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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오전 서울역사박물관에 마련된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 분향소를 찾은 임채진 검찰총장이 조문한 뒤 경찰 호위를 받으며 황급히 분향소를 빠져나가고 있다.
 25일 오전 서울역사박물관에 마련된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 분향소를 찾은 임채진 검찰총장이 조문한 뒤 경찰 호위를 받으며 황급히 분향소를 빠져나가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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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론을박이 있다.

갑이 논(論)한다. 대한민국 검찰은 최고의 정치집단이다. 이유를 물었다. 검찰이 필요에 따라 수사를 기획하고, 조절하고, 관리하는 '정치'에 능하기 때문이다.

을이 박(駁)한다. 뭐니 뭐니 해도 대한민국 검찰은 법질서를 수호하는 정의의 기관이다. 까닭을 청했다. 그나마 검찰 덕분에 권력비리가 줄어들지 않았나.

논박을 주고받는 갑을이라도 하나의 사실(fact)만큼은 인정할 것 같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수사가 국민 신뢰를 얻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검찰청법 제4조를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검사는 그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국민전체에 대한 봉사자로서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며 부여된 권한을 남용하여서는 아니 된다."

그렇다면 '박연차 리스트'로 시작된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수사를 지켜보면서 국민들은 이 법에서 말하는 '정치적 중립'에 대해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검찰수사 국민 불신 갈수록 커지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최근 조사한 바에 따르면, 70%가 청와대·검찰·보수언론의 책임을 거론했다. 이회창 총재는 검찰조사가 불행을 초래한 원인이 되었다면 그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 주장에 대해 공감하는 여론이 60%였다. 데이터가 말한다. 검찰수사, 실패다. 그러나 검찰수사에 대해 국민들이 처음부터 불신했던 것은 아니다.

지난 3월 30일 KSOI가 박연차 리스트 수사에 대한 여론을 살펴봤다. '이전 정권 인사들에 대한 의도적인 표적수사로 문제가 있다'는 응답이 30.2%였다. 49.6%가 '불법정치자금을 수뢰한 인사들에 대한 수사로 별 문제가 없다'고 대답했다. 이때까지는 노건평, 이광재 의원 등만 구속됐을 뿐, 아직 노 전 대통령과 직접 관련된 '혐의내용'이 불거지지 않았다. 노 전 대통령이 인터넷을 통해 박연차로부터 돈 받은 사실을 고백한 것은 4월 7일이다.

KSOI가 4월 13일에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박연차 리스트에 대한 수사에서 여야 형평성을 묻는 질문에 34.2%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렇지 않다'는 49.9%였다. 2주 전의 조사에 비해 미세하지만 수사에 대한 불신이 증가한 것이다. KSOI의 4월 30일 조사에서는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가 이전 정권에 대한 정치보복이라는 의견이 45.6%였다. 정당한 수사라는 의견은 47.4%였다.

이처럼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수사에서 국민이 드러내는 불신의 정도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커져갔다. 세대별로 보면, 50세 이상에서는 22.5%만이 정치보복 수사라고 답변했다. 하지만 다른 세대의 반응은 달랐다. 40대에선 52.1%, 30대에선 56.2%, 20대에선 64.3%가 정치보복이라는 의견에 공감했다.

"현 정부의 검찰이 과거보다 더 권력 지향적"

태광실업 세무조사 무마 청탁 로비 의혹을 받고 있는 천신일 세중나모여행 회장이 20일 새벽 4시 30분께 피의자 신분으로 18시간 동안 조사를 받은 뒤 서초동 대검찰청을 나와 귀가하고 있다.
 태광실업 세무조사 무마 청탁 로비 의혹을 받고 있는 천신일 세중나모여행 회장이 20일 새벽 4시 30분께 피의자 신분으로 18시간 동안 조사를 받은 뒤 서초동 대검찰청을 나와 귀가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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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조사에서 드러나는 세대별 추이로 볼 때 50세 이상은 강한 보수 성향과 함께 뚜렷한 친여 성향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사실은 이들이 사실관계에 따른 합리적 판단보다는 이념정향이나 여야를 잣대로 찬반을 정하는 가치판단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물론 이것이 잘못은 아니다.

미국의 경우는 우리보다 더 심하다. 어떤 사실과 논리적 관계가 전혀 없는 감정을 바탕으로 특정인의 판단을 80% 가량 예측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80%의 대부분이 당파심 때문이었다. 에머리대학교 드루 웨스턴(Drew Westen) 교수의 설명이다.

이번 수사를 떠나서도 검찰에 대한 신뢰도는 바닥이다. 무신불립이라, 온전하게 서 있기조차 힘든 정도의 불신이다. 지난 5월 19일 '리얼미터'의 조사에서 검찰의 신뢰도는 5.4%였다. 지난해 12월의 조사에선 3.2%였다. 외형상으로는 신뢰도 수치가 조금 오른 것처럼 보이지만 오차범위(±3.1%)를 감안하면 달라진 게 없다. 같은 조사에서 '현 정부의 검찰이 과거 보다 더 권력 지향적'이라는 응답이 46.6%였다. 따라서 신뢰 수준이 오히려 더 떨어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전문가의 의견도 이와 다르지 않다. 지난 4월에 <법률신문>이 변호사, 법학교수 등 법률가 27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참여정부와 비교해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우리 사회의 법치주의가 후퇴했다는 응답이 58.5%였다. 앞으로의 전망에 대해 45.6%가 퇴보할 것이라고, 34.8%가 별로 기대하지 않는다고 했다. 10명 중 8명이 부정적 전망을 내놓은 셈이다. 이런 조사결과도 검찰의 신뢰 위기를 반영하는 것이다.

"상황은 정상이지만, 모든 것이 엉망이다"

그렇다면, 수사의 정치적 효과는 달성됐나? 검찰이 이 질문에 대해 언짢을 수도 있다. 애당초 검찰수사에 정치적 동기가 없다고 항변할 것이다. 그 말이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전직 대통령에 대한 검찰의 수사행위는 그 뜻과 상관없이 정치적 행위가 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그것이 낳는 파장 중에 정치에 미치는 파장이 제일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검찰의 의도와 무관하게 검찰수사의 정치적 득실을 따져보는 것은 유의미한 평가다. 

검찰수사는 4월 재․보궐 선거에 아무런 영향을 발휘하지 못했다. 검찰수사의 주 타깃이던 노 전 대통령과 친노 세력의 정치적 실체는 민주당이다. 따라서 최소한 수도권에서 치러지는 재․보궐 선거에선 민주당이 수세에 몰리는 게 당연한 구도였다. 그러나 결과는 반대였다. 한나라당은 대선과 총선에서 압승했던 수도권에서 오히려 10% 가량의 격차로 패배했다. 한 마디로, 검찰수사에 의한 선거효과는 전혀 없었던 것이다.

혼란이나 실패를 뜻하는 영어 단어에 'snafu'란 말이 있다. 2차 대전 때 생겼다. 'Situation Normal, All Fucked Up'의 준말이다. '상황은 정상이지만, 모든 것이 엉망이다'라는 의미다. 검찰의 이번 수사, 외견상 정상적으로 진행되는 듯했으나 결국 엉망으로 끝난 수사에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이 'snafu'다. 엄청난 국민 지탄, 신뢰위기에 내몰린 검찰에게 노 전대통령이 한 마디 한다면 이것이 아닐는지.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덧붙이는 글 | 이철희는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 수석 애널리스트로서 여론 동향을 정리하고, 분석하는 일을 하고 있다. 저서로 <1인자를 만든 2인자들>, <어드바이스 파트너> 등이 있다.



태그:#노무현 전대통령, #서거, #검찰수사, #이철희, #KS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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