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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랑천의 왜가리

외발로

서 있다가,

낚시꾼 앞에 가서

머리를

갸웃거리다가,

수면에 한 획을 그으며

살아가는

저 필법!  -14쪽, '왜가리 필법' 모두

 

김삼환은 시조와 시를 함께 쓰는 시인이자 금융인이다. 그는 1958년 전남 강진에서 태어나 1992년 나이 서른넷에 시조로, 1994년 나이 서른여섯에 시로 문단에 나왔다. 그가 대부분 20대에 문단에 나오는 여러 시인들에 비해 조금 늦게 문단에 나온 것도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줄곧 금융인으로 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문학과 전혀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었던 몇몇 문학인들에 비해 행복한 직장생활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금융인으로 일하면서도 시인이 되고 싶었던 그가 일하는 외환은행에는 시인 김광림과 김영태, 이상범 등 문단을 주름 잡는 이름 난 시인들이 함께 일하며 등을 다독여 주었기 때문이다.

 

시인 김삼환. 글쓴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 6일(목) 낮 1시30분, 을지로 2가에 있는 외환은행 본점 커피숍에서였다. 박몽구 시인과 함께 만난 그날 시인 김삼환은 "은행에서 일하면서 시를 쓴다는 게 좀 그렇다"며 "등단하기까지 너무 시간이 오래 걸려 한때 시인이 되기를 포기하려 한 적도 있었다"고 말하며 잔잔한 미소를 흘렸다.

 

 

사막에서 물을 마시지 않아도 잘 버텨내는 낙타처럼

 

"강물이 아프다고 말하지 않는 것은 / 속 깊은 상처 아물어 / 생살 돋을 때까지 / 제 속에 산 그림자를 껴안고 있기 때문이지 // 바위가 아프다고 말하지 않는 것은 / 속으로 울음 울어 / 불길 잡힐 때까지 / 거인이 앉았던 자리에 가득한 고요 때문이지"-31쪽 '거인의 자리'모두

 

지금 외환은행 국제전자센터 지점장으로 일하고 있는 시인 김삼환(51)이 다섯 번째 시집 <왜가리 필법>(시선사)을 펴냈다. 이번 시집에는 대자연을 사람살이로 끌어들이는 시들과  "삶은 결국 흔들리며 걸어온 궤적 태우는 일"(변명에 관하여)처럼 아무리 몸부림쳐도 고달프기만 한 삶의 파편들이 욱신거리는 사랑니처럼 박혀 있다. 

 

제1부 '왜가리필법'에 실린 그릇, 버려진 구두, 왕거미 관찰법, 제2부 '새가 날아오는 집'에 실린 움직이지 않는 거울, 인수봉 아래 개미들이 산다, 쓸쓸한 노숙, 제3부 '따라비오름에서 물매화의 신음소리 엿듣다'에 실린 소문, 젖은 상처 말리며, 제4부 '석탑 왼편에 서서'에 실린 밤고구마를 캐면서, 저 홀로 가는 섬 등 80편이 그것.

 

시인 김삼환은 "사막에서 물을 마시지 않아도 잘 버텨내는 낙타처럼 황량한 바람이 부는 들판 가운데 듬성듬성한 언어로 지어놓은 초막에서 나도 한동안 목마름을 견뎌야겠다"고 말한다. 이는 아마도 그가 비록 금융업에 종사하고 있긴 하지만 이 고된 세상살이에 대해 나 몰라라 하지 않겠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다. 

 

이 세상은 욱신거리며 티를 내는 사랑니

 

이제 내 사랑니를

뽑아야 할까 부다

마음속의 빈자리를

더 채울 수 없는 나이

사랑이 끝나 간다며

욱신욱신 티를 낸다 -29쪽, '사랑니' 모두   

 

시인 김삼환은 앓고 있다. 이 시에서 말하는 사랑니는 자신이 덧없이 늙어가는 삶에 대한 화두이자 이 세상을 품기 위한 밑그림이다. 시인은 자신과 이 세상에 대한 "마음속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사랑니를 뽑지 않고 끝까지 지키고 있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그 무엇 하나 제대로 채워지지 않고 세월만 자꾸 덧없이 흘러간다.

 

날아갈수록 살아갈 날들도 점점 줄어들기 시작한다. 고달픈 이 세상을 향한 사랑도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자꾸만 흐릿해지기 시작한다. 그때 문득 자신과 이 세상을 위해 애인처럼 꼬옥 품고 있었던 사랑니가 욱신거린다. 사랑니마저도 이젠 어서 나를 뽑아달라고 욱신욱신 티를 내는 것만 같다. 

하지만 시인은 사랑니를 뽑을 수 없다. 사랑니를 뽑는 순간 스스로 일군 삶의 정체성과 이 세상을 향한 화두마저 송두리째 뽑혀나갈 것만 같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사랑니를 끝까지 품고 갈 수도 없다. 시인이 사랑니를 뽑아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은 곧 욱신거리는 이 세상을 향한 새로운 시작을 뜻하는 것은 아닐까.    

 

어머니 조건 없는 사랑 흉내만 내고 있는 맛없는 세상

 

찰진 반죽 손끝으로

거친 삶을 이겨 넣는

어머니의 손금 주름,

그 맛 들지 않고서는

고개를 갸웃거려도

새는 웃음,

아내여

 

-50쪽, '팥죽 반죽' 몇 토막

 

어느 날, 시인은 어머니 손맛이 담긴 그 맛난 팥죽을 먹고 싶어 아내에게 부탁한다. 시인의 아내는 "팥물을 잘 걸러야 / 팥죽 맛이 깊은 법"이라며, 삶은 팥을 잘 으깨 팥물을 걸러내 팥죽을 쑨다. 하지만 아내가 정성 들여 쑨 그 팥죽은 어머니 손맛이 담긴 그 맛이 나지 않는다. 그저 겉으로 흉내만 낸 것 같은 "맛, 멋, 삶"이다.  

 

시인은 팥죽을 먹으며 생각한다. 어머니 손맛이 나는 세상(팥죽)을 쑤려면 어머니 사랑이 듬뿍 배인 "찰진 반죽 손끝으로" 어머니 "거친 삶을 이겨 넣는 / 어머니 손금 주름"이 있어야 한다고. 가족에 대한 어머니의 끝없는 사랑과 어머니 거친 삶과 어머니 눈물 젖은 세월까지 함께 들어 있어야 제대로 된 "맛, 멋, 삶"을 쑬 수 있다는 것이다. 

 

시인 김삼환은 힘겹지만 그래도 모질게 살아내야 할 이 세상살이를 어머니에 비유하고 있다. 이 시에서 어머니가 쑤어주는 팥죽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는 조건 없는 사랑이다. 하지만 시인이 바라보는 이 세상은 마치 아내가 쑤어준 팥죽처럼 모든 것을 흉내만 내고 있는 정말 맛없는 세상이다.

 

이빨 빠진 사기그릇에도 뜨거운 국밥 말 수 있다

 

단단한 묵은 땅을

살살 달래었지

할 말을 삼키면서 마른 뿌리 살찌워서

벗은 몸 다 보여줘도

부끄럽지 않을 것

 

-86쪽, '밤고구마를 캐면서' 몇 토막

 

시인은 고구마밭에 가서 밤고구마를 캐면서 다시 한번 이 세상살이를 깊숙이 가늠해본다. 묵정밭 한 귀퉁이에서 자라고 있는 밤고구마도 제 올곧은 삶을 위해 "옆으로 뻗어볼까 / 땅 속 깊이 내려설까" 순간순간 고민했을 거라며, 결코 이 세상살이를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고 마음을 꼭꼭 다진다.   

 

시인의 눈에 비치는 밤고구마는 살아남기 위해 "큰 돌이 막아서면 / 몸 비틀어 우회"하며 안으로 다지고 다져 한 매듭을 풀던 흔적을 남긴다. 이 세상살이도 밤고구마처럼 그렇게 "단단한 묵은 땅을 / 살살 달래"며 "할 말을 삼키면서 마른 뿌리 살찌워"야 내 가진 모든 것 다 보여주어도 부끄럽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김삼환 시인이 바라보는 세상살이는 이 시집 곳곳에 밤고구마처럼 튼실하게 뿌리내리고 있다. "이빨 빠진 사기그릇에도 / 뜨거운 국밥 말 수 있고"(그릇)라거나 "한 생애 가파른 삶 / 가는 줄에 얹어놓고"(왕거미 관찰법), "삶의 무게 견딜 수 없어 온 몸 데어본 적 있는가"(굴 구이를 먹다), "푸름 속에 섞여 있는 마른 풀이 더욱 빛나듯"(마른 풀이 더욱 빛나듯) 등이 그러하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박몽구는 "김삼환은 먼저 시인이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사물들을 즐겨 다루고 있으면서 그 안에 은폐되어 있는 의미를 탐구하려는 시선이 오롯하다"며 "무표정하게 놓여 있던 바위가 조각가의 오묘한 손길에 닿으면 신비로운 작품으로 거듭나듯, 시인의 영혼을 거치면 낮은 자리에 무의미하게 던져져 있던 사물들이 새롭게 단장한 채 말을 걸어온다"고 평했다.

 

시인 정수자는 이 시집 작품해설에서 "형식과 더불어 농익은 작품들이 깊은 서정적 울림으로 독자를 당긴다"라며 "삶의 여러 층과 결을 읽어내는 진솔한 목소리와 표정들은 넓은 진폭을 거느린다. 새삼스럽게 깨달은 일상의 무게와 균열, 멈칫거리는 내면 풍경도 긴 여운을 남긴다"고 말했다.

 

시인 김삼환은 1958년 전남 강진에서 태어나 1992년 <한국시조> 신인상, 1994년 <현대시학>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적막을 줍는 새> <풍경인의 무늬여행> <비등점> <뿌리는 아직도 흙에 닿지 못하여>가 있다. 2005 제15회 한국시조작품상을 받았으며, 지금 외환은행 국제전자센터 지점장으로 일하고 있다. <역류> 동인.

덧붙이는 글 | <유포터>에도 보냅니다


왜가리필법

김삼환 지음, 시선사(2009)


태그:#시인 김삼환, #왜가리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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