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1>

바람 같고 유수 같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벌써 열흘 전 일이 되었지만, 지난 1일과 2일의 일들을 '즐겁게' 기억한다.

가을 기운이 소슬한 느낌을 안겨주는 9월 초하루, 오전 9시 성당에 가서 장례미사에 참례했다. 환갑도 못 먹고 먼저 세상 떠난 한 후배를 전송했다. 스산한 가을 기운이 인생 무상을 체감시켜 주기도 하는 9월의 삶을 장례미사 참례로 시작한 것이다.

장례미사 후 후배를 떠나보내며 장지까지 따라가지 못함을 미안해하면서도, 그를 위한 미사참례와 기도로 9월의 삶을 시작할 수 있었음을 하느님께 감사했다.

장지까지 따라가지 못하고 바삐 집에 온 것은 노친의 병환 관계로 6년 만에 친정을 찾은, 미국 LA에서 사는 누이동생이 나보다 한발 앞서 아파트에 도착해 있기 때문이었다. 동생은 아파트의 한 정자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노친의 병환 관계로 지난 1일 친정을 찾았던 내 바로 아래 누이동생이 7일 오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인천공항 근처 부천에서 사는 라일운 시인이 새벽 마중을 맡아주었고, 배웅도 해주었다.
▲ 다시 미국으로 노친의 병환 관계로 지난 1일 친정을 찾았던 내 바로 아래 누이동생이 7일 오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인천공항 근처 부천에서 사는 라일운 시인이 새벽 마중을 맡아주었고, 배웅도 해주었다.
ⓒ 지요하

관련사진보기


누이동생은 인천공항에 새벽 4시 30분쯤 도착했다. 마중은 인천공항에서 가까운 부천시에서 사는 라일운 시인이 맡아주었다. 라 시인은 고교 동문으로 나보다는 1년 후배이고 누이동생보다는 2년 선배가 되는 사람이다.

청소년 시절의 이런저런 아롱다롱한 추억들을 우리 남매와 공유하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교정 공무원으로 살다가 지난해 정년 퇴임했는데, 청소년 시절부터 접했던 우리 집 분위기의 영향으로 천주교 신자가 되었고, 또 내게서 자극을 받았기 때문인지 10여 년 전에 시단에 공식 등단한 시인이기도 하다.  

그런 라 시인이 새벽의 인천공항 마중을 맡아주었고, 또 자신의 승용차로 태안까지 내려와 주었다. 아침식사는 화성휴게소에서 했고, 데이트 기분을 내며 느긋하게(내 장례미사 참례 시간을 감안하여) 내려왔노라고 했다.

라 시인은 내 노친을 뵙고 나서 곧 돌아갔고, 어머니와 나는 먼 이국에서 살다가 6년 만에 다시 친정을 찾은 누이동생의 변하기도 하고 변하지 않기도 한 모습에 일말의 안쓰러움과 다행스러움을 동시에 느끼며, 실로 오랜만에 피붙이의 정을 확인했다.

그리고 나는 오후에 동생에게 어머니를 맡기고 서울을 갈 수 있었다. 어머니께 하루 세 번 식후에 드리는 약들과 식후 2시간에 드리는 약을 알려주고, 홍삼액과 흑마늘 즙을 언제 어떻게 해서 드리는 것까지 세세히 알려준 다음, 누이동생이 오늘 친정에 오도록 배려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며 오후 4시 40분발 버스에 올랐다.

6시 30분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에 도착 즉시 딸아이가 일러준 대로 지하철 7호선을 탔다. 그리고 이수역에서 4호선으로 갈아탄 다음 신용산역에서 내렸다. 급히 2번 출구로 해서 '남일당성당'으로 잰걸음을 하니, 막 연도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태안에서 4시 40분 버스를 타고 올라와서도 지하철 7호선과 4호선을 이용하니, 7시 용산미사에 아슬아슬하게 늦지 않은 셈이었다.

미국에서 살며 6년 만에 다시 친정을 찾은 누이동생 덕분에 9월이 시작되는 1일 오후 서울에 가서 또 한번 딸아이와 함께 '용산미사'에 참례할 수 있었다.
▲ 또 한번의 용산미사 참례 미국에서 살며 6년 만에 다시 친정을 찾은 누이동생 덕분에 9월이 시작되는 1일 오후 서울에 가서 또 한번 딸아이와 함께 '용산미사'에 참례할 수 있었다.
ⓒ 지요하

관련사진보기


먼저 와 있는 딸아이가 잡아놓은 자리, 이동식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성호를 그으며 두 번 "하느님, 감사합니다"라는 기도를 했다. 소슬한 가을 기운이 인생 무상을 체감케 하는 9월 첫날 다시 용산에 와서 용산참사 희생자들을 위한 미사에 참례하도록 배려해 주신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했다. 그리고 태안에서 오후 4시 40분 버스를 타고서도 7시 용산미사에 늦지 않도록 내 걸음을 도와주신 하느님께 뜨거운 마음으로 감사했다.

원래는 8월 31일 오전에 서울에 갔다가 오후에 내려올 예정이었다. 노친의 병환과 관련하여 서울성모병원 완화의학과 염창환 교수를 만나는 일이 8월 31일 오전 11시로 예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울성모병원에서 하루 미루자는 연락이 와서 9월 1일로 정했다가 미국 LA의 누이동생이 1일 한국에 온다는 연락을 해옴에 따라 이번에는 내 쪽에서 부탁하여 서울성모병원 진료 예약을 2일 오후로 다시 미룰 수 있었다. 그 덕분에 나는 1일 밤을 서울에서 묵기로 하고, 다시 한번 딸아이와 함께 용산미사에 참례할 수 있었던 것이다.                 

<2>

2일 아침 6시 30분쯤 대학생 아들 녀석과 함께 합정동 집을 나섰다. 지하철을 타고 보라매 역으로 가서 신길동에 있는 '서울지방병무청'으로 15분 정도 걸어갔다. 어느덧 징집 대상자가 된 아들 녀석이 신체검사를 받는 날이었다. 대한민국 남성 국민이라면 누구나 거쳐야 하는 '병역의 길' 첫 관문이었다.

서울에서 일박을 했고, 서울성모병원 진료 예약 시간은 오후이니 시간 여유가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다 자란 아들 녀석의 신체검사장에 동행을 하는 내가 좀 우습기도 했다. 40여 년 전 내가 신체검사를 받고 또 입영을 하고 하던 날의 풍경이 아련히 떠오르기도 했다. 그때는 너나 할 것 없이 다 혼자였다. 신체검사장에 아버지가 동행한다는 건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것을 생각하면 내 아들 녀석은 아버지 복이 좀 있는 셈이었다.

그런데 신체검사장에 아들과 함께 온 아버지는 나 한 사람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징집 신체검사를 받는 아들을 둔 아버지들은 대개 40대 중·후반에서 50대 초반일 터였다. 한창 일에 바쁜 시기이니, 이런 일에까지 시간을 쓰지는 못할 터였다. 반면에 나는 이미 환갑을 넘긴 나이에다가 자유직업인이니 그만큼 여유가 있는 셈이었다.

내 아들 녀석은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2006년 2월 20일 서울 강남성심병원에서 '이소성 콩팥 요관 협착증' 수술을 받았다. 콩팥 하나가 정상 위치가 아닌 방광 근처 골반 앞에 있다고 했다.
▲ 이소성 콩팥 요관 협착증 수술 내 아들 녀석은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2006년 2월 20일 서울 강남성심병원에서 '이소성 콩팥 요관 협착증' 수술을 받았다. 콩팥 하나가 정상 위치가 아닌 방광 근처 골반 앞에 있다고 했다.
ⓒ 지요하

관련사진보기


나이 마흔에 결혼하여 딸 다음에 얻은 하나뿐인 아들이니 자연 아들 녀석의 징집 신체검사에도 신경이 가는 것은 당연지사겠지만, 내가 신체검사장에까지 걸음을 한 것은 오늘의 신체검사장 풍경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40여 년 전 내가 신체검사를 받던 때의 풍경과 얼마나, 어떻게 다른가 궁금증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정도 취재 목적도 결부되어 나는 카메라도 휴대를 했지만 신체감사장 안에서도 밖에서도 사진을 찍을 수는 없었다. 병무청도 군사 시설이라는 얘기인지….)

신체검사는 옛날과 달리 일방적인 소집이 아니었다. 인터넷을 이용, 대상자가 신체검사 받을 날짜를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선택 신청도 제한이 있었다. 정해진 수효만 신청을 받아서 신검을 실시하는데, 전원 컴퓨터를 이용했다. 사진 촬영과 청각 색각 검사 등을 마친 다음 컴퓨터 모니터가 설치된 책상 앞에 입실 순서대로 앉아서 350여 개의 질문에 답을 하는 장면은 재미있기도 했다. 나는 모니터에 뜨는 질문 내용들이 궁금했지만, 감독관의 제지로 '가족참관석'에 앉아 있기만 해야 했다.             

내 아들 녀석은 두 가지 별도 서류를 지참했다. 하나는 홍성보훈지청에서 발부 받은 '국가유공자 (6급) 자녀 증명서'였다. 국가유공자에게는 6급부터 자녀나 형제 중 한 명을 현역 복무를 면제받고 공익 근무로 돌릴 수 있는 '특전'이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또 하나는 강남성심병원 비뇨기과 김기경 교수에게서 발급 받은 '병사용 진단서'였다. 내 아들 녀석은 2006년 2월 강남성심병원에서 '이소성 콩팥 요관 협착증' 수술을 받은 바 있다. 두 개의 콩팥 중 하나가 정상 위치에 있지 않고 방광 근처 골반뼈 바로 앞에 내려와 있는 상태였다. 그 콩팥의 요관이 협착되어 수술을 받아야 했다. 서산의료원에서 맹장염으로 잘못 진단하고 맹장 수술을 한 생각을 하면 기가 막히기도 하고….

수술 후 강남성심병원에서 누군가로부터 "이런 상태로는 군대 갈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또 주치의 김기경 교수는 "신장 하나가 골반뼈 앞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충격을 받을 수 있는 과격한 운동은 피해야 합니다. 과도한 충격이 가해지면 신장이 파열될 수 있습니다"라는 말을 했다.

2005년 2월 맹장염이라는 오진으로 맹장수술을 받은 바 있는 아들 녀석은 2006년 2월 서울 강남성심병원에서 '이소성 콩팥 요관협착증' 수술을 받음으로써 오랜 동안의 간헐적인 통증에서 완전 해방될 수 있었다.
▲ 수술 직후 2005년 2월 맹장염이라는 오진으로 맹장수술을 받은 바 있는 아들 녀석은 2006년 2월 서울 강남성심병원에서 '이소성 콩팥 요관협착증' 수술을 받음으로써 오랜 동안의 간헐적인 통증에서 완전 해방될 수 있었다.
ⓒ 지요하

관련사진보기


그 후 아들 녀석은 축구 같은 격한 운동은 하지 않는다. 과거 축구선수였던 아빠와는 달리, 아빠를 닮아 운동신경이 발달한 상태임에도 축구를 하지 못하는 아이를 보면 괜히 미안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병사용 진단서'를 발급 받아 신체검사장에 가지고 간 것은, 군 복무를 완전 면제받기 위한 뜻이 아니었다. 사안에 따라서는 병사용 진단서와 증빙 자료로 병역을 완전 면제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것까지 바라지는 않았다. 다만 군에 입대하여 훈련을 받는 동안 무슨 불상사가 발생할 경우, 신장 하나가 정상 위치가 아닌 위험한 곳에 있다는 사실을 사전에 알리지 않은 '책임'을 면탈하기 위한 뜻이었다.

<3>

아들 녀석의 신체검사는 세 시간이나 걸렸다. 검사장에 일곱 번째로 입실을 해서 순번은 빨랐지만 두 가지 서류 때문에 진행이 많이 지연되었다. 그리고 국가유공자(6급) 자녀 특전 규정에 따른 '4주 기본 훈련에 5주 공익 근무'로 병역을 마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병사용 진단서에 대해서는 이런 말을 들었다고 했다.

"이소성 콩팥 문제로 징집을 면제받은 사례가 없기 때문에 오늘 여기에서 징집 면제를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의가 있으면 별도의 수술확인서와 콩팥 하나가 정상 위치가 아닌 곳에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CT 촬영 CD를 준비해서 재검 신청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와 아들 녀석은 의논 끝에 재검 신청을 하지 않기로 했다. 완전 면제를 위해 애쓰지 않고, 떳떳하게 국가유공자 자녀 특전 쪽으로 가서 4주 기본 훈련도 받고 공익 근무를 하기로 결정했다.

녀석은 이런 말을 했다,
"친구들은 모두 현역으로 군대를 가는데, 나 혼자 완전 면제를 받는다는 건 너무 미안한 일이에요. 뻔뻔스러운 일일지도 몰라요. 군복을 입어보기라도 하고, 총도 쏘아보고 수류탄도 던져보고 해야 친구들에게 덜 미안하고 떳떳할 것 같아요."

올해 대학생이 된 아들 녀석에게는 '병역의 길'이 놓여지게 되었다. '병역의 길' 첫 관문인 징집 대상자 신체검사장에 따라갔으면서도 관련 사진을 얻지 못해 많이 아쉽다. 대신 이 사진을 올린다.
▲ 대학교 입학식 날 올해 대학생이 된 아들 녀석에게는 '병역의 길'이 놓여지게 되었다. '병역의 길' 첫 관문인 징집 대상자 신체검사장에 따라갔으면서도 관련 사진을 얻지 못해 많이 아쉽다. 대신 이 사진을 올린다.
ⓒ 지요하

관련사진보기


그 말을 받아 나는 아들 녀석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

"옳은 생각이다. 아빠는 논산훈련소 조교에다가 베트남 전장 전투병에다가 최전방 DMZ 철책선 분대장까지 하며 풍성하게 군대생활을 했는데, 그런 아빠의 아들이 질병 면제로 군대에 발도 한번 들여 놓아보지 않는다면, 그건 너무 어색한 일이다. 사람이 살다보면 친구들과 군대 얘기도 많이 하게 되는데, 네 말대로 군복을 입어보기라도 하고 총을 쏘아보기라도 해야 무슨 말을 하지. 확실한 질환 때문에 징집 면제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좀 미안한 말이지만 질병 면제를 받으면 "나는 '병신'이다"라는 얘기밖에 안 돼."

그리고 나는 녀석에게 이런 말도 들려주었다.

"우리나라에는 나랏일을 하는 사람들, 사회지도층에 있는 사람들 중에 질병 면제로 군대에 가지 않은 사람들이 의외로 많아. 이명박 대통령, 정정길 대통령실장, 원세훈 국가정보원장, 김황식 감사원장을 비롯해서 현재 질병 면제, 혹은 고령 면제, 생계 곤란 등의 명목으로 군대에 가지 않은 사람들이 정부 요직을 다 차지하고 있어.

또 한나라당 국회의원들 중에도 질병 면제 등으로 군대에 가지 않은 사람들이 수십 명이
나 돼. 어떻게 보면 이 나라는 병신들의 나라야. 진짜 장애인들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아예 징집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심각한 병을 앓았거나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나랏일을 하고 있어. 그렇다고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처럼 휠체어를 타고 일을 하는 사람들도 아니야. 한마디로 멀쩡한 사람들이지. 달리 말하면 뻔뻔한 사람들이고. 너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 되어서는 안 돼. 그런 부류 속으로 편입되는 것은 그대로 수치야. 그걸 수치로 알고 살아야 해."

아빠의 말을 이해한 아들 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국가 지도층 인사들 중에 질병 등의 이
유로 군대에 가지 않은 사람들이 너무도 많은 현실에 충격을 받은 표정이기도 했다.


태그:#징집 신체검사, #서울지방병무청, #국가유공자, #병사용 진단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