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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평전(김삼웅, 시대의 창)
 장준하 평전(김삼웅, 시대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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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8월 17일 오후, 여느 해처럼 폭염이 내리쬐고 있었다."

<장준하 평전>(김삼웅 씀, 592쪽, 시대의 창 펴냄)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 날을 글쓴이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마른하늘의 날벼락이었다'고 썼다. 이날 항일 독립투사이자 '금지된 동작'을 맨 먼저 시작한 혁명가 장준하 선생(1918∼1975)이 유명을 달리했다.

김 전 관장은 평전의 첫 장과 마지막 장을 온통 장준하 선생의 '최후'에 할애했다. '출생'에서 시작하는 다른 인물 평전과 달리 처음과 끝을 '죽음'에 맞추고 있다. 제 1장에서 '풀리지 않은 의문사, 반생의 위업'을 다뤘고, 부록으로 민주당 사인규명조사위원회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보고서 전문을 수록해 놓았다.

박정희 정권은 '장준하 선생이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도평3리 약사봉 등산에 갔다가 하산 길에 실족, 추락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이후 참여정부 시절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조사위원회가 진실규명에 나섰으나 일부 권력기관의 비협조와 자료제출 거부 등의 이유로 '영구미제' 상태에 빠지게 됐다. '중앙정보부 자료 미확보'와 '변사 기록의 폐기' 등으로 '진실규명 불능'을 통보한 것.

하지만 김 전 관장은 평전에서 ''실족사'로 볼 수 없는 10가지 의문점'과 ''거사' 앞두고 신변정리' 등 구체적인 거증자료를 제시한 후 "실족사로 가장하여 모살했을 가능성이 짙다"고 썼다.

"실족사로 가장해 모살했을 가능성 짙다"

장준하 선생의 의문의 죽음에 대해 김 전 관장만큼 자세하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김 전 관장은 장준하 선생의 사고 뒤 수차례 현장을 살펴보았고, 비문을 세우는 일에 참여했다. 한 달 뒤에는 선생이 타계할 때까지 편집위원으로 있었던 <씨알의 소리>(1975년 9월호)에 <약사봉 계곡의 진혼곡>을 기고했다. 김 전 관장은 기고문에서 고인을 "금지된 동작을 맨 먼저 시작한 위대한 혁명가요, 진짜 서민의 지도자였다"고 평가했다. 이 글로 그는 수사기관에 끌려가 치도곤을 당해야 했다.

이어 1983년에는 장준하 선생의 장남과 만나 부친의 사인과 주변얘기를 들은 뒤 '아버지는 암살당했다'는 제목의 원고 정리를 도맡았다. 1993년 9월 민주당에서 구성한 <장준하 선생 사인규명조사위원회>에서 조사활동을 벌였다.

그는 평전을 통해 거듭 말한다.

"개인의 생전의 업적도 업적이지만 암살사건과 같은 반문명적인 범죄행위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이 사건은 철저하게 재조사하여 진상이 규명되어야 한다."

선생의 일대기는 평전의 둘째 장부터 시작한다. 평안북도 의주군에서 태어나 일제의 탄압을 피해 삭주군 청계동으로 이사한 일,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사회의식에 눈 뜨고 브나로드운동에 참가한 일 등을 밀도있게 기록하고 있다.

선생이 중국 망명을 위해 일본군에 지원했다 사활을 건 탈출을 하는 장면은 땀을 쥐게 한다. 목숨을 건 '쫓고 쫓기는 질주'를 여러 사료 등을 통해 긴장감이 물씬 풍겨나게 재현해 놓았다.

장준하 선생의 일대기이자 쉽게 깨우치는 근·현대사

긴급조치 1호위반으로 구속돼 재판을 받고 있는 장준하 선생(왼쪽), <장준하 평전에서 발췌>
 긴급조치 1호위반으로 구속돼 재판을 받고 있는 장준하 선생(왼쪽), <장준하 평전에서 발췌>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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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전은 또 장준하 선생의 일대기를 빌어 해방 전후사와 이승만 정부를 거쳐 박정희 군사정부에 이르는 근현대사의 궤적을 명쾌하게 정리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장준하 선생의 일대기이자 알기 쉽게 깨닫게 하는 근현대 역사서다. 
   
이 책은 특히 장준하 선생이 발간한 <사상계(思想界)>에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부인이 옷가지를 팔아 제작비를 만들고 함석헌과의 만남, 언론사상 초유의 백지 권두언이 탄생한 배경, 수많은 필화사건, 박정희 군사정부의 탄압으로 고사하게 된 과정 등을 비롯하여 비화까지 복원했다. 김 전 관장은 <사상계>를 미국 혁명의 <상식>, 프랑스 혁명의 <법의 정신>, 러시아 혁명의 <공산당 선언>, 중국 혁명의 <신청년>과 같이 '종이혁명'의 진원지'라고 평가했다.  
 
"1950년대, 전쟁이 남긴 폐허와 이승만 독재의 척박한 땅 남한에서 목마름을 적셔주는 한 줄기 석간수와 같은 지성지가 있었다. <사상계다>다. 봉건군주제→ 일제식민지→미군정→ 이승만 독재에 시달리면서 노예처럼 살아온 한국인들에게 서구적 민주주의와 민권의식을 일깨워준 이 월간지는 4월 혁명의 정신적 이념적 자양이 되었다. <사상계>에 글을 쓴 지식인과 이 잡지를 읽은 학생들이 4.19 주체가 되었다. <사상계>는 종이혁명의 진원지였다." 

장준하 선생의 잘못과 실수에 대해 사정없이 비판해 놓은 점은 이 평전의 객관성을 오히려 크게 한다.

평전은 친일지식인 최남선이 사망하자 <사상계>에 추모특집을 꾸미고 최상급 언어로 추모한 일을 설명한 후 "친일반민족행위의 지식인 육당 최남선에 대한 장준하의 인식은 대단히 왜곡돼 있었음을 보여 준다"고 비판했다. 장준하 선생이 친일작가 김동인을 기리는 '동인 문학상'을 제정해 시상한 일에 대해서는 "친일파상 제정의 효시가 됐다"며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이라고 지적했다.

이 시대 '장준하 정신'은?

5.16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5.16 혁명의 긍정적 의의를 발견할 수 있는' 등으로 미온적인 논조를 보인 일도 꼼꼼히 찾아 평론을 잊지 않았다.

장준하 선생
 장준하 선생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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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말미에는 고은 시인, 김수환 전 추기경, 문익환 전 목사 등 18명의 장준하 선생의 생전 동지들과 후학들의 견해를 비롯 송복 전 연세대 교수, 사상가 함석헌 등 9명의 생전 가깝게 지냈던 사람들의 평가를 수록해 놓았다.

글쓴이는 책머리에 '장준하 정신'이 그립다고 썼다.

"장준하 선생이 대결하고 청산하고자 했던 것들이 다시 현재화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일본의 군사대국화, 이명박 정부의 권위주의로의 회귀, 갈수록 대결양상을 띠는 남북관계, 어용지식인, 어용언론인들의 반시대적인 칼춤, 새삼 '장준하 정신'이 그립습니다." 

김 전 독립기념관장이 쓴 인물평전은 <장준하 평전> 외에 <박열 평전> <백범 김구 평전> <단재 신채호 평전> <만해 한용운 평전> <심산 김창숙 평전> <녹두 전봉준 평전> <약산 김원봉 평전> <안중근 평전> 등이 있다.  그는 과거 30년 간 축적해 놓은 자료를 토대로 한국사에 올곧게 뚜렷한 족적을 남긴 20명의 평전을 쓰기로 마음 먹고 이를 실천하고 있다.

장준하 선생은?
장준하 선생(1918∼1975)은 평북 의주에서 태어나 일본동학대학 철학과, 동경 일본신학교를 다녔다.

1944년 일본군학도병에 입대했다가 탈출해 중국군에 가담했으며 1945년 중국 중경에서 광복군 대위에 임관, 광복 투쟁에 헌신했다. 그 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일원으로 입국해 김구 주석의 비서 등을 역임했고, 1952년 월간 <사상>. 이듬해 <사상계(思想界)>를 창간해 자유 민주 반독재 투쟁에 헌신했다.

1967년에는 서울 동대문 을구에서 옥중 당선돼 제7대 신민당 소속 국회의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민주통일당 창당에 참여, 민주회복 개헌 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하고  범민주세력의 통합에 힘쓰는 등 박정희 정권에 맞서다 1975년 8월 17일 경기 포천군 소재 약사봉에서 의문사했다.


장준하 평전 - 개정판

김삼웅 지음, 시대의창(2012)


태그:#장준하, #장준하 평전, #시대의 창, #김삼웅, #의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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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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