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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필자는 주위에서 정말 죽은 사람 소원을 들어줬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대부분 번지르하게 말만 해댈 뿐 남은 자들이 망자의 소원을 들어주려고 노력했다는 소문도, 그런 모습도 보지 못했다. 오늘 필자가 맘먹고 길을 나선 이유는 벌교읍 고읍리 지곡마을에 누워 있는 '한창기'라는 망자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서다.

 

한창기 선생이 묻힌 벌교읍 고읍리 지곡마을에 가다

 

 

지난 1997년 2월 3일, 순우리말 잡지 <뿌리깊은 나무>로 유명한 한창기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62세, 그가 병상에서 남긴 마지막 말은 "나 세상에 와서 한 일 별로 없으니 장례식이니 뭐니 시끄럽게 하지 말고 그저 거적 한 장에 말아 인적 드문 곳에 조용히 묻어 달라"는 부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산골 고향마을에서 치러진 그의 장례식에는 전국의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이 참석해 징과 꽹과리를 치면서 밤을 하얗게 지새웠고 그의 시신은 꽃상여에 태워져 부모의 묘소가 있는 뒷동산 양지바른 곳에 묻혔다.

 

그가 세상에 와서 한 일이 그 누구보다 많았기에 '시끄럽게 하지 말고 그저 거적 한 장에 말아 인적 드문 곳에 조용히 묻어 달라'는 그의 부탁은 깨지고 말았지만 이와 동시에 평소 '낙안읍성 읍장'이 돼 보고 싶다는 그의 소박한 꿈도 함께 묻히고 말았다.

 

파란 잔디가 눈부신 무덤은 조용했고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서슬 퍼런 70년대 유신 독재시절, 사회 곳곳에 남아 있는 일제의 흔적을 지우고 전통문화와 얼을 되살리고자 노력한 그의 흔적은 빛바랜 <뿌리 깊은 나무>와 <샘이 깊은 물>, <한국의 발견> <뿌리 깊은 민중의 자서전> 등의 책자에만 남아 있다. 미친놈처럼 그의 얘기를 한마디라도 들어보기 위해 무덤가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어찌 망자가 말을 할 수 있겠는가? 필자가 무덤에 와서 망자가 들려주는 얘기에 귀를 기울여 보고자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남은 자들의 말, 산 자들의 말을 들어보기 위해 "한창기 선생님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묻고 있었던 것이다.

 

산자들은 한창기를 이렇게 말한다

 

 

한창기 선생을 한마디로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전통을 지독히 사랑한 사람" "서민의 삶과 민중을 사랑한 사람"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에 이견이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걸어왔던 인생 절반 이상은 '전통과 서민과 민중과는 다소 거리감'이 있다.

 

그는 엘리트 중의 엘리트만 다닌다는 서울대 법대를 나온 수재다. "그와 같이 영어를 잘 구사하는 인물을 만나보지 못했다"는 한 외교관의 말처럼 그는 영어에도 도통했으며 미군들을 상대로 사업을 했고 순 영어로 된 브리태니커 사전을 한국에서 밀리언셀러로 만들만큼 사업수완도 뛰어나 수십 년 동안 많은 돈도 거머쥐었다.

 

그런 그가 '왜 기득권과 손을 잡지 않고 민중의 삶을 돌아보게 됐을까' 하는 것은 그만이 아는 일이겠지만 새마을운동으로 출발하여 갈수록 변형돼갔던 박정희식 우리 것에 대한 소리 없는 저항을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해석을 내려 볼 수 있다. 물론 전라도의 피가 그 밑바탕에 깔려 있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이어진 80년대 신군부 정권이 <뿌리 깊은 나무> 잡지를 폐간시킴으로써 그가 더욱 깊이 '우리 것을 찾기 위한 숲'으로 빠져들었을 것이라 짐작되며 그 저항은 <샘이 깊은 물>이라는 여성 전문 잡지를 발간하면서 본격화 됐음이 분명하다. 이어 <한국의 발견><뿌리 깊은 민중의 자서전> 등은 그의 저항정신의 완성편이라 할 수 있다.

 

누구나 한번쯤 접했을 그의 혼이 담긴 전무후무한 잡지와 서적들. 책 표지에서부터 소름 돋게 다가오는 전율은 그가 아니면 만들어 내기 힘든 토속적 저항의 작품들이었다. 군부독재가 짓밟아버렸지만 그가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했고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들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독자들 마음속에 녹아 있다.

 

소리 없는 저항으로 반평생 우리 것만을 쫓아 다녔던 고 한창기 선생. 그가 잡지를 통해 토해내는 '한국의 얼'은 잃어버렸던 우리의 정체성을 시시각각 깨우쳐줬고 우리를 날마다 새롭게 변신하게 했는데 그것은 우리 가슴 속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되새김질하는 변신이었다.

 

이런 그를 백과사전 인물 편에서는 이렇게 기술해 놓고 있다. '한창기는 제국주의 일본의 잔재를 미처 털어내지 못하고 있던 한국 출판물의 내용과 형식에 진정한 근대성과 주체성을 부여한 최초의 출판 언론인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출판활동을 통해 전통문화의 보존과 계승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에 평생을 바쳤다.'

 

남은 자들은 한창기를 이렇게 말한다

 

 

한창기 선생은 1936년, 전라도 촌 동네인 벌교읍 고읍리 지곡마을에서 태어났다. 순천중학교와 광주고등학교, 서울대 법대를 거쳐 이후 긴 서울 생활로 이어지면서 벌교읍 고읍리 지곡마을은 그저 탯자리로 어린 시절 잠시 머물렀던 공간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그는 인생 늘그막에 다시 고향 주변으로 돌아왔고 전통문화마을을 만들고자 애썼다.

 

한창기 선생이 80년 후반에 전통마을을 꿈꾸며 자리 잡은 곳이 바로 벌교읍 징광마을이다. 징광마을은 한창기 선생의 고향 마을인 지곡마을에서 차로 10여 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가까운 곳으로 약 400여 년 전인 1680년경까지 징광사라고 하는 유명한 절이 있었는데 폐사됐던 절터마을이다.

 

당시 마을 모습은 이미 폐사된 지 수백 년이 넘은 징광사였기에 유물의 존재 여부는 유야무야했다. 또 개발되지 않은 오지의 조그만 마을이었기에 자연 속에 남겨진 부분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만 남아 있을 뿐 폐사지 상당 부분은 마을 주민들의 집터로, 논과 밭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지역민들이 한창기 선생에 대해 수군대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는 대목이기도 한데 그가 징광사지에 터를 잡은 것을 '징광사지 훼손'으로, 차밭 등으로 가꾸면서 지반을 흐트러 놓은 것을 '문화재 반출이 있지 않았냐'는 의심으로 말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부분에 관해서는 이미 훼손된 이후에 한창기 선생이 자리를 잡았다는 주장과 한창기 선생이 와서 훼손했다는 측으로 분명한 이견이 갈리기에 좀 더 지켜볼 일이다. 하지만 그 불똥이 낙안읍성 옆에 자리를 잡고자 했던 가칭 고 한창기 박물관으로 튀어 5년째 공사가 중단된 것은 물론 결과적으로 한창기라는 이름은 사라지고 시립박물관으로 변경되고 말았으며 그의 꿈인 낙안읍성 읍장 또한 물거품으로 남게 됐다.

 

망자의 소원은 세 가지, 그 중 하나라도 이뤄주기 위해

 

 

한창기 선생이 박정희식 우리 것에 대한 저항으로 '뿌리 깊은 나무'를 심어놓고, 전두환의 민중 말살에 대한 저항으로 '샘이 깊은 물'을 파 놓은 것은 산자들이 평가하고 기리는 그대로라지만 전통문화마을을 짓고자 하고, 자신의 박물관을 세우고자 하고, 그리고 낙안읍성 읍장을 해 보고자 한 그의 세가지 소원에 대한 남은 자의 평가가 과연 옳았는지는 쉽게 확신이 서지 않는다.

 

한창기 선생이 삶을 달리한 지 12년이 지난 지금, 필자 또한 산자가 아닌 남은 자로서 <낙안군 101이야기>에 망자의 이름을 그의 평소 소원대로 낙안읍성 읍장으로 새겨놓기 위해 무덤에서 그를 모셔와 잠깐이나마 읍장의 자리에 세워놓는다.

 

낙안군과 낙안군 폐군(廢郡) 
현재의 순천시 외서면을 비롯해 낙안면, 별량면 일부, 보성군 벌교읍 그리고 고흥군 동강면, 대서면 일부의 땅은 옛 낙안군이었다. 하지만 101년 전인 지난 1908년 10월 15일, 일제는 항일투쟁무력화, 동학혁명진원지분산, 침략거점도시화를 위해 낙안군 자체를 없애버리고 주민들을 인근 지역 세 곳으로 강제 편입시켰다.

덧붙이는 글 | 예고: [09-032] 소설 태백산맥 문학관을 가다
남도TV


태그:#낙안군, #남도TV, #한창기, #벌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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