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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대학들의 '철학과'는 모두 어디로 갔을까. 지금은 동네 개가 웃을 일이지만 한때 철학과는 경쟁이 치열한 과였다고 한다.

 

어느새 '자본'이 '이성'을 잠식이라도 해버렸는지, 지식의 상아탑에서 조차 '사유(思惟)'의 흔적을 찾기조차 힘이 들다. 대신 '삼성', '대우', '포스코'가 이름을 내 건 건물들이 오늘날의 상아탑의 위치를 가늠하게 할 뿐이다.

 

철학은 나, 우리를 알고자 하는 것

 

어디서부터 찾아야 하는 것인가. 왜 찾아야 하는 것일까. 나는 너무 모른다. 왜라는 질문을 던져본지 오래고, 내가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올바른 삶을 사는 것인지, 우리는 무엇이며 나는 우리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

 

관심이 없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돈'에 쫒기며 사는 우리로서는 '나'를 되돌아 볼 여유가 없을 뿐.

 

혼돈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민주주의가 무엇이며 경제와 정치의 관계는 어떤 것인지. 왜 우리가 정치인을 잘 못 뽑아서 경제가 어렵게 된다고 생각하는지 의문을 가져볼 만한 때에 살고 있다. 경제가 정치를 죽이고, 또 정치인을 죽이고, 나를 죽이고 하는 혼돈 속에서 살면서 적어도 한 번씩은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의 해답은 누가 알려 줄 것인가. 정답은 없다. 다만 나의 이런 궁금증을 이천년 전부터 고민하고 그에 대한 답이라 '설명'을 해 놓았는데 그것이 우리의 머리와 눈을 깨이게 할 '고전'이다.

 

고전읽기는 어렵다. 온갖 현학적인 단어와 문체가 그러하고, 원어를 알지 못하면 또 한 번 언어의 혼돈 속에서 헤엄칠 각오를 하게 될 번역문을 읽어야 한다. 책은 두껍고 방대하여 독파를 결심해도 삼일을 넘기기가 힘들며 슬쩍 훑어보기를 했다하더라도 십년이내에 다시 그 책을 잡게 될 확률은 거의 없다. 여기 이러한 고전읽기의 어둠속에 작은 손전등을 비춰주는 책 있으니.

 

감상하면 된다. 편안하게. 지은이가 이끄는 데로 눈과 귀를 열고 머리를 맡겨두면 가끔 가슴이 뛰고 크게 뜨거운 것이 울컥하게 올라올지도 모른다. 이천 여년에 걸친 역사 속에 살아 숨 쉬는 위대한 사상가 10사람을 추려서(?) 예쁘게 등장시켜 놓았으니 직접 뒤지거나 들춰볼 필요 없이 저자가 대신 이모저모 따져주고 꼬집어주고 심지어는 떠먹여주는 '철학 농축액'을 마실 수 있다.

 

우리는 통치자에게 엄격함을 강조한 플라톤을 만나, 공자로 그리고 나이 일흔이 넘어 사상범이 되어 독배를 마신 소크라테스가 끼어들면서 가지지 못하고 소외된 자들의 친구였던 청년예수와 이야기를 나누고, 비움으로 열반에 오른 석가가 이야기하면 점잖게 기침하며 끼어드는 '동막골' 노자가 있다. 마치 토론장에 있는 것처럼 옛 현인들의 인생과 가장 핵심적인 사상을 맛보고 흥미가 생긴다면 참고서적들을 들추게 되어 진짜 그네들의 철학에 빠지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생각지도 못한 즐거움

 

책을 읽는 내내 즐거웠는데 이는 우리가 가지고 있던 선입견을 깨는 지은이의 고전해석에 있었다.

 

"불교는 종교인가, 철학인가? 종교는 초월적 절대자를 설정한다. 기독교의 여호와 하나님과 이슬람의 알라가 초월적 절대자이다. 초월적 절대자를 사람들이 잘 모르니 예수가 구원자로 오고 마호메트가 중재자로 오는 것이다. 부처는 신적인 존재가 아니다. 다만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부처를 숭배하는 불교는 종교가 아니다. 부처가 의지한 것은 초월적 절대자가 아니라, 바로 이것이었다.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반야심경, 이것에 의존하여 깨달음을 얻었으니,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모든 불자여, 절에 갈 필요도 없고 대웅전의 나무 조각상에다 절을 할 필요도 없는 것이렷다. 당신도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라."  p.95

 

"우리의 의식 한구석에는 '공자 왈 맹자 왈' 유가 사상을  폄하하는 경향이 자리하고 있다. 우리의 머릿속에 자리 잡은 선비는 고루하게 옛 경전이나 암송하여 고집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역사의 퇴적물 속에 공자의 참모습은 가려져 있다. 공자처럼 불우한 사람도, 공자처럼 치열하게 탐구하며 산 인물도 드물다. 고루한 것은 오히려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아닐까? 진리를 들으면 오늘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할 만큼 진리 탐구에 열정적인 인간을 나는 보지 못했다." p.126

 

아마도 보지 않았을 수도 있다. 주변 어딘가에 숨어 있을 또 다른 공자를. 하지만 지금의 세태가 너무 물질을 추구하니 진리탐구를 위해 올인 할 사람은 없다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다만 그의 정신이 오늘날 학문하는 이들에게 올바른 지침이 될 수 있다면 그가 오늘에 살아 있다고 할 것이다.

 

선조들의 실천 철학

 

"이러했으니 예수야말로 지독한 무소유주의자였다. '새도 둥우리가 있고 여우도 굴이 있는데 나에겐 쉴 곳이 없다.' 집도 절도 없는 몸, 그가 예수였다. 사람은 하나님과 돈을 함께 모실 수는 없다고 예수는 잘라 버린다. 물신숭배에 대한 확고한 거부야 말로 예수의 일관된 세계관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부자 청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물을 때, 거침없이 '너의 전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준 다음 나를 따르라' 하고 말했던 것이다. 오늘 예수가 살아 있다면 그는 분명 무소유주의자일 것이며 동시에 평화주의자일 것이다."

p.144

 

오늘의 기독교는 이런 예수의 정신은 철저히 배재한 채 그들의 '물질적' 세력 키우기에 급급하다. 더 큰 교회를 위해 돈을 모으고, 그 '성전'을 바탕으로 한 자본의 채집으로 자본적 지위가 높아지는 것은 목사들이다. 개혁과 진보를 거부하고 가진 자들의 동아리로 커가는 한국의 교회들을 보면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했던 예수는 뭐라 하실 것인가.

 

이 외에도 우리 지폐에 등장하는 퇴계이황께서는 오늘날 우리 교수님들이 조교들을 부리는 권위보다 몇 십 년 어린 기대승이라는 제자에게서도 배움을 구하는 참스승 상을 보이셨던 분이었고, 당시보다 100배 효율적인 오늘날도 이루지 못한 노동의 조건을 제시했던 토마스 모어, 개인의 이기심이 나라를 이롭게 한다는 획기적인 이론의 주창자 애덤스미스, 매년 오늘날에도 미주의 유명언론이 조사한 현대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철학자로 순위에 드는 '노동혁명원조' 칼막스가 우리에게 말을 건다.

덧붙이는 글 | 철학콘서트/웅진지식하우스/황광우/12,000/287.p 
*'철학콘서트2' 출간


철학 콘서트 1 - 위대한 사상가 10인과 함께하는 철학의 대향연

황광우 지음, 김동연 그림, 생각정원(2017)


태그:#철학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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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데로 생각하지 않고, 생각하는데로 살기 위해 산골마을에 정착중입니다.이제 슬슬 삶의 즐거움을 느끼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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