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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하마을 가는 길

 

언제부터인지 한 번은 봉하마을에 다녀와야겠다는 마음속의 숙제 같은 것을 품게 되었지만 사실 이런 부채감을 느낀 것은 그다지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접하기 직전까지 공공연히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그곳 찾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주변에 단언했던 사람이었으니까요.

 

표현이 적절하지 않을 수 있지만, 소위 '박연차 게이트'에 대한 검찰의 강도 높은 수사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풀이 죽은 채로 "저를 잊어 달라"며 고개를 숙이던 노무현의 모습을 은근히 즐기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비보를 접한 후, 눈물을 흘리며 "왜 ? 그토록 노무현을 미워하신 건지…"라던 친우의 쓰라린 질책을 당하고 나서야, 내가 그동안 비판이란 이름으로 노 전 대통령에게 가했던 가혹한 공격들이 공의를 가장한 사적 감정의 표출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기득권의 일부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여러 번 맞이했으면서도 스스로 가난한 자, 슬픈 자, 억압 받는 자의 편에 선 채로 일평생을 살아 '바보'라고까지 불렸던 그분도 사람인지라 약점이 전혀 없을 수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예리한 양날을 가진 권력이라는 이름의 칼의 진정한 무서움을 몰랐던 어리석고 무지했던 형님이 있었고, 어떤 경우에라도 소중하게 지켜줘야만 할 사랑하는 가족들 그리고 진심으로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준 사람들이야말로 바로 그분의 약점이었습니다. '권력의 시녀' 검찰은 이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었고, 언론은 헤어진 상처를 선동적으로 난자했으며, 비틀거리는 거인의 등 뒤로 저는… 돌을 던졌던 것입니다.

 

지금 시점에서 제가 검찰 수사의 부당함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비판하지 않았다고 자책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오히려 위선이 될 것입니다. 다만 비틀거리는 거인의 등 뒤에 돌팔매질하는 비열한 짓 따위는 백 번 천 번을 돌이켜 생각해도 하지 말았어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아마 불과 얼마 전까지 "평생 그곳을 찾지 않을 것…"이라던 제가 스스로 봉하마을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될 것 같습니다.

 

봉하마을에서

 

현지에 폭우와 강풍이 분다는 예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정을 1주 연기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여우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 격이 되고 말았습니다. 일행이 봉하마을에 도착한 시각은 7월 7일 오후 2시경. 경남 일원에는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고 사람들이 분향소 주변의 천막이 잡고 있어야 가까스로 날아가는 것을 막을 수 있을 만큼 강풍이 불고 있었습니다.

 

'고인께서는 누구도 원망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노 전 대통령이) 내가 밉기는 정말 미웠나보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습니다. 쓸데없는 상상과 억측 그리고 편견이 가져온 비극의 현장에서도 이런 엉뚱한 생각이나 떠올리고 있다니, 미안함과 고마운 마음을 함께 담아 고인의 영정에 정성껏 분향하고 오체투지 했습니다. 몸을 돌려 빠져나오려는 순간 누군가가 통곡하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 얼핏 눈에 스쳐 자세히 바라보니 그것은 내리는 빗줄기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커다란 초상화가 빚어낸 착각이었습니다.

 

폭우 속에 희뿌옇게 보이는 봉하산엔 폭포수가 맹렬하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원래 저기 폭포가 있었나요?" 누군가가 묻자 "폭포가 아니라 비가 많이 와서 그래요. 계곡 물이 불어난 겁니다." 일행들은 폭우와 강풍으로 정토원 방문을 포기했지만 저는 혼자라도 봉하산에 오르기로 결심했습니다.

 

 

등산로 입구는 온통 빗물에 흘러내린 황토물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방문객의 발길을 가볍게 하기 위해 누군가 산 위에서 쏟아지는 물길을 다른 데로 돌리려고 안간힘을 쏟고 있었습니다.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다가가 "안녕하세요? 수고가 많으십니다"라고 인사를 건네고 보니, 그는 민주당 최고위원인 안희정씨였습니다. 전에 모임에서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한 적이 있어 반가운 마음에 "아… 이곳에 계셨군요?" 재차 물었지만 가볍게 미소만 흘린 채 고개만 숙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다시 몸을 숙여 물길을 틀기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었습니다. 한 손에는 우산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있어 손을 거들 수도 없는 형편이어서 더 이상 번거롭게 하지 않기로 하고 등을 돌렸습니다.

 

노무현의 사람으로 알려진 안희정. 하지만 지난 대선 과정에서 민주당 후보를 지지하고 선거 이후에도 민주당에 잔류하여, 일부 노무현 지지자들로부터 '노무현을 배신하고 최고위원 감투를 썼다'는 비난을 받았던 안희정씨가 폭우 속에서 황토물과 씨름을 벌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영화 <미션>(The Mission. 1986)의 주인공 멘도사(로버트 드 니로)가 질투심 때문에 동생과 아내를 살해하고 이구아수 폭포 아래서 자학하던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아니, 어쩌면 폭우 속에서 굳이 봉하산에 오르기를 고집하는 저 자신이 더 그러할 테지만요.

 

정토원에서

 

목책으로 계단을 만든 등산로는 험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내리는 비로 인해서 길은 시내가 되어 있었습니다. 중턱에 다다르니 부엉이 바위로 연결되는 나무다리에 경찰의 통제선이 있다는 것 외에 여느 산과 별로 다른 점이 없는 그저 산일 뿐이었지만 감회는 달랐습니다.

 

아니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기는 하더군요. 정토원에 거의 다다른 길목을 지키고 있는 사명대사의 동상이 바로 그랬습니다. 아마 다른 산사 입구에서 이 동상을 발견했다면 '뜬금없이 웬 사명대사?'하며 고개를 갸웃거렸을 터이지만, 한 나라의 대통령을 지내신 분이 정치 보복에 의해 유명을 달리한 지금, 호국 불교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사명대사 상이 이곳을 지키고 있는 것이 우연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토원에 다다르니 폭우 때문인지 참배객은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법당에는 불자들이 배를 올리고 있었고 거센 빗줄기를 온몸으로 맞으며 부동자세로 합장 기도를 올리는 아주머니도 있었습니다.

 

미안해하지 말라, 하지만 반드시 살아남으라

 

부엉이 바위를 바라보며 빠져든 상념은 하산을 하고 돌아오는 여정 내내 이어졌습니다. 자살에 대해 부정적인 제가 노무현 대통령의 투신을 자살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상당히 이례적이지만, 그분의 산화에서 자신의 몸을 버려서라도 부처를 이루려 했던 만적선사의 '소신공양'을 보는 것 같은 감회마저 느껴졌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직후 "고인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세력…" 운운하던 여당 당직자의 언급에 분개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고인에 대한 검찰 수사가 정치적 목적을 띄고 있었고, 언론의 난자가 정치적이었고, 그분의 죽음 자체가 정치 현안인데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니 기가 막힐 수밖에요.

 

고인의 서거는 정치인들에게 당사자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정치인에게는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고 반대로 고인의 덕을 보는 정치인들도 상당수 있을 것입니다. 서거 사태가 정치 행보에 걸림돌이 되는 정치인들이야 당연히 자신의 궤적을 돌아보고 반성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반면 서거로 인해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됐거나 정치적 이득을 얻게 된 사람들은 고인에 대해 겸연쩍은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구요? 그분은 바로 당신들이 정치적으로 덕을 보길 바라고 자신을 희생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화 <얼라이브>는 안데스의 만년설에 불시착한 비행기에서 6개월을 살아남은 럭비선수들의 실화를 담았습니다. 그들이 먹을 것이 없는 만년설에서 기나긴 겨울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동료의 시신을 양식으로 먹었기 때문입니다. 살아남기 위해 친구의 살을 먹어야 한다는 것….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죽어가는 친구는 살아남은 친구들을 위해 이렇게 말해 줍니다. "내가 죽으면… 내 살을 먹어도 돼!" 이 말은 친구들이 자기 살을 먹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한 배려일 뿐 아니라 '너희들은 반드시 살아남으라'는 망자의 소원인 동시에 명령이기도 한 것입니다.

 

죽음을 택하기로 결심한 고인께서 과연 무엇을 바라고 계셨을까요? 아마도 고인이 살아 생전에 그렇게 염원했지만 다다르지 못했던 '사람 사는 세상'을 누군가를 통해서라도 기어이 이루기를 바라셨을 겁니다. 살아남은 우리들이 죄책감을 느끼기에 앞서 책임감을 더 크게 느껴야 하는 까닭입니다. 이제 우리 어깨에는 부패한 수구들의 천국인 이 땅을 사람이 살만한 세상으로 바꿔나가야 할 짐이 놓여 있습니다.

 

PS: 기사 중에 민주당 안희정 최고위원에 대해 언급한 부분은 전적으로 필자 개인의 생각을 적은 것입니다. 억측으로 인한 논란이 없었으면 합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겨레와 다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노무현전대통령, #봉하마을참배, #살아남은 자의 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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