 무슨 스퀘어, 무슨 멀티플렉스, 무슨무슨 체인점…. 도시의 일상이 고속버스를 타고 쫓아온 듯해 숨이 막혀온다.

배고픔을 참고, 그냥 담양으로 빨리 탈출하기로 한다.

2. 인심 넉넉한 담양에 도착하다

광주에서 직행버스를 타고 40여 분을 달려 담양터미널에 도착했다.

터미널 앞에 있는 식당에 들어가 뼈다귀 해장국을 시킨다. 된장과 시래기로 맛을 내는 전라도식 뼈다귀 해장국을 기대했지만 그냥 붉은 국물의 해장국이 나온다. 아쉽게도 뼈다귀 해장국 맛은 전국이 거의 같아져 버렸다. 그래도 각종 나물이 포함된 밑반찬에 흐뭇해하며 한끼를 때운다.

평일 낮에 카메라와 렌즈를 잔뜩 메고온 청년이 관광객임을 눈치챈 주인아저씨의 질문과 고향 자랑이 이어진다. 계획했던 담양여행의 코스들에 대해 이야기가 오가던 중 첫 번째 행선지가 죽녹원이라고 하자 바로 옆에서 식사하고 있던 손님이 그 근처에 사신다며 차를 타고 같이 가라고 하신다. 옆에서 식사하시던 손님도 흔쾌히 태워 줄테니 같이 가자고 하신다. 좀 걸을 계획이라 넉넉한 시골 인심만 고맙게 받고 정중히 사양했다.

3. 온통 푸르른 죽녹원에 가다

식당을 나와, 주인 아저씨가 일러준 길을 따라 걷기 시작한다. 본격적인 여행의 시작인데, 때를 맞춰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태워주신다는 걸 거절한 게 잠시 후회도 되지만, 빗속을 걷는 여유도 싫지는 않다. 길을 잘못 들어서 조금 헤맸는데도 30여 분만에 죽녹원에 도착했다.

온통 대나무다. 비가 내리는 덕분에 푸른 대나무는 그 절정의 녹색을 뽐낸다. 비 덕분에 사람도 많지 않아 한적하고 여유로운 대나무 숲으로 들어선다.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절경을 찍는데는 별다른 기술이 필요없다. 찍으면 그림같이 나온다.

죽녹원 대나무길
▲ 죽녹원 대나무길 죽녹원 대나무길
ⓒ 문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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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녹원의 정자
▲ 죽녹원 죽녹원의 정자
ⓒ 문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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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날씨는 아니지만 여러 커플들이 데이트를 즐기고 있다. 커플들이 보이기도 하고, 아내와 결혼초에 같이 여행왔던 곳이기도 해서, 아내 생각이 잠시, 미안함이 잠시 스쳐간다. 그래도 제일 아쉬운 것은 아내가 없으니 모델이 없어 풍경밖에 찍을 수 없다는 점이다. 아내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라, 모델이 없어서 아쉬워했다는 걸 아내가 안다면 욕 좀 먹겠다 싶어 헛웃음이 난다. 없는 모델은 도촬로 커플들의 뒷모습을 찍는 것으로 대신한다.

죽녹원을 찾은 연인들
▲ 연인들 죽녹원을 찾은 연인들
ⓒ 문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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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죽녹원은 좀 늦게 지어진터라 역시 담양에 있는 대나무골 테마공원보다는 대나무들이 좀 작은 편이다. 그럼에도 뛰어난 풍광이다. 그리고 이곳은 그 유명한 1박2일의 담양 촬영지 중 한 곳이기도 하다. 곳곳에 '1박2일'의 로고가 새겨진 알림판들이 보인다.

워낙 유명한 프로그램이고, 홍보효과가 뛰어나니 지자체들이 앞다퉈 유치하고 그 여행길에 지역경찰들이 교통통제도 해주는 편의를 제공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터다. 다만, 이 녹색세상에 느닷없이 컬러풀한 1박2일 로고까지 박아 두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1박2일 몇십번째 촬영지라는 간판보다 그저 '담양'이라는 브랜드가 훨씬 근사하고 우아하다.

4. 여행 첫날밤

죽녹원을 나서고 보니 관방제림이 눈에 띈다. 오는길에는 죽녹원을 찾는데 급급해 안보이던 것들이 여유를 갖고 둘러보니 보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관방제림은 내일 둘러보기로 한데다, 빗줄기도 거세진다. 결국 관방제림 바로 옆에 사찰로 들어가는 가로수길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기로 한다.

관방제림과 하천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이 길은 플라타너스 가로수 길이다. 새마을운동 시절에 옮겨심은, 크게 빨리 자라는 나무인 플라타너스는 그렇게 운치있는 가로수는 아니라고 생각해왔다. 아니, 도심의 플라타너스들이 전기줄과 각종 표지판들과 공생하면서 지저분하게 보여서 그렇게 느껴왔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잘 다듬어져 도로를 따라 늘어서 있는 이곳의 플라타너스는 이제껏 보아온 플라타너스 가로수 길들 중에서 손꼽을 정도로 좋았다.

관방제림 옆에 위치한 플라타너스길
▲ 플라타너스길 관방제림 옆에 위치한 플라타너스길
ⓒ 문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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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플라타너스 길을 따라 걷다가 거세지는 빗줄기에 되돌아와 숙소를 구했다. 숙소는 인근의 찜질방. 여행 첫날인데 장거리 이동으로 생각보다 비용이 많이 지출된데 따른 고육책이다. 게다가 내일은 메타세쿼이아 길을 가야 하는데, 메타세쿼이아길 촬영의 핵심은 뭐니뭐니해도 사람들이 없을 때 도착할 수 있느냐기 때문에 오래 자지도 못할터다.

씻고서 보니 발뒤꿈치가 까졌다. 몇 시간 안되게 걸었다고 몸에서 생색을 낸다. 책을 좀 보고 찍은 사진을 보다가 일찍 잠을 청한다. 내일이 돌아가는 날이 아니라, 계속되는 여행의 또 하루라는게 벅차다.


태그:#여행기, #담양, #죽녹원, #대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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