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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렛미인>의 세계는 시꺼멓게 아득한 어둠과 순백색의 눈이 뒤섞인 회색빛이다. 잿빛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한 때 그곳에도 뜨거운 햇살이 쏟아지고 사람들의 환한 웃음이 떠다녔을 테지만. 이제 그 곳은 모두 타고 남은 재만이 공간 구석구석과 사람들의 내면을 파고든다. 그 어떤 희망이나 짱짱한 미래도 보이지 않는 그들은 하루하루를 간신히 살아내면서 뜨겁게 타오르는 욕망을 애써 수면 아래로 잠재운다. 그러고는 서로 얼굴을 붉히며 안개 낀 세상 속을 처연하게 걸어가는 것이다.

거기에는 복지국가의 혜택으로 굶어죽을 걱정은 없지만 인생의 허무함에 휩싸인 하층민이 있고, 학교에서 왕따를 당해 하루하루가 괴로운 열두살 소년(오스카르)이 있으며, 금기된 욕망으로 인해 거대한 고통을 짊어지게 된 사내(호칸)도 있다. 그리고 중년 남자와 함께 막 이사를 온 신비한 소녀(어쩌면 아닐지도)도 있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거대한 서사가 700페이지가 넘는 이 장편소설의 안감을 튼실하게 채워 넣는다. 소설은 어느 한 사람에게만 특별하게 눈길을 주기보다는, 그들의 세계- 블라케베리에 사는 이들의 시선을 골고루 그려낸다. 한 땀 한 땀 바느질 한 것처럼 꼼꼼하게 옮겨낸 이야기는 극도의 리얼리티와 괴이한 환상성을 교묘하게 오고간다. 이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바로 긴장감을 만들어내고, 두 아이(엘리, 오스카르)의 놀라운 사랑을 꺼내어 보여준다.

스웨덴 작가 욘 A. 린드크비스트의 첫 작품 <렛미인>은 우여곡절(여러 출판사에 거절당한 경험) 끝에 출간됐지만, 나오자마자 급속도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고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할리우드을 비롯한 숱한 영화제작들의 러브콜이 쏟아졌고, 결국에는 스웨덴 감독에 의해 영화화가 결정됐다. 시나리오는 원작자인 린드크비스트가 직접 맡았다. 금발 머리의 왕따 소년 오스카르, 검은 머리의 기이한 매력을 지닌 흡혈귀 엘리의 놀라운 사랑이야기.

세계를 감동에 빠뜨렸던 동명 제목의 영화 <렛미인>이 그것이다. 작품은 국내에 영화로 먼저 공개되어 적지 않은 마니아층을 확보한 상태.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원작 소설에 관심을 가졌다. 이 놀랍도록 창조적이고 가슴시린 흡혈귀 영화의 원작 소설은 어떨까. 기다린 사람이 한둘은 아니었을 게다.

영화가 뛰어넘을 수 없는 원작의 서사

영화가 원작의 이야기를 간추려 오스카르와 엘리의 갈등과 사랑에 집중한 한 편의 연가(戀歌)였다면, 장편소설 <렛미인>은 블라케베리 마을 사람들의 공허감과 고독을 꼼꼼하게 그려낸 거대한 벽화와도 같다. 물론 여기에는 소설 속 당시 스웨덴의 실제 현실이 배경으로 깔려있어 더 현실감이 넘친다.

복지국가 시스템이라는 찬란한 걸개 뒤에 가려진 노동자계급의 공허하고 비참한 삶이 그렇고, 러시아 침공에 대한 두려움 역시 그러하다. 또한 영화에는 생략되거나 축소된 인물들의 이야기가 소설 속에서는 엘리-오스카르의 이야기와 더불어 흥미진진하게 그려진다.

엘리의 실존적 고뇌는 어느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이었다. 살인, 피를 먹어야만 사는 이 비극적 욕망은 스웨덴의 조그마한 마을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다. 잠재되어 있던 불안정하고 충동적인 서로의 욕망이 거침없이 충돌하면서 마을은 새빨간 속살을 드러낸다. 핏빛 살육 축제가 벌어지고 고통과 환각에 휩싸인 이들은 꿈과 현실을 구분해내지 못하고 분별력을 잃는다.

소년 오스카르는 왕따다. 살인마들의 기사를 스크랩하고 매일 칼을 들고 나무에다가 찌르며 살인연습을 하는 그의 내면은 복수로 차오른다. 그건 거칠고 불온한 욕망이다. 금지된 욕망을 꿈꾸는 건 그러나 소년만이 아니다. 엘리 역시 흡혈귀이기에 그렇고, 조력자인 호칸 역시 독특한 성 욕망 때문에 괴로워한다. 그들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거나 시기하고 때로는 위협한다. 원작은 먼저 국내에 공개된 영화와는 달리 이 삼각관계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열두 살 외톨이 소년, 혹독한 겨울의 끝은?

현실세계에서의 욕망은 수치스러움과 죄책감을 동반한다. 그들은 이미 현실을 벗어나 욕망의 영역으로 건너갔다. 더 이상 예전과 같을 수는 없었다. 누군가는 죽음에 도달하고, 누군가는 운명에 좌절하며 블라케베리를 떠난다. 그리고 소년 오스카르는 모든 게 시시하게 느껴진다. 영화에서처럼 누군가의 도움으로 현실의 큰 장애물이 사라졌지만 그의 삶이 크게 바뀌진 않았을 게다. 소년은 여전히 현실 위에서 줄타기를 해야 하니까.

소년에게 그것은 일종의 성장이지 않았을까. 욕망이 잠든 곳에서는 다시 공허함이 찾아들고, 그도 나이를 먹기 마련이니까. 그는 이제 떠난 엘리의 도움 없이 스스로 이 현실을 이겨내야 한다. 그러니 이것이 성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소설 <렛미인>은 사회소설이고 흡혈귀 소설이며 소년소녀의 연애소설인 동시에 성장소설이기도 한 셈이다.

마지막에 소년은 열차 위에 오른다. 그는 이제 막 소년기를 벗어나고 있다. 지긋지긋한 공허함과 답답한 현실은 그대로겠지만, 적어도 엘리와 함께 했던 날들을 소년은 잊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그는 엘리를 평생 가슴에 묻어둘지 모른다. 이백 년 넘게 열두 살이었던 엘리와 그리고 어두운 열두 살 터널을 이제 막 통과한 오스카르.

소설 <렛미인>은 그들의 이 찰나지만 깊은 우정 혹은 사랑의 변주곡을 아름답게 그려낸다. 시간은 끊임없이 흐르고, 사람들은 지나가고, 기차는 계속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 그리고 창밖을 내다보는 한 소년이 있다. 그를 아는가. 나는 그를 알고 있다.


렛미인 1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 지음, 최세희 옮김, 문학동네(2009)


태그:#렛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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