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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5년 3월 열린 '유서대필 조작사건 진상규명 대책위원회' 발족식에서 사건 당사자 강기훈씨가 당시 상황을 증언하고 있다.
 지난 2005년 3월 열린 '유서대필 조작사건 진상규명 대책위원회' 발족식에서 사건 당사자 강기훈씨가 당시 상황을 증언하고 있다.
ⓒ 김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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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면 모든 진실이 밝혀진다지만, 그 이름도 희한한 '유서대필사건'은 참으로 기구한 운명의 길을 걸어왔다. 조작은 짧고 진실은 오래 걸리기 때문일까. 18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의 거리를 돌아서 이제 마지막 종착역에 다다르고 있다. 진실과 정의의 입구로 들어가는 길이다.

서울고등법원이 오랜 시간을 끌다가 16일 마침내 '유서대필사건'에 대한 재심청구를 받아들였다. 지난 1991년 유서대필사건이란 정말 '듣도 보도 못한 사건'이 검찰에 의해 발표된 뒤 18년 만이고,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2007년 11월 유서대필사건은 조작된 것이라며 진실규명 결정을 내린지 2년 만이며, 당시 피의자로 옥고를 치른 강기훈씨가 2008년 1월 법원에 재심을 청구한지 1년 반 만이다.

이번 재심 사건은 단순히 유서대필사건의 판결이 잘못됐다는 번복판결에 그쳐서는 안 된다. 유서대필사건의 조작에 대한 총체적인 진상규명과 함께, 당시 수사에 참여했던 검사와 유죄판결에 관여했던 판사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는 판결이 되어야 한다. 희대의 국민사기극이었던 유서대필사건은 당시 검찰과 법원이 수사의 기본과 판결의 원칙을 지켰더라면, 결코 일어날 수 없었던 사건이기 때문이다.

너무나 황당했던 1991년 취재현장

나는 누구보다도 당시 유서대필사건에 대한 검찰의 조작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봤던 사람이다. 1991년 5월 검찰이 이른바 '유서대필사건'을 수사할 때, 한창 젊은 나이의 <한겨레신문> 사회부 기자로 사건현장에서 취재했기 때문이다. 당시 노태우 정권의 인권과 노동운동 탄압에 항의해 분신자살한 김기설씨의 가족과, 김씨의 유서를 대필했다는 의혹을 받은 강기훈씨 등을 직접 만나 여러 차례 취재를 했다.

당시에도 취재 결과, 한마디로 검찰의 짜 맞추기 조작사건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 사건을 검찰에 의한 '유서대필 조작사건'이라고 부른다. 18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의 상황을 생생히 기억한다. 취재기자인 나로서도 너무나 황당하고 엉터리 같은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눈 감으면 코 베어 먹을 세상이란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다. 

당시 법원의 판결에 의해 유서대필 조작사건이 유죄가 되는 것을 보고, 언젠가 유서대필 조작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겠다고 다짐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내가 13년 동안 기자생활을 하면서 취재했던 사건 중 가장 아쉬움으로 남았던 사건이다. 결국 진상을 규명하지 못하고, 개인적 진로변경으로 언론사를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유서대필 조작사건은 어떻게 보면 복잡하고 달리 보면 아주 간단한 사건이다. 당시 재야단체인 전민련(전국민족민주연합) 사회부장이던 김기설이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유서 2장을 남기고 분신자살하자, 검찰은 같이 근무하던 전민련 총무부장 강기훈이 유서를 대신 써주었다며 자살방조 혐의로 기소한 것이다. 죽음을 부추기면서 유서까지 대신 써줬다는 희대의 '유서대필 조작사건'은 이렇게 해서 세상에 나왔다.

김기설의 필적 변화를 악용한 검찰

사건만큼이나 진실규명도 어려울 것이 없었다. 김기설의 유서와 김기설의 평소 필적, 그리고 강기훈의 필적을 비교하면 되는 것이었다. 내가 당시 취재했던 기억으로는 바로 여기에서 문제가 생겼다. 김기설의 필적이 중학교 시절 이전과 군부대 시절, 그리고 제대 이후 재야단체에 근무하면서 몰라보게 변화가 생긴 것이었다. 중학교 시절까지는 이른바 '지렁이 글씨체'였다가, 군부대 시절에는 모범생의 정자체 글씨를 보이고, 재야단체에 근무하면서는 이른바 세련된 흘림속필체로 바뀌어져 있었다.

김기설의 속필체는 언뜻 눈으로 보면, 상당히 강기훈의 속필체와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물론 김기설의 속필체와 강기훈의 속필체도 자세히 보면, 필적 감정전문가들의 말처럼 "필기습성과 운필습성"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다른 필적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나는 김기설이 재야단체에 근무하면서 자신이 멋있다고 생각하는 재야인사들의 글씨체를 흉내 내다 보니, 강씨와 필체가 비슷해진 것으로 판단했다.

실제 김씨의 필적변화를 보여주는 증거도 많았다. 그중 하나가 김씨가 군대에서 제대한 뒤 재야단체에 근무하면서 1990년 경기도 성남의 기업에 취직할 때 직접 쓴 이력서였다. 이력서의 글씨체는 김씨의 속필체의 특징이 드러나면서, 유서의 글씨체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김씨가 직접 쓴 전민련의 업무일지와 전민련수첩, 메모지 등의 글씨체도 유서와 비슷했다. 누가 보더라도 재야단체 근무 이후의 김씨의 평소 글씨체는 유서와 동일했다.

당시 검찰은 바로 김기설의 이런 필적변화를 악용했다. 검찰은 언론에 김씨의 중학교 시절의 '지렁이 글씨체'나 군복무 시절 등의 정자체만을 김씨의 필적이라고 소개하고, 유서와 비슷한 김씨의 전민련 업무일지 등 속필체는 전혀 공개하지 않거나 김씨의 필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지난 91년 5월 당시 <조선일보>에 실린 김씨와 강기훈씨의 필적. 가운데 붉은 테두리 안이 고 김기설씨 글씨이고 위쪽이 강기훈씨 필적.
 지난 91년 5월 당시 <조선일보>에 실린 김씨와 강기훈씨의 필적. 가운데 붉은 테두리 안이 고 김기설씨 글씨이고 위쪽이 강기훈씨 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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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의 자의적 증거선택에 의한 고의적 증거조작사건

유서 대필의 진위를 가리기 위해서는 당연히 속필체의 유서와 김씨의 속필체, 그리고 강기훈의 속필체를 비교했어야 했다. 그러나 검찰은 필적 비교 단계부터,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없는 국민들을 철저히 속였다. 속필체의 유서와 김씨의 속필체 필적을 비교한 것이 아니라, 김씨의 옛날 정자체 글씨를 비교하는 속임수를 썼다. '눈 가리고 아웅' 식의 수사였다.

그리고 속필체의 유서와 강기훈의 속필체 필적을 비교해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부터 "필적이 동일하다"는 판정을 받아냈다. 물론 2007년 과거사위의 조사에서는 당시 유일한 유서대필 근거였던 유서와 강기훈의 글씨체가 "동일하다"는 당시 국과수의 판정도 거짓으로 밝혀졌다. 당시 거짓 감정한 국과수 문서분석실장은 다른 사건과 관련해 뇌물을 받고 허위감정해준 혐의로 구속되었다. 다른 주요 증인의 진술도 조작되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최근 김기설의 전대협 노트 등 새로운 필적을 감정할 수 있는 증거들이 나왔다고 하지만, 이미 그 당시의 증거만 가지고도 검찰이 증거조작을 하지 않았다면 진상을 쉽게 규명할 수 있었던 사건이었다. 당시 김씨의 유서와 김씨의 속필체 필적, 강씨의 속필체 필적 3개를 비교했다면, 김씨의 유서와 강씨의 속필체 필적은 언뜻 비슷하지만 자세히 보면 다르다는 것을 명백히 알 수 있고, 김씨의 유서와 김씨의 속필체 필적은 똑같다는 것을 한눈에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유서대필 조작사건은 이처럼 엉뚱한 필적을 비교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검찰이 김씨의 속필체 필적은 증거로 하나도 채택하지 않는 이른바 '자의적 증거선별선택'에 따른 '고의적 증거조작사건'이었다. 살아있는 현재의 증거는 배제하고, 이미 오래전에 죽은 옛날의 유령의 증거를 갖고 조작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시 언론에는 대부분 김씨의 속필체 유서와 언뜻 보면 비슷한 강씨의 속필체 필적만이 보도되었다. 그렇게 국민들을 속였다.

검찰의 정치적 조작사건에 힘 실어준 법원의 어용재판주의

그 당시에도 검찰의 이런 증거조작 의혹을 <한겨레신문>에서 끊임없이 제기하고 재야단체와 강기훈의 변호인단도 법정에서 주장했으나, 검찰은 이를 철저히 묵살했다. 법원 역시 "확실한 심증을 형성하지 못했다"며 판결의 한계를 시인하면서도 유죄를 내렸다.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판단하라는 증거재판주의의 기본원칙을 법원 스스로 파괴했던 재판이었다. 법원은 거꾸로 의심스러울 때 권력에 유리하게 판단하는 '어용재판주의'를 선택했다.

유서대필 조작사건은 이처럼 처음부터 검찰의 증거조작으로 시작된 정치적 조작사건이었으며, 법원의 어용재판주의에 따른 정치적 판결이었다. 법원의 판결은 조작이 부활하고, 진실이 사망하는 선고였다. 역대 독재정권에서 권력의 풍향계 역할을 하는 검찰의 권력에 대한 과잉충성은 제쳐두더라도, 법원이 재판의 기본원칙만이라도 지켰더라면 이런 조작사건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김기훈이 한글을 쓰지 못하는 문맹자도 아닌데, 죽어가면서까지 유서를 대신 써달라고 할 이유가 있을까. 이런 비상식적인 상상을 검찰은 왜 했을까. 1991년 당시는 명지대생 강경대씨가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사망하면서 잇따라 모두 13명이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면서 분신과 투신 자살, 의문사하면서 국민적 저항으로 노 정권이 궁지로 몰리던 시기였다.

그때 위기에 처한 노 정권이 꺼낸 카드가 바로 "분신을 조종하는 배후가 있다"는 반격이었다. 검찰과 경찰이 배후를 찾아 나섰으나 결국 그 배후를 찾지 못하자 만들어낸 사건이 유서대필 조작사건이다.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면서 분신한 사람들의 '배후', 즉 '어둠의 세력'은 다름 아닌 노태우 정권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시인 김지하가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우라"는 칼럼을 싣고, 서강대 총장 박홍은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배후세력이 있다"고 주장하며 정권에 힘을 실어주던 때였다.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 '분신을 혁명의 도구로'

검찰이 유서대필사건을 조작한 것은 민주화단체의 도덕성에 치명상을 입히기 위한 정치적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 전두환 정권 시절인 1986년 부천서 성고문사건 때 "혁명을 위해 성까지 도구화한다"며 성고문이 거짓이라고 민주화단체를 공격했던 것처럼, 노태우 정권은 "분신을 혁명의 도구화로 이용하고 있다"며 민주화단체의 도덕성에 타격을 주려고 했다.

실제로 검찰은 당시 논고에서 피의자 강기훈에게 "목적을 위해서는 동료의 생명까지도 혁명의 도구로 사용하는 좌경혁명분자"라고 규정했다.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다. 5년 전 부천서 성고문 사건 때 피해자 권아무개씨에게 "혁명을 위해 성까지 도구화하는 급진세력의 상습적 전술"이라고 발표했던 정권의 모습이 떠오른다. 왜 이리도 닮았는지.

정말 '유서까지 조작의 도구로 사용하는' 정치검찰의 상투적 수법이다. 민주화운동권 전체에 대해 목적을 위해서는 성적 수치심도 이용하고, 유서까지 대신 써주면 죽음을 부추기고 이용하는 반인륜적, 비인간적, 비도덕적 집단으로 매도하려는 의도였다.

유서대필 조작사건은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는 분신의 배후를 찾으려던 정권의 유령 찾기가 빚어낸 마녀사냥이자 참혹한 인권유린이었다. 노태우 정권이 처음부터 기획하고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한 가상 엽기영화 <유서대필 마녀사냥>에, 검찰이 주연배우로 출연하고 법원이 조연 역할을 함으로써 한편의 그럴 듯한 역사적 사기극을 벌였던 것이다.

아무리 정권이 완벽한 기획을 했더라도, 최소한 검찰이나 아니면 법원이라도 꼭두각시 역할을 거부했다면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조작사건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나는 당시 조작사건에 관여했던 검사와, 판결의 기본원칙을 파괴하면서 유죄판결을 내린 판사에 대해 사회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본다. 그들은 인권과 정의의 수호기관으로서 검사나 판사가 아니라, 스스로 정치검사이자 어용판사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 진실은 피곤하고 힘들다

그동안 우리는 이승만과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독재정권에서 빚어진 수많은 용공이념 조작사건들을 보아왔다. 진보당 당수 조봉암 사건과 민족일보 조용수 사건, 민청학련 사건, 인혁당 사건 등 정치적 조작사건뿐 아니라, 송씨 일가 간첩사건과 김양기 간첩사건, 수지 김 간첩사건, 북파공작원 이중간첩사건 등 민간인 상대 조작사건들도 끊이지 않았다. 역대 정권에서 정치적 반대세력뿐 아니라, 일반 민간인들도 인권의 희생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이런 기본적 인권침해의 조작사건들이 정권이 바뀌었는데도 단절되지 않고 이어졌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정당성 없는 권력은 그렇다 치고, 인권의 수호기관인 검찰과 정의의 최후보루인 법원이 스스로 최소한의 역할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인권침해 조작사건에 대한 검사와 판사에 대한 사회적 책임, 나아가 역사적 책임을 물어야 하는 이유다. 그래야만 '한국판 드레퓌스사건'인 유서대필사건 같은 또 다른 조작사건의 재발을 막을 수 있다.

프랑스 작가 에밀 졸라는 100여 년 전인 1898년 드레퓌스 사건의 조작을 고발하면서 "진실이 행진하고 있다. 아무도 그 길을 막을 수 없다"고 했다. 프랑스에서 드레퓌스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는데 12년 걸렸는데, '한국판 드레퓌스사건'인 유서대필 조작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는 데는 무려 18년 이상 걸렸다.

참으로 길고도 긴 진실의 '고난의 행군'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진실은 피곤하고 힘들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기자는 전 열린우리당 의원입니다.



태그:#유서대필사건, #강기훈, #김기설, #드레퓌스사건, #에밀 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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