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김유신(엄태웅 분)은 미실(고현정 분)의 지원 하에 풍월주에 오르고 김춘추(유승호 분)는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서책을 뜯어 종이 주사위나 만들고 있는 가운데,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생뚱맞은 암살사건이 발생했다. 국선이자 풍월주였던 문노(정호빈 분)가 염종(엄효섭 분)이 보낸 자객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한 것이다.

드라마 속에서 문노의 피살은, 유신을 '왕보다 더 큰 자'로 만들려는 문노와 이를 어떻게든 저지하려는 비담(김남길 분) 사이의 갈등이 증폭되던 와중에 발생한 사고였다. 문노가 자신이 아닌 유신에게 <삼한지세>라는 서책을 물려주려 한다는 사실에 분노한 비담의 도발로 인해 사제 간에 검투가 벌어졌고, 그 틈에 자객이 등 뒤에서 칼을 날려 문노를 쓰러뜨린 뒤에 서책을 훔쳐 달아난 것이다.

문노 암살의 몸통, 염종인가 춘추인가

ⓒ iMBC

관련사진보기


평소 같았으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을 문노가 그 정도의 공격을 막지 못해 자기 목덜미를 움켜잡고 쓰러지다니, 정말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세상의 이치는 오로지 조물주만이 알 수 있듯이, 드라마의 이치는 오로지 작가만이 알 수 있는 것일까. 그런 불가사의에 의해 문노는 사망 아니 '하차' 하고 말았다.

문노가 쓰러진 뒤에야 잘못을 깨달은 듯 눈물을 흘린 비담은, 스승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삼한지세>를 되찾기 위해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피를 잔뜩 묻힌 칼을 들고 염종을 찾아갔다. 그런데 그곳에서 <삼한지세>로 종이 주사위를 만들어 노는 주인공은 다름 아닌 춘추였다. 이 사실에 비담은 크게 놀란다. 대체 문노 암살의 몸통은 염종인가 춘추인가?

28일 <선덕여왕> 제37부에 방영된 위의 내용은, 대단히 그럴싸하기는 하지만, 모두 다 픽션에 불과하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문노(538~606년)가 사망한 것은 유신이 풍월주에 오르기 6년 전인 606년이었다. 따라서 기록대로라면 문노는 진작 죽었어야 마땅했다.

문노가 사망한 시점은 606년, 그의 나이는 69세였고 유신과 춘추는 각각 12세 및 5세였으므로, 그들이 역사무대에서 서로 뒤엉킬 여지는 전혀 없었다. 비담 역시 이 시기에는 어렸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가 문노의 죽음에 대해 어떤 영향을 끼쳤다고 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드라마 속 이러저러한 픽션은 그렇다 치더라도, 무엇보다 <선덕여왕>에서 묘사된 문노의 최후가 실제의 최후와 판이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냥 판이한 정도가 아니라 '너무' 판이했다고 해도 될 것이다. 그렇다면, 문노의 실제 최후는 어떠했을까?

역사 속 문노는 '풍월주 유신랑' 못 봤다

ⓒ iMBC

관련사진보기


문노의 실제 최후가 어떠했는가를 이해하려면, 그가 생의 최후에 이르기까지 어떤 삶을 살았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어머니가 가야 출신이라는 이유로, 또 제23대 법흥왕(재위 514~540년) 말년에 병권을 장악한 아버지가 제24대 진흥왕(재위 540~576년)의 즉위 이후로 정치적 왕따였다는 이유로 청소년 시절의 문노는 비주류의 그늘을 벗어날 수 없었다.

고구려·백제를 상대로 아무리 군공을 세워도 신라 정부에서는 '출신성분'을 이유로 문노에게 그 흔한 '훈장' 하나 달아주지 않았다. 그런데 문노는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극복했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최대한 발휘했다. 그는 검을 잘 다루었고 기개가 대단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사람들을 잘 조직했다. 필사본 <화랑세기> 제7세 설원랑 편 및 제8세 문노 편에 따르면, 그는 탁월한 조직력의 소유자였다.

문노가 찾은 돌파구는, 기존의 화랑도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제2의 화랑도를 독자적으로 건설하겠다는 것이었다. 문노는 가야세력과 서민세력을 규합하여 572~576년의 어느 시점에 풍월주 설원랑에 맞서 제2의 화랑도를 건설했다. 화랑도가 2개의 파로 갈리는 순간이었다. 진흥왕 사망(576년) 얼마 전의 일이었다.

문노가 이끄는 제2의 화랑도가 막강한 세력으로 성장하자, 신라 정부에서는 이를 없애기보다는 제도권 안으로 흡수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제25대 진지왕(재위 576~579년)은 집권 초기에 제2의 화랑도를 승인하는 한편 문노를 국선에 임명했다. 이로써 신라에는 풍월주 설원랑이 이끄는 기존의 화랑도와 국선 문노가 이끄는 제2의 화랑도가 합법적으로 병존하게 되었다. 요즘 말로 하면, 복수 노조가 합법적으로 공존하는 것과 같았다고 할 수 있다.

미실과 손잡은 뒤 세속의 즐거움 알아버린 문노

ⓒ iMBC

관련사진보기


제도권 내부로 흡수되기는 했지만 문노가 이끄는 조직은 신라 왕실에게 여전히 위협적인 존재였다. 가야 출신들로 구성된 데에다가 서민들이 대거 가담한 조직이었기 때문이다. 진지왕 폐위를 계획하던 사도태후-미실 정권은 문노 세력이 거사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막는 한편 이들의 역량을 거사에 활용하기 위해 국선 문노에게 통합을 제의했다. 이는 양대 조직을 통합하자고 제의한 것인 동시에 진지왕 폐위에 동참하라고 제의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2개의 화랑도가 통합되고 뒤이어 제26대 진평왕(재위 579~632년) 즉위 후에 문노가 설원랑에 이어 제8세 풍월주를 차지하게 되었다. 문노를 국선이라고도 부르고 풍월주라고도 부르는 것은 이러한 사정 때문이었다. 정상적인 코스를 밟았더라면 화랑도 안에서 출세하기 힘들었을 문노는 이처럼 제2의 화랑도를 건설한 뒤에 이를 기반으로 기존 화랑도와 통합하는 방법으로 화랑도의 수장에 오르게 되었다.

이처럼 비주류의 한계를 뚫고 주류사회를 향해 과감히 압박해 들어오는 문노의 존재에 대해 특별히 주목한 한 여인이 있었다. 그는 바로 미실이었다. 가야인들과 서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해 특히 비판적인 문노를 어떻게든 자기 편으로 만들어야겠다는 것이 미실의 판단이었다.

미실이 문노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사용한 계책은 소위 '미인계'였다. 자신의 사촌 자매인 윤궁을 문노에게 소개해준 것이다. 문노가 제2의 화랑도를 바탕으로 국선의 자리에 오른 576년 이후의 일이었다. 이때만 해도 문노의 신분이 낮아서인지, 골품이 없는 문노와 진골 골품의 윤궁은 정식 혼인을 치르지는 않았다. 두 사람이 정식 부부가 된 것은, 문노가 진평왕 옹립 때에 세운 공을 발판으로 골품을 얻음으로써 양쪽의 신분이 대등해진 이후의 일이었다.

사촌 자매인 윤궁을 이용해서 문노를 자기편으로 만들겠다는 미실의 전략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화랑도 정신을 내세우며 미실의 정치개입을 비판하던 문노가 윤궁과의 사이에서 첫아들 대강을 얻은 뒤로는 미실에 대한 태도가 서서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종전 같았으면 철저하게 미실을 비판했을 문노가 첫아들 대강을 낳은 뒤로는 미실에 대해 말 그대로 '대강 대강' 대처한 것이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문노의 태도가 바뀐 데에는 윤궁의 끊임없는 설득이 주효했다고 한다. "미실에게 잘해야만 우리 자식들이 잘살 수 있다"며 윤궁이 계속해서 남편을 설득했던 것이다. 

자신을 두고 "초년의 기상이 없어졌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자, 이에 대한 문노의 반응은 아주 명쾌했다고 한다. "너희도 살아보면 안다!" 미실 앞에서 핏발을 세우던 드라마 속의 문노와는 너무나 딴판의 모습이었다. 부인 윤궁의 집요한 설득 속에 문노는 미실의 '순한 양'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드라마 <선덕여왕>은 '청년 문노'의 극대화

'작은 것에서 행복을 발견하는 묘미'를 알기 시작한 문노는 582년에 45세의 나이로 풍월주에서 퇴임한 후 그런 묘미에 더욱 더 빠져버렸다고 한다. <화랑세기> 문노 편에 따르면, 풍월주에서 물러난 이후로 문노는 아내와 함께 수레를 타고 야외로 소풍 나가는 것을 즐겼다고. 드라마 속 문노는 서라벌에서 잠적한 뒤로 농촌에서 의료봉사를 했다고 했지만, 실제의 문노는 이처럼 안락하고 여유로운 말년을 보냈던 것이다.

부인과 함께 세상을 즐기는 한편, 문노는 퇴임 이후에 두 가지를 더 배웠다. 하나는 술이고 하나는 여자였다. 40대 중반에 들어 처음으로 술을 배우고 또 처음으로 첩을 들인 것이다. 술과 여자를 알았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는 예전과는 전혀 다른 새 사람이 되었다. 시시비비 가리기를 좋아하던 사람이,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두루뭉술한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늦게 배운 도둑이 더 무섭다고 했던가. 검술과 화랑도 기개를 중시했을 뿐만 아니라 탁월한 조직력을 보유했던 '청년 문노'는 어느새 술과 여자와 화목을 우선시하는 '중년 문노'로 변하고 말았다.

그것을 '변절'이라고 해도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변절'의 삶을 살던 문노, 그는 606년에 별 탈 없이 최후를 마쳤다. 정의에 불타던 청년 시절과 달리 이미 현실에 타협해버린 늙은 문노는 인생을 맘껏 즐기다가 편안하게 인생을 마감했다. 수나라의 중국통일 이후로 당시의 동아시아를 휩쓸던 정치적 격변이니 신라의 위기 하는 것들은 이미 문노의 관심 밖에 있었다.

비담 같은 부담스러운 제자가 "내 책 내놓으라!"며 칼 들고 설칠 일이 전혀 없는 평화로운 일상 속에서, '실제의 문노'는 술과 여자와 화목을 맘껏 향유하다가 편안히 눈을 감았다. 유신에게 비법을 전수하려다가 불의의 피살을 당해 목덜미를 움켜잡고 쓰러진 '드라마 속 문노'의 최후는 실제의 최후와 비교한다면 정말로 멋진 최후라고 아니할 수 없다.


태그:#선덕여왕, #문노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