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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그 이름 석 자를 적고 빈 바탕에 깜박이는 커서를 한참동안 멍하니 쳐다본다. 7월 10일, 어느덧 49재. 봉하 마을엔 2만여 명의 추모객이 떠나는 그에게 작별을 고했다.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고 했던가? 하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이 많아서 이젠 무덤덤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난 5월 23일 오전, 그의 서거 소식을 접하곤 한동안 요동치던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다. 무엇이라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키보드에 손을 얹었다 떼기를 여러 번. 결국 아무 것도 쓸 수 없었다.

 

그는 유서에 "책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고 썼는데, 나는 그 때문에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가 없었다. 그에 관해 무수하게 반복적으로 쏟아지고 있는 뉴스를 보며 무슨 말을 더한다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저 죽음 앞에 깊은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이, 그에 대한 내 애도의 전부가 아닐까라고 생각하며 그의 죽음의 의미를 내내 고민했다.

 

스무 살에 만난 나의 첫 대통령 

 

2002년 12월 19일은 잊을 수 없는 날이다. 대한민국의 16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던 날. 당시 스무 살이던 난 태어나서 처음으로 투표권을 행사하게 된다는 것이 너무 좋아 쉽게 잠들 수 없었다. 무엇보다 찍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신분증과 선거관리위원회에서 보내준 우편물에서 선거인 명부 등재번호도 곱게 오려 침대 맡에 두고 한참을 만지작거리다 잠든 기억이 난다.

 

평소에는 깨워도 잘 일어나지 못하는 아침잠 많은 내가, 엄마가 깨우지 않았는데도 벌떡 일어나 채 눈곱도 떼지 않은 채 투표소로 갔다. 망설임 없이 도장 콕 찍으니 끝나버린,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싱거웠던 투표였지만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개표방송을 보면서는 또 얼마나 마음을 졸였던가. 그의 당선은 그 어떤 버라이어티 쇼보다 재밌었다. 그러나 거기서 내 역할은 끝. 투표만 하면 민주시민이 되는 거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나의 정치적 책임은 빈약했다. 그 밖의 정치는 어렵고 재미없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의 업적 중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되는 권위주의의 해체는 그래서 신선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어렵게 말하지 않았다. "대통령 못 해먹겠다", "이쯤 되면 막 가자는 거지요?" 등 그가 여론을 통해 쏟아내는 말들은 늘 수많은 정치적 논란을 물고 왔으나 화끈하고 솔직했으며 쉬웠다. 그는 정치를 '국민스포츠'로 만들었다. 지금과 달리 좌우를 막론하고 대통령을 욕하는 것이 '국민스포츠'였던 시절이었다. 물론 나 또한 그 스포츠를 팔짱끼고 관전한 '관중'의 한 사람이었다.

 

처음으로 물대포를 맞던 날 펑펑 울다

 

 

그가 약속했던 4대개혁은 결과적으로 실패했고, "반미 좀 하면 어떠냐"고 말하더니 이라크 파병을 결정했다. 비정규직이 양산되고, FTA를 충분한 의견수렴 없이 목매단 것은 또 어떠한가. 헌정사상 유례없는 탄핵소추나 4년 중임제 논의는, 그보다 더 중요했던 민생문제를 뒷전으로 한 채 국민들을 배제시켰다. 나는 대선 전 그가 했던 사회적 약자에 대한 수많은 약속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접었다. 혼란스러웠다.

 

2005년 뒤늦게 선택한 대학진학에서 주저 없이 정치학을 택한 것도 그 덕분이다. 노무현에 대한 답을 구하고 싶었다. 보다 정확하게 정치를 바라보고 싶었다. 지금은 탈당했지만, 오랫동안 고민해 한 정당의 진성당원으로 가입하기도 했다. 투표만이 민주시민의 역할이 아니라는 일종의 자각에서 온 결단이었다. 그렇게 대학 와서 처음으로 나이어린 선배들을 좇아 '데모'라는 걸 경험하기도 했다.

 

어떤 내용의 집회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헌법에 보장된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믿었다. 참 세상 몰랐다. 초겨울의 쌀쌀한 거리에서 집회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절박함을 노무현 대통령이라면 이해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그 날, 물대포라는 것을 맞았다. 전경의 방패가 바닥을 쿡쿡 찍으며 위협적으로 달려오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자빠지기도 했다.

 

추워서 덜덜 떨리는 몸보다, 넘어져서 깨진 무릎보다 아팠던 건 마음이었다. 집에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내내 울었다. 내가 사랑하는 노무현 대통령이 '최후의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을 범법자로 대한다'는 일종의 배신감이었다. 

 

한국적 상황으로 국한하자면, 그는 일부 언론들이 재임기간 내내 맹렬히 공격했던 것처럼 '친북좌파'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정작 그를 필요로 했던 사람들에게는 '너무 먼 당신'이었다. 그가 당선 전 쏟아냈던 공약이나 민주주의에 대한 고뇌와는 별개로,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모호한 수사의 정치는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었다.

 

나는 그가 '서민 대통령'이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의 정치적 동지였던 386은 이미 우리사회의 기득권이었고, 그들에게 분명 서민은 없었다.

 

그가 바라던 세상을 위해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1936년 재선 선거운동을 하고 있을 당시, '내가 당신에게 표를 주면, 이러이러한 일들을 해야 한다'고 말한 유권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에게 루즈벨트는 답한다. "내가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당신이 하도록 해줘야 한다"고.

 

이제는 그에게 걸었던 기대가 그 홀로는 절대 이룰 수 없는 일이었음을 깨닫는다. 대통령은 슈퍼맨도 신도 아니다. 그의 이상을 실현하기에 이른바 '민주공화국'의 시민들은 직선제 성취에 취해 '절차적 민주화'에서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그는 역대 대통령들과 마찬가지로 '실패한 대통령'으로 평가됐지만, 거기엔 분명 내 몫의 책임도 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자신의 홈페이지 사람 사는 세상을 통해 "저를 버리셔야 합니다"라고 적었다. 그가 옳다. 우리의 진정한 추모는 그를 버림으로써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토록 고민하던 민주주의는 단순히 그를 추모하는 것으로 오지 않는다.

 

평화가 들꽃처럼,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기 위해서는 우리의 눈물이 보다 낮은 곳으로 흘러야 한다. 용산으로, 평택으로, 우리의 역할이 필요한 곳은 생각보다 너무 많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바라던 세상이라고 생각한다.

 

'부족한 그대로 동지가 되기 위해' 이제 나는 그를 버림으로써 잊지 않고 오래 기억하려 한다. 잘가요, 나의 영원한 첫 대통령. 다시는 물을 수 없는 안부, 그저 내내 편안하시기를….

 


태그:#노무현, #49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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