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땅에 떨어진 도토리는 다람쥐 양식입니다.
 땅에 떨어진 도토리는 다람쥐 양식입니다.
ⓒ 강기희

관련사진보기


어린 다람쥐가 커다란 신갈나무 아래에 떨어져 있는 도토리를 두 개 주웠다. 하나는 얼른 까먹고 나머지 한 알은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갑자기 사람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어린 다람쥐는 땅을 파고 도토리를 급히 숨겼다. 그리고 몸을 피했다. 그 후 어린 다람쥐는 숨겨 둔 도토리를 잊었다. 떨어진 나뭇잎들이 그 위에 쌓였다. - 장편동화 <토리 이야기> 중에서

위의 글은 동화작가 유진아씨가 '생각하는 지혜' 시리즈로 출간한 장편동화 <토리 이야기>(도서출판 꿈소담이)의 한 대목입니다.

가을산은 인간이 아닌 야생동물의 잔칫상입니다

동화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꿀밤이라고 부르는 도토리가 주인공입니다. 어린 다람쥐가 땅에 숨겨 둔 도토리가 싹을 틔우고 어엿한 신갈나무로 자란 후 벌목꾼에 의해 잘려 숯가마로 팔려가 숯이 되었고, 그 숯이 한줌의 재가 되어 다시 흙으로 돌아오는 도토리의 일생을 다룬 이야기인데요. 동화는 도토리가 신갈나무로 변하고 인간의 필요에 의해 숯이 되었다가 재로 변해가는 과정을 그들의 시선으로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게 그리고 있습니다.

다람쥐와 도토리에 관한 이야기로 서두를 시작했으니 이번에 기희씨가 할 이야기도 다람쥐와 도토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시겠지만 산촌에 살다보니 사람 이야기는 전혀 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누군가 집을 방문하기 전에는 몇날 며칠을 보내도 사람 구경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그러하니 매일 한다는 이야기가 섬뜩한 뱀 이야기나 귀뚜라미 몸에 기생하는 연가시 같은 엽기적인 이야기밖에 없습니다. 지난 번 뱀과 연가시에 관해 했더니 이젠 무서운 이야기 그만하고 이 가을에 어울리는 가슴 푸근한 이야기 좀 해달라는 청이 있어 다람쥐와 도토리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오늘은 오랜만에 비가 내리고 있지만 요 며칠 동안 하늘이 무척 고왔습니다. 기희씨가 살고 있는 산촌은 벌써 가을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머루와 오미자, 다래 등의 열매가 익어가는 요즘, 계곡에 나가면 도토리는 물론이고 아찔할 정도로 진한 향기를 배고 있는 신배 또한 굳이 바람이 불지 않아도 뚝뚝 떨어집니다.

풍성한 가을산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넉넉해집니다. 자연이 주는 선물이 어디 이것뿐이겠는지요. 한갓진 가을 오후, 종종거리며 달려나온 다람쥐가 방금 떨어진 도토리를 두 손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까먹는 모습은 가을이 만들어낸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자 멋진 풍경입니다.

이맘 때가 되면 추수를 준비하는 농부는 물론이고 야생에서 살아가는 동물들도 바빠집니다. 특히 활엽수가 많은 이 지역의 동물들에겐 가을이 '이보다 좋을 수 없는 계절'입니다. 먹이를 찾아 먼길을 헤매지 않아도 되는 요즘은 그야말로 산 전체가 잔칫상이라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신갈나무 한 그루가 다람쥐를 비롯해 많은 야생동물을 키워냅니다.
 신갈나무 한 그루가 다람쥐를 비롯해 많은 야생동물을 키워냅니다.
ⓒ 강기희

관련사진보기


땅에 떨어진 도토리를 개미가 먹으려고 달려 듭니다. 하지만 껍질이 단단해 먹지 못하고 돌아섭니다.
 땅에 떨어진 도토리를 개미가 먹으려고 달려 듭니다. 하지만 껍질이 단단해 먹지 못하고 돌아섭니다.
ⓒ 강기희

관련사진보기


임금 수라상에 올랐다 하여 상수리 나무가 된 이야기

나무 중에서 진짜 나무이며, 아낌 없이 주는 나무로 알려진 참나무는 이런저런 잡종이 있지만 크게 6종류로 구분합니다. 나뭇잎과 도토리의 생김에 따라 상수리나무라고 부르거나 갈참나무, 신갈나무, 졸참나무, 떡갈나무, 굴참나무 등으로 부릅니다.

잎사귀 뒷면에 흰 떡가루가 묻어 있는 듯한 떡갈나무(참나무 중에서 가장 기품이 있고 멋있게 생긴 나무)는 이젠 귀한 나무가 되었고, 껍질이 두꺼운 굴참나무는 산촌 사람들이 그 껍질을 벗겨 지붕을 덮(굴피집)거나 와인병의 코르크 병마개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기희씨가 산촌마을에 살던 어릴 때만 해도 지붕 덮을 재료가 없어 굴피로 지붕을 얹은 집이 많았으나 지금은 그 또한 구경하기 힘들어졌습니다. 기희씨는 또 어린 시절 굴피를 벗겨 작은 기계로 코르크 병마개를 직접 만들어 보기도 했고 죽은 참나무에서 나는 후르래기(목이버섯)나 능이버섯을 딴 경험도 있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특별한 경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참나무 중에서 아주 생뚱맞은 이름을 지닌 나무가 있는데요. 그것은 상수리나무입니다. 그 이름이 생긴 연원이 조금은 재미있는데요. 옛날 조선 선조 임금 때의 일입니다. 왜구들의 침략으로 임금이 궁궐을 버리고 북쪽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는데요. 먹을 것조차 변변치 않던 시절 그 지역에 사는 백성들이 도토리묵을 임금 수라상에 올렸다고 합니다.

도토리묵을 처음 먹어본 선조 임금. 말캉말캉하게 생긴 도토리 맛이 신기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겠지요. 그 일이 인연이 된 후 백성들은 도토리 열매를 떨군 그 참나무를 '수라상에 오른 나무'라 하여 상수리나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역시 선조 임금 시절. 그가 피난 길에 먹었던 '묵'이라는 생선이 있었는데요. 지역에 사는 백성들이 임금에게 '묵'이라는 생선을 수라상에 올렸다고 합니다. 당시만 해도 배가 고팠던 선조, 그 묵을 아주 맛있게 먹었다고 합니다. 그때 선조는 큰 결심을 하고 생선 이름이 촌스럽게 '묵'이 뭐냐라며 "앞으로는 은어라고 불러라" 합니다.

왜구가 떠나고 평화를 되찾자 임금은 피난 길에 먹었던 '은어'가 생각났다고 합니다. 하여 임금이 "여봐라, 그 시절에 먹었던 음식이 그립구나" 라며 묵을 대령케 했답니다. 고생하던 때를 추억하며 은어를 다시 먹던 임금, 이미 배에 기름기가 찬 터라 그것이 맛있을 리가 없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선조.

"이기… 뭐… 맛이 이래… 에이, 도루묵이라 하여라."

그랬다고 합니다. 동해바다에서 나는 도루묵은 겨울철 별미입니다. 요즘은 일본으로 수출을 하기에 국내에선 비싼값에 거래되는 고급 어종이 되었습니다만, 당시 선조는 상다리를 걷어차며 '은어'라며 칭송했던 '묵'을 '말짱 도루묵'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계곡에 떨어진 도토리가 한 곳에 모여있습니다.
 계곡에 떨어진 도토리가 한 곳에 모여있습니다.
ⓒ 강기희

관련사진보기


배낭없는 다람쥐를 위해 기희씨가 할 수 있는 일은 뭘까요

아무려나 궁궐로 돌아간 선조가 다시 도토리묵을 먹었다면 상수리나무가 아니라 무수리나무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백성들이 구황음식으로 먹던 도토리묵인데, 배부른 이에겐 도토리의 '떫은 맛(탄닌성분)'밖에 더 나겠는지요.

참나무에 관한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는데, 이야기가 조금 딴 길로 흘렀습니다. 기희씨 사는 게 늘 그렇습니다. 뭐, 우리네 삶이 상점 주인이 장부책 정리하듯 일목요연 할 수야 있겠는지요.

암튼 집 마당 끝에 키가 제법 큰 신갈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이 나무가 요즘 도토리를 떨굽니다. 나무는 두 가지로 뻗어 있는데요. 하나의 가지는 마당으로 향해 있고 또 하나의 가지는 계곡으로 향해 있습니다. 그러하니 신갈나무가 맺은 절반의 도토리는 계곡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계곡으로 내려가니 다람쥐가 다녀간 흔적이 많습니다. 계곡으로 떨어지는 도토리가 아까웠던 걸까요. 도토리 껍질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다람쥐 녀석이 도토리 까먹는 것은 좋은데, 반쪽만 먹고 나머지 반쪽은 그 자리에 남겨 둔 것입니다.

나중에 먹으려고 그런 거겠지 라고 생각하며 며칠을 지켜 보아도 다람쥐는 그 반쪽의 도토리를 먹지 않았습니다. 대신 다람쥐는 또 다른 도토리를 까먹고는 버릇처럼 반쪽을 남겨 두었습니다.

그 이유를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었습니다. 먹을 것이 넘치는 가을, 다람쥐는 배가 불렀고 인간처럼 도토리를 담아갈 주머니나 배낭이 없었던 것입니다. 고작 입안에 도토리 두어 개 담아서는 집으로 돌아가거나 땅 속에 묻어 두는 다람쥐에게 이 가을에 떨어지는 도토리의 양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다람쥐가 나름 저장을 한다고 하지만 곧 겨울이 올 테고 그러면 많은 눈이 내립니다. 도토리는 눈에 묻혀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뿐 아니라 겨울이 되면 동물들간에 먹이 경쟁도 치열해집니다. 그 시기엔 멧돼지를 비롯해 고라니나 노루, 너구리, 들쥐 등의 동물도 도토리를 찾아 나섭니다. 그러하니 다람쥐가 땅에 떨어져 있는 도토리를 차지할 확률은 지극히 낮아집니다.

그런 생각을 하자니 고민이 됩니다. 땅에 떨어지는 도토리야 그렇다고 쳐도 계곡물로 떨어지는 도토리는 다람쥐 밥은커녕 물고기 밥도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여 큰 마음을 먹었습니다. 도토리를 주워 보관했다가 겨울에 다람쥐 먹이로 던져 주자 라고 말입니다.

다람쥐가 남긴 흔적입니다. 반쪽은 남겨 두었습니다.
 다람쥐가 남긴 흔적입니다. 반쪽은 남겨 두었습니다.
ⓒ 강기희

관련사진보기


계곡물에 도토리가 떨어져 있습니다. 물빛이 참 곱습니다.
 계곡물에 도토리가 떨어져 있습니다. 물빛이 참 곱습니다.
ⓒ 강기희

관련사진보기


도토리 주워 양식으로 바꿨던 일 반성합니다

물론 기희씨가 이렇게 이쁜 생각을 하기까지는 많은 고민과 반성이 있었습니다. 사실 먹이를 찾아 쪼르르 달려가는 다람쥐를 볼 때마다 기희씨는 그 귀여움에 웃고 다람쥐의 맑은 눈과 마주치며 또 한번 웃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랑하는 가족을 보고도 웃지 않은데, 하물며 지나치는 사람을 보면서 웃을 수 있는 일이 몇 번이나 되겠는지요. 그러니 다람쥐가 기희씨에게 주는 평화의 에너지라는 것은 수치로 환산할 수도 없을 정도로 큰 셈입니다.

모든 동물이 자신의 영역이 있듯 다람쥐도 다니는 길로만 이동합니다. 그 길을 막아 버리면 다람쥐는 딴 길로 가지도 못해 왔던 길을 되돌아 가는 착하고 겁 많은 동물입니다. 상위 포식자가 많은 산촌에서 다람쥐가 생명을 부지하고 살아가는 일이 녹록치 않은 이유입니다.

기희씨가 도토리를 줍기 시작한 것은 나흘 전부터입니다. 하루 한 차례, 늦은 오후가 되면 신갈나무 아래로 가 도토리를 줍습니다. 그것들을 주머니에 담아 집으로 옵니다. 그 시간은 요즘 기희씨의 하루 중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입니다.

도토리는 주로 계곡물에 떨어져 있는 것을 줍습니다. 발을 적시고 들어갈 때도 많습니다. 그것들은 먹이가 떨어진 겨울, 다람쥐의 요긴한 식량이 될 것입니다. 마당가에 떨어진 도토리는 다람쥐가 쉽게 주워가도록 모아 둡니다.

일반적으로 다람쥐는 동면을 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요즘은 한겨울에도 먹이 사냥을 하는 다람쥐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기희씨도 모릅니다.

도토리를 줍기 시작한 게 나흘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한 바구니나 됩니다. 이것들은 실온에 그냥 두면 벌레가 생깁니다. 알밤도 마찬가지입니다. 냉장고에 넣어도 벌레가 생깁니다. 껍질을 깐 후 말리거나 냉동실에 보관해야 벌레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희씨는 모은 도토리를 땅에 묻을 생각입니다. 땅이 꽁꽁 얼어도 손쉽게 꺼낼 수 있는 방법을 찾을 겁니다. 겨울이 되면 그것들을 몇 알씩 꺼내 다람쥐가 다니는 길에 놓아 줄 겁니다.

이제야 고백하건대, 20년 전쯤 기희씨는 일산 풍동이라는 곳에 살며 집 근처에 있는 도토리를 주워 팔았던 적이 있습니다. 당시 기희씨는 그 도토리를 돈으로 바꿔 일용할 양식을 구했지만 다람쥐의 양식을 훔쳤다는 생각에 늘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 이후부터 기희씨는 어느 자리를 가도 도토리묵만큼은 먹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기희씨가 시골 출신이라 도토리묵에 물려 싫어하는 것이라 말했지만 그런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제 그 미안함을 갚을 때가 된 듯합니다.

바보처럼 자연이 건강해야 인간이 살아갈 수 있다는 걸 나이 마흔을 넘긴 후에야 깨달았습니다. 다시 생각해도 도토리는 다람쥐의 양식이지 인간의 양식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굶어죽기도 어렵다는 요즘 굳이 다람쥐 양식인 도토리를 먹을 이유가 어디 있겠는지요. 먹을 것이 지천이라 버리면서 사는 세상 아니던지요.

도토리 열매가 곱게 익어갑니다.
 도토리 열매가 곱게 익어갑니다.
ⓒ 강기희

관련사진보기



태그:#도토리, #신갈나무, #참나무, #다람쥐, #가을
댓글1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33,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