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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무지 들판이 온통 달맞이꽃 세상이다. 밤새 달맞이 피어나 언덕배기마다 노랗게 물들어 있다. 태평양을 넘어와 한국의 둥근 달과 촌부들이 좋아 그대로 주저앉아 귀화 꽃이 되었다는 달맞이꽃, 저녁에 피어나 아침에 입을 다문다. 해를 따라 아침에 눈을 뜨고 저녁에 지는 해바라기나 채송화들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살고 있다.

 

달맞이가 꽃물을 터뜨릴 땐 온 몸이 분해 작용을 한다. 잎은 어긋나 뾰족한 창 모양이다. 잎 가장자리엔 톱니가 박혀 서늘한 모습으로 꽃대를 바치고 있다. 꽃은 겨드랑이 속을 간질이며 노랗게 피어난다. 꽃이 피면 잎은 보조개가 폭폭 파이고 머리는 빗질을 하며 양쪽으로 갈라진다.

 

무더위로 뒤척이다 잠을 잘 수 없어 달맞이꽃 구경을 나간다. 요즘엔 꽃이 귀한 때이므로 달빛아래 노란 꽃을 보며 은은한 향기를 맡노라면 더위가 금세 달아나버린다. 둥근 달은 구름 속에 숨었다 나타났다 달맞이 속마음을 단단히 태우고 있다. 그러나 달맞이꽃들은 달빛을 따라다니며 밤새도록 노란마음을 한없이 열어놓는다.

 

달맞이 꽃 언덕 빼기에 밤이 깊어가고 있다. 무수히 쏟아지는 별빛, 온 세상을 작정 없이 비추고 있는 교교한 달빛, 함초롬히 적셔오는 밤이슬, 언덕을 스쳐가는 시원한 바람, 키가 훌쩍한 달맞이 꽃대를 문득문득 일으켜 세우는 소쩍새 울음, 그때마다 눈을 부비며 무수히 피어나는 달맞이꽃들의 작은 숨소리에 여름밤이 깊어가고 있다. 달착지근한 향기와 노란꽃물이 쏟아내는 한밤중의 유혹 앞에 정신을 빼앗기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칠레가 고향인 달맞이도 이곳 산 속에 묻어 들어와 수십 년을 살다보니 강원도 참깨를 닮았다. 참깨 꽃, 태평양을 건너온 사연을 알 리 없는 우리 동네 촌부와 아낙들은 그저 깨꽃이라 부른다. 참깨 꽃이 하얗게 물이 오르고 여름 밤 깊어 갈수록 촌부들도 깨가 쏟아지던 지난날을 돌아보며 여름밤 무더위를 씻어 내린다.

 

별나라 처녀들은 별만을 사랑해야 한다. 신분이 다른 달이나 해에게 한눈을 팔다간 벌을 받고 동네에서 쫓겨난다. 어느 날 저녁, 별 처녀 하나 갑자기 별나라가 싫어지고 따분한 생각이 들었다. 별보다 훨씬 훤칠하고 둥근 얼굴의 달님을 그리워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별이 떠 있는 밤에도 달만을 떠올렸다.

 

달 속의 달, 미남중의미남인 '아르테미스'와 눈이 맞았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아르테만 생각했다. 사실을 눈치 챈 별 요정 하나가 샘이나 제우스신에게 일러바쳤다. 아르테를 사랑한 죄로 별 처녀는 괘씸죄에 걸려 별도 달도 없는 허허 벌판으로 쫓겨났다. 아르테를 찾아 몇 날 며칠 산과 들판을 헤맸지만 아르테는 나타나지 않았다. 달님을 기다리다 여위어 죽어갔다.

 

잘못을 깨달은 제우스신은 별 처녀에게 '달맞이'란 이름을 붙여주고 달을 사랑하고 꽃도 피우라 했다. 달맞이꽃은 달이 없는 밤이나 비가 내려도 행여 달님의 모습이 보일까 밤마다 들판과 언덕을 헤매며 노란 꽃물을 피워내고 있다. 서럽도록 시리게 노란 꽃으로 승화한 별 처녀, 오늘밤에도 달을 찾아 긴 여행을 떠난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달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그래서일까, 달맞이의 꽃말은 '기다림'이다.

 

내게도 설운 사랑 하나 있었다. 지금도 달맞이꽃을 보면 싱그럽고 풋풋했던 어린 시절, 꽃처럼 왔다 별처럼 사라져간 달 같은 분위길 풍겨내던 어린 소녀가 그리워진다. 유난스레 얼굴이 희고 수심이 가득했던, 달무리 진 하늘을 보며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 같던, 서늘하고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달빛을 하나 가득 담아내던 소녀가 세월 속으로 되살아나온다. 나이가 얼마인데 달 속에 파묻혔던 추억을 끄집어내다니 달맞이도 낯이 뜨거워 그만 입술을 다물어버린다. 

덧붙이는 글 | 다음카페 '윤희경의 산촌일기'에도 함게합니다. 쪽빛강물이 흐르는 북한강 상류를 방문하면 농촌과 자연을 사랑하는 많은 임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윤희경 기자(011-9158-8658)는 지난 4월 포토에세이, 산촌일기 "그리운 것들은 山 밑에 있다.'를 펴낸 바 있습니다. 유명서점과 인터넷에서 판매 중이며 직접 연락 주어도 배송이 가능합니다. 


태그:#달맞이꽃, #귀화꽃, #월견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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