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나는 피렌체의 세례당을 찾아 걷고 있었다. 이전의 피렌체 여행에서 제대로 보지 못했기에 아쉬움이 강하게 남았던 곳이다. 한 명소에 대한 두 번째 여행은 항상 전 여행 당시에 보지 못했던 곳에 집중하기 마련이다. 당시 산지오반니 세례당(Battistero di San Giovanni)은 어둠 속에 버티고 서 있었고 나는 '천국의 문'을 자세히 보지 못하고 지나쳤었다.

베키오 다리(Ponte Vecchio) 쪽에서 피렌체의 두오모(Duomo) 쪽을 향해 걸었다. 산지오반니 세례당은 거대한 두오모의 바로 서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현대 문명 속에서 고층빌딩을 많이 보아온 사람들에게는 조금 아담한 건물로 보이는 곳이다. 세례당은 백색과 녹색, 갈색의 대리석이 퍼즐 맞추듯이 촘촘히 짜여 있었다. 대리석이 푸른 하늘과 뭉게구름을 배경으로 잘 어울리고 있었고 특히 햇빛을 받은 백색 대리석은 밝게 빛나고 있었다.

대리석으로 곱게 만들어진 팔각형 모양의 세례당이다.
▲ 산지오반니 세례당. 대리석으로 곱게 만들어진 팔각형 모양의 세례당이다.
ⓒ 노시경

관련사진보기


가족의 가이드 역할까지 해야 하는 나는 아내와 딸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온통 대리석의 향연이군. 이 광장의 세례당과 종탑, 두오모가 온통 대리석이야. 건물 외부를 모두 대리석으로 쌓아올리다니‥‥. 보통 정성이 들어간 건물이 아니야. 흰 대리석은 세척을 하지 않으면 지저분해질 텐데‥‥. 이 건물도 오랜 세월동안 수없이 대리석 닦는 작업을 했을 거야."

'산지오반니'는 '성 요한'의 이태리식 발음이다. 이 세례당은 피렌체의 수호성인인 성 요한을 모시는 건물인 것이다. 피렌체에서 가장 역사가 오랜 천주교 건축물인 이 세례당은 바로 옆의 피렌체 두오모가 건립되기 전까지 피렌체의 중심이 되는 대성당이었다.

"세례당 건물이 특이하게도 팔각형 모양을 하고 있네."

"팔각형의 '8'은 천주교에서 부활을 뜻하는 숫자야. 이 건축물은 팔각형을 통해 예수의 부활을 기리고 있지. 이 세례당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피렌체 시민들에게 천주교 세례를 주던 곳이기도 했어. 이곳에서 대문호 단테도 세례를 받았대."

아침부터 너무 많이 걸어서 다리가 조금 아팠다. 피곤한 다리는 나에게 앉을 곳을 찾아달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나는 세례당 앞의 한 여성구두 가게로 들어갔다. 가게 앞에 앉아있을 만한 자리가 보였기 때문이다. 예상과 달리 구두 가게의 점원은 편하게 앉아 있는 우리 가족을 제지하지 않았다. 나는 시원한 에어콘 속에서 찬란한 햇빛 아래에 서 있는 산 지오반니 세례당을 감상했다. 나는 따가운 햇살도 피하고 있었다.

세일 중인 구둣가게에는 피렌체의 늘씬한 미녀들이 구두를 구경하고 있었다. 모양과 색이 모두 다른 수제 구두가 여성들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 게다가 이 가게는 세일 중이어서 더 많은 사람들이 몰리고 있었다.

지오반니 세례당이라는 명품을 감상하던 나는 평소에 잘 하지 않던 말을 했다.

이태리 여성이 가게의 신발을 유심히 구경하고 있다.
▲ 세례당 앞의 신발가게. 이태리 여성이 가게의 신발을 유심히 구경하고 있다.
ⓒ 노시경

관련사진보기


"명품의 나라 이태리는 구두와 가방만이 명품은 아닌 것 같아. 명품을 입고 신는 이태리 사람들의 균형 잡인 몸매도 명품이라는 생각이 들어. 저 아가씨 봐봐. 시원스런 몸매가 가게의 구두들과 너무 잘 어울리지 않아?"

여행비 절감을 위해 명품 구입을 자제하고 있는 아내도 나의 말에 쉽게 동의했다.

나의 눈앞에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시작을 알렸던 불세출의 명작, 또 다른 명품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건물의 오랜 역사보다도 이 건물을 더욱 유명하게 만든 '천국의 문'이 눈앞에 있었다.

동쪽, 남쪽, 북쪽을 향하는 세례당의 3개 청동문 중에서 '천국의 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이 천국의 문 부조 앞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관광객들은 이 유명한 문 앞에서 사진기를 꺼내들고 자신과 이 세례당을 배경으로 사진 찍기에 바빴다. 어디에 가도 사진 찍는 것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나지만 세례당 앞은 사진 찍기가 힘든 곳이었다. 나는 문 앞에 바짝 달라붙어 사진을 찍었다. 천국의 문 위에서는 천사들이 사진 찍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문 앞에 사람이 너무 많아 불만이지만 이 '천국의 문'이 훌륭한 작품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다. 책의 사진으로만 보던 천국의 문이 눈앞에서 입체감을 뽐내고 있었다. 금박을 입힌 청동조각이 이렇게 훌륭한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고 문 하나가 이렇게 명품이 될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이 문 자체가 청동 위에 입체로 표현된 작품이기에 평면을 표현하는 사진으로는 그 느낌을 전달받을 수 없을 것이다. 훌륭한 입체작품은 직접 와서 일견하면 그 감동이 몸으로 전달되는 법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세례당의 황금빛이 너무 번쩍거리고 이제 막 완성된 작품같이 보인다는 점이다. 진품은 피렌체 두오모 옆의 오페라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조품이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것은 모조품이 바로 진품이 있던 중요한 자리에 완벽한 복제품으로서 똑같은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약간 소란한 주변의 번잡함을 애써 무시하면서 천국의 문에 새겨진 작품들을 음미해 보았다. 그런데 왠지 천국의 문은 전혀 천국을 표현한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문에 조각된 부조의 내용이 천국과 관련된 내용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부조가 '천국의 문'으로 불리는 것은 당대의 거장, 미켈란젤로의 한 마디 때문이었다.

미켈란젤로는 이 문이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 같이 뛰어나다고 극찬했고 그 이후부터 이 청동문은 '천국의 문'으로 불리게 되었다. 미켈란젤로는 황금빛으로 빛나는 청동의 장엄한 아름다움에 큰 감동을 받았던 것이다. 아무튼 유명 예술가의 한 마디는 두고두고 역사에 남고 또한 이름으로도 남아 후세 사람들이 반복 사용하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불세출의 명작으로 구약성서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 천국의 문. 황금빛으로 빛나는 불세출의 명작으로 구약성서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 노시경

관련사진보기


자세히 보면 동양인과 서양인의 천국의 문 앞에서의 행동은 매우 다르다. 한국 사람이나 일본 사람은 천국의 문을 등진 채로 자신의 얼굴이 천국의 문 앞에 포개지도록 사진을 찍는 데에 열중이다. 반면 서양 사람들은 천국의 문에 새겨진 황금 부조들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천국의 문에 10개의 부조로 조각된 구약성서 창세기의 내용을 일일이 훑어보고 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천국의 문에 대한 지식을 현장에서 확인하면서 작품을 음미하고 있었다.

나는 천국의 문 앞에서 사진만 찍고 지나치는 사람들의 태도가 궁금했다. 천국의 문이 유명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그 문에 조각된 10가지 이야기의 기본적인 내용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명작은 그 작품 안에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알아야 작품을 보면서 느끼는 기쁨도 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던가? 이 명작 앞에서 사진만 서둘러 찍고 지나간다면 안타깝지 않겠는가?

사실 이 명작에 담긴 이야기는 기독교에 대한 믿음이나 지식이 없으면 이해하기가 힘들다. 이 천국의 문은 르네상스 초기의 조각가, 로렌초 기베르티(Lorenzo Ghiberti, 1381~1455년)와 그의 아들이 28년에 걸쳐 제작한 대작이다. 28년 동안 한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현대와는 달리 당시 사람들에게 강한 종교적 신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그 종교적 신념 속에 구약성서의 이야기들이 이 문에 담겨지게 되었다.

이 대작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등장하는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10개의 구획으로 나누어진 문 전체의 조각에 가득 담겨 있고 조각은 정교하기 이를 데 없다. 노아가 술에 취해 있는 장면, 가인이 아벨을 몽둥이로 때려죽이는 인류 최초의 살인, 이삭을 제물로 바친 아브라함, 시나이의 산에서 십계명을 받는 모세, 여리고 성의 함락, 다윗 왕과 사울, 솔로몬과 시바 여왕의 만남 등 나의 눈은 이야기를 찾아서 움직였다.

이 청동문에는 산과 건물, 사람들이 원근감 있게 잘 묘사되어 있었다. 로렌초 기베르티는 조각가 뿐만 아니라 금세공인으로서도 명성을 떨쳤기에 그의 실력이 이 작품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당시 청동문을 만든 목적은 예술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보다는 동판의 여러 조각을 통해 기독교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이 문의 이름은 분명 천국의 문이지만 문이 담고 있는 이야기들은 너무나도 지옥을 연상케 하고 있었고 이를 통해 종교적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기독교인이 아닌 나는 여러 이야기에 담긴 의미만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문의 내부는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다. 왜 들어갈 수 없는지는 모르겠다. 내부가 천국이라서 그런가? 문을 닫고 문에 조각된 천국의 문을 보여주기 위함인가? 이 문을 열면 천국에 갈 수 있으려나?

"여보! 문고리 같이 생긴 둥근 원안의 여러 사람들 중에서 작가인 기베르티 부자의 얼굴을 찾아봐. 작가는 이 문에 자신의 얼굴을 남겼대. 작가를 한번 찾아봐."

"이 사람 아냐? 머리가 넘어간 모습이 구약성서에 나오는 사람은 아닌 것 같고. 얼굴 모습도 신화나 종교 속의 사람이 아닌 것 같아. 다른 조각들에 비해 왠지 현실세계의 사람인 것 같아. 노란 금박의 사람이라서 마치 금 위로 얼굴을 들이밀고 있는 것 같아."

내가 보기에도 작가의 얼굴은 특이했다. 얼굴을 문 밖으로 내밀고 있는 모습은 마치 문 속에서 나오고 싶어하는 모습으로 보였다. 나는 이 작가가 반평생을 걸려서 이 문을 완성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작가가 이 문에 정성을 부은 것을 알고 있었던 사람이라면 천국의 문에 작가 자신의 얼굴을 남기는 것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국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나는 마음 속으로 천국의 문을 열어보았다. 나는 잠시 눈을 감아 보았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U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피렌체, #산지오반니 세례당, #천국의 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