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역사는 흐른다!' 그러나 그 흐름에 그냥 내맡기는 것은 역사적이지 못하고 문화의 길도 아니다. 그 흐름의 결을 살펴 그 방향을 가늠해야 반문명의 혼돈을 피해갈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세운 얼개에 살을 더하고 피를 흐르게 하여 피워낸 것이 바로 문화의 꽃이다.

조선왕조실록과 더불어 전주사람들이 지켜낸 유일한 태조 어진, 전주 자부심의 원천이기도 하다.
▲ 태조어진 조선왕조실록과 더불어 전주사람들이 지켜낸 유일한 태조 어진, 전주 자부심의 원천이기도 하다.
ⓒ 이종민

관련사진보기


우리가 자부하는 전주 문화의 근저에 경기전의 역사가 있다. 유교 철학을 국가이념으로 실천하겠다는 의지가 그 뿌리를 이루고 있으며 가파른 전란 속에서도 그것을 지켜낸 숭고한 결기가 이곳 그윽한 한옥처마에 서려 있다. 그래서 조선 회화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태조어진과 임진왜란 이전 조선 전반기 역사를 고스란히 지켜낼 수 있었다. 이 자랑스러운 역사에 힘입어 찬란한 서화, 인쇄, 한지의 문화가 피어났다. 그 자부심에 기대어 한옥, 한식, 판소리 등 전통문화의 맥을 이 '실용'의 시대까지 이어올 수 있었다.

이곳에 이르는 사람은 모두 말에서 내리시오. 잡인은 출입을 삼가하시오. 이곳이 매우 성스러운 곳인지를 말해주는 표석.
▲ 경기전 하마비와 정문 이곳에 이르는 사람은 모두 말에서 내리시오. 잡인은 출입을 삼가하시오. 이곳이 매우 성스러운 곳인지를 말해주는 표석.
ⓒ 이종민

관련사진보기


그 경기전이 내년이면 600주년을 맞이한다. 60 회갑이 열 번이나 거듭한 것이다. 경사스런 터에 경사가 났다. 그러니 손 개고 있을 수는 없는 일! 그 경사와 위엄에 걸맞은 잔치를 준비해야겠다. 어서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마침 내년에 어진유물전시관도 준공될 것이니, 이때에 즈음하여 그 품격에 어울리는 국가적 차원의 축하행사를 마련해나가자는 것이다.

우선 경기전의 위격에 맞는 조처들이 선행되었으면 좋겠다. 시립박물관을 거쳐 시민공원으로 이어지면서 슬리퍼에 잠옷 차림으로 들락거려도 되는 곳으로 전락해버린 슬픈 역사부터 정리해야 한다. 경기전 뜨락이야 자유스러운 휴식공간으로 계속 활용해도 무방하지만, 적어도 삼문 안쪽의 제례 공간만은 일정한 예를 갖추었을 때에, 전문가의 안내를 받으며 돌아볼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 종묘와 비슷한 위격을 갖춘, 그래서 종묘제례악이 연주될 수 있는 귀한 공간의 품위를 우리 스스로 떨어뜨리는 일이 더 이상 되풀이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태조어진을 모신 정(丁)자 모양의 전(殿), 최근에 보물로 지정되었음.
▲ 경기전정전 태조어진을 모신 정(丁)자 모양의 전(殿), 최근에 보물로 지정되었음.
ⓒ 이종민

관련사진보기


이 경사스런 터에 대한 제대로 된 안내도록의 발간도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일이다. 외국인 관광객을 위해서도 그렇지만 아직도 단순 휴게 공간 정도로 여기고 있는 내국인, 심지어 전주시민들을 위해서도 시급한 일이다.

또 하나 이곳에 대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연구도 제안하고 싶다. 어떤 철학과 사상을 근거로 조성된 공간이며 건축에는 또 어떤 미학이 배어 있는지, 전주사고와 그것이 지켜낸 조선왕조실록의 역사문화적 의미는 무엇인지, 등에 관한 전문적 연구보고서가 기록의 차원에서도 이제는 필요한 것이다. 또한 1872년(고종 9년)에 있었던 '세초매안'(洗硝埋安)의 실상도 철저한 발굴조사를 통해 밝힐 일이며 조경묘가 조성된 사연과 근대 일제에 의한 훼손의 역사, 최근의 부끄러운 일까지도 체계적으로 정리해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조선 선조이전의 역사를 고스란히 지켜낸 전주사고의 모습
▲ 전주사고 조선 선조이전의 역사를 고스란히 지켜낸 전주사고의 모습
ⓒ 이종민

관련사진보기


잘못된 역사를 되풀이하거나 소중한 역사를 제대로 계승하지 못하면 문화의 장래는 무망하다. '실용'이라는 명분을 내세운 돈의 이전투구만 난무하여 문화는 애당초 그 싹을 기대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법고창신(法古創新)! 경기전 역사를 거울삼은 600주년 기념제전이 흔들리는 '전주다움'을 되살리는 귀한 기회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전북일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경기전, #전주, #전통문화, #태조어진, #조선왕조실록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는 전주를 가장 한국적인 도시, 우리의 자랑스러운 전통문화가 살아숨쉬는 곳으로 만들어 가기 위해 애쓰고 있는 사람입니다. 오마이유스를 통해 우리 전통문화의 아름다움과 살기좋은 전주의 모습을 홍보하고 싶습니다. 아울러 제가 친구들에게 이메일을 통해 보내주는 음악편지도 연재하고 싶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