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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모를 보면 군주를 안다.'

 

<군주론>의 저자 마키아벨리의 말이다. 2007년 대선에서 한나라당의 '입'으로 이명박 후보에게 쏟아지는 십자포화를 분쇄한 사람. 대통령직 인수위 기획조정분과위원으로 MB정부 밑그림을 그리고, 총선에서 낙선했지만 작년 여름 청와대 정치의 중심에 화려하게 복귀한 사람. 그는 바로 박형준 청와대 홍보기획관이다.

 

얼마 전 극우논객 조갑제씨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이명박 대통령을 비난하는 글을 게재했다. 그 글은 청와대의 항의를 받고 삭제된 것으로 알려졌다. 비슷한 시기에 박형준 홍보기획관이 조갑제씨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올해 초 방송법 개정 논란을 '광우병 괴담' 정도로 취급한 그가 조씨와 무슨 말을 나눴는지는 모르겠으나 홍보기획관이라는 자리는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최근 민주주의 후퇴를 부추기는 청와대 행보와 무관하지 않다.

 

'선량한 마키아벨리스트'를 원한 박형준  

 

2007년 8월 14일 시리즈로 쓰인 <오연호 리포트 : 선택 2007 대선> 여섯 번째 글에서 오연호 기자는 박형준 국회의원을 다뤘다. 당시 박 의원의 공식 직함은 한나라당 대변인. 실제는 당선 예상자 1순위인 이명박 후보의 최측근인 점에 무게가 더 실렸다.

 

기사에 따르면 진보적 시사 종합지 <말>의 1991년 6월호 목차란에 실린 '만드는 이' 소개에는 기자 '오연호'와 함께 편집위원 '박형준'이라는 이름이 또렷이 인쇄되어 있다. 그때 박형준은 <중앙일보> 기자를 거쳐 동아대 사회학과에 몸담고 있는 진보사회학자로 <말>지 편집위원을 맡고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문인이나 기자를 꿈꿨던 청년으로 고려대 사회학과에 진학한(78학번) 박형준. 1979년 10.26사건과 1980년 광주를 거치면서 사회과학 이론에 빠져들기 시작해 좌파이론에 대한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한다. 학자 시절 <성찰적 시민사회와 시민운동>(2001년, 의암출판)이라는 책도 펴낸 그가 정치인으로 변모한 까닭은 무엇일까.

 

"정치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처음엔 없었는데…. YS정권 때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을 하면서 청와대 프로젝트를 많이 했는데 그때, 아 시민운동의 시각에서 보는 사회와 국정의 시각, 통치의 맥락에서 보는 사회라는 게 상당히 다르구나 하는 것을 느꼈죠." (<오연호 리포트 : 선택 2007 대선> 박형준과 인터뷰 중에서)

 

시민운동의 시각과 국정의 시각이 다른 점을 몸소 체험하며 국가경영능력의 중요성을 절감했다는 박형준. 새로운 리더십에 대한 고민의 결과로 정치에 입문한 그는 인터뷰에서 '선량한 마키아벨리스트'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복합적이고 다양한 능력이 요구되는 국가경영이란 분야에선 착한 사람이어서도 안 되고,그렇다고 선의만 가진 사람이어도 안 되고, 지사형도 바람직하지 않고, 이데올로기스트도 바람직한 게 아니다. 의지는 선량하게 갖되 풀어가는 방식은 상당 정도 실용주의로 풀어가는 선량한 마키아벨리스트가 필요하다." (<오연호 리포트 : 선택 2007 대선> 박형준과 인터뷰 중에서)

 

2007년 대선에 임하며 정치인 박형준은 '이명박' 후보를 선택했다. 그에게 이명박 후보는 "의지는 선량하게 갖되 풀어가는 방식은 실용주의로 풀어가는 선량한 마키아벨리스트"에 가장 합당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해 대선은 그의 바람을 현실로 이루었다. 바야흐로 '선량한 마키아벨리스트'의 시대가 도래했다.

 

'선량한 마키아벨리스트'의 원주민 억압

 

위키백과에 따르면 개인적인 욕구 충족을 위해 남을 속이거나 조종하려는 욕구를 가리켜 마키아벨리즘이라고 한다. 또 다른 백과사전은 목적 달성이라는 결과에 따라서 수단의 반도덕성은 정당화된다는 정치적 사고를 마키아벨리즘으로 풀이한다. 마키아벨리스트란 그러한 사고방식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을 말한다.

 

마키아벨리즘과 마키아벨리스트 둘 다 르네상스 시대의 외교관이자 작가인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쓴 <군주론>에서 연원한다. <군주론>에서 마키아벨리는 군주의 덕목과 성공하는 군주의 요건을 제시한다.

 

5백여 년 전 이탈리아 피렌체를 배경으로 쓰인 책을 현재와 직결시켜 이해하기에는 무리한 점도 있다. 그러나 그것의 명칭이 군주이든, 대통령이든 정치와 권력의 자장에서 자유롭지 않은 한 이 책의 통찰은 살펴볼 만하다. 더구나 지금은 '선량한 마키아벨리스트'의 시대가 아닌가?

 

"여기에서 반드시 명심해야 할 점은 그곳 원주민들을 잘 대접할 것이냐 아니면 완전히 박살을 낼 것이냐 하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가벼운 피해에 대해서는 복수를 할 수 있지만 치명적인 피해에 대해서는 그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원주민에 대한 억압은 복수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길 수 없을 만큼 철저해야 합니다." (<군주론>, 을유문화사 중에서)

 

2008년 2월 25일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식을 하고 청와대에 입성하기 전까지 그곳의 원주민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다. 비록 청와대가 아닌 곳에서 잔다고 해도 재임 기간 동안 대통령을 구심점 삼아 형성된 사람들도 통칭하면 '원주민'에 속한다.

 

선량한 마키아벨리스트의 집권 이래 얼마 전까지 원주민들은 '완전히 박살'났다. 검찰과 경찰은 물론, 국세청과 법원 등 권력기관의 전방위적인 압박 속에 원주민에 대한 억압은 '복수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길 수 없을 만큼 철저'히 진행됐다. 적어도 한 사람의 죽음이 있기 전까지는.

 

광장의 자유가 두려운 군주

 

마키아벨리즘이 목적을 위하여 수단을 가리지 않는 막장 드라마의 권모술수주의 쯤으로 오인되는 배경에는 정적에 대한 철저한 복수, 비난받기를 주저하지 앉는 신속한 행동 등을 군주의 덕목으로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마키아벨리는 책 속에서 "군주는 자신의 백성들을 통일시키고 그들로부터 신뢰를 받도록 하는 과정에서 잔인하다는 낙인이 찍히더라도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는 자신에게 미움이 돌아올 만한 일은 그 대리인에게 시키고, 백성들에게 즐거움을 줄 만한 일은 군주 스스로 한다"며 잔인한 일을 행하면서 욕을 덜 먹는 방법까지 친절히 일러준다. 그래도 증폭되는 비난으로 군주의 마음이 괴로울까 싶어, 이렇게도 적어 놓았다.

 

"악행을 저지르지 않고서는 자신의 위치를 지탱하기가 더 어렵기 때문에 그가 오명을 써야 한다면 그것을 가지고 마음 상할 필요가 없습니다. (중략) 보기에는 부덕하게 보이지만 막상 그것을 실행하고 보면 군주로 하여금 안전하고도 번영되게 만들어 주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군주론> 중에서)

 

그러나 피를 보기를 마다않는 정치 보복이 <군주론>의 전부는 아니다. 무턱대고 무섭게만 여겨지고 아무 때나 두려움을 행사하는 것은 두려움의 남용이다. 두려움은 선별적으로 한꺼번에 몰아서 행사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두려움이 착함을 구축하기 위해 사용될 때에만 의미가 있다는 점이라고 마키아벨리는 전한다.

 

"국권을 잡은 사람은 그가 행하지 않을 수 없는 모든 악행을 심사숙고해야 하며, 악행을 행해야 될 경우에는 한 번에 몰아서 해야 할 것입니다. (중략) 잔인함을 잘못 이용하는 사람은 손에서 피 묻은 칼이 떠날 날이 없으며 백성들에게 의지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중략) 백성들로 하여금 아픔을 한순간에 맛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악행을 한꺼번에 몰아서 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백성들을 덜 동요시킵니다." (<군주론> 중에서)

 

선량한 마키아벨리스트의 집권 이후, 악행은 한 번에 그쳤을까. 몽매한 나로서는 잘 모르겠지만 마키아벨리는 귀족과 민중이 대립한다면 민중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귀족은 권력의 입맛에 따라 만들 수 있지만 민중 없는 군주란 없기 때문이다.

 

"백성들로부터 미움을 받지 않는 것이 최선의 성채입니다. 전하께서 아무리 훌륭한 요새를 갖추고 있다 할지라도 백성들이 전하를 미워한다면 전하께서는 안전할 수가 없습니다." (<군주론> 중에서 )

 

오연호 기자와 한 인터뷰에서 "지금 우리나라엔 선량한 마키아벨리스트가 필요"하다고 밝힌 박형준 당시 의원은 그가 선택한 이명박 후보의 당선 이후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했다. 작년 총선에서 부산에 출마했지만 친박 바람에 낙선했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청와대. 2008년 6월부터 대통령실 홍보기획관으로 근무하고 있다.

 

그가 읽은 <군주론>과 내가 읽은 <군주론>이 다를지는 몰라도 오늘날 한 가지 점은 일치할 것 같다. 서거한 전임 대통령의 영결식을 위한 서울광장의 개방 여부가 9시뉴스의 머리기사로 등장하고 6.10 기념행사장으로 서울광장의 사용이 불허된 지금, 그의 군주는 확실히 '두려운 존재'가 됐다.

 

"군주는 사랑을 받지 못하면 증오라도 받지 않을 수 있도록 자신을 두려운 존재로 만들어야 합니다." (<군주론> 중에서)


태그:#박형준, #마키아벨리스트, #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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