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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신구는 비둘기가 가까이 다가오면 무쇠 가위를 철컹철컹 흔들어 쫓아버렸다. 무쇠 가위를 아무리 흔들어도 비둘기가 달아날 생각을 않자, 무쇠 가위의 두 날로 날개를 싹둑 잘라버리기도 했다. 날개가 잘린 비둘기는 마당 수챗구멍에 대가리를 처박고 죽었다. 비둘기들이 무섭게 숫자를 불려가는 동안, 마을에서는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한때 조선소 노동자였던 사내가 아내와 아이들을 죽이고 자신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었는데, 눈깔사탕만 한 쇳덩이가 그들의 숨통을 틀어막고 있었다. 겨우 두 살밖에 안 된 사내아이의 식도에는 쇠공이 박혀 있었다.
                                                              -153쪽, 장편소설 <철>(김숨 지음)중에서

조선소 노동자들을 다룬 소설 <철>.
 조선소 노동자들을 다룬 소설 <철>.
ⓒ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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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작가 김숨의 문체는 무뚝뚝하면서 거칠다. 동물성의 문장 하나하나가 느슨하게 서로 이어주며 나가는 문단과 플롯은 영락없이 무표정한 어느 한 사내의 표정과 닮았다. 그를 아는가. 나는 그를 알고 있다. 지독한 가난에 울부짖다가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공장에 뛰어들어 노동자가 된 사내. 그는 40년 가까이 묵묵히 한 곳에서 기계를 만지며 숭고한 밥벌이 현장, 그 중심에 올곧게 서 있다. 나의 아버지 아니면 당신의. 작가의 글은 어느 누구를 쉽게 비난하지도, 동정하지도 않는다. 다만 관찰하면서 서투르고 투박한 진정성을 슬며시 꺼내어 보여준다. 관찰과 기록에 몰두하면서도 이따금씩 녹이 슨 그들의 어깨를 주무르는 그 따뜻한 손길마냥.

장편소설 <철>은 작가의 말처럼 거대한 철선의 완성을 위해 노동에 힘쓰는 조선소 노동자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오로지 철선의 완성을 위해 도구처럼 쓰이다가, 마모되고 쓸모없어지면 가차 없이 버려지는 노동자들에 대해.'(277쪽, 작가의 말) 배경은 조선소가 들어서 발전의 희망을 품게 된 어느 마을. '위대한 조선소 노동자'들의 행렬로 시작하는 이 글은 거대한 철선의 완성을 꿈꾸며 살아가는 노동자들과 그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그들은 번영과 더 나은 밥벌이를 꿈꾸지만 침묵덩어리 철판은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는다. 철은 녹이 슬게 마련이고, 때문에 다 소모된 그것들은 온 동네를 불그스름한 빛깔로 물들인다.

마찬가지로 조선소가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병든, 혹은 낡은(녹이 슨) 노동자들이 그 어떤 해명도 듣지 못한 채 해고 통보를 받는다. 유통기한이 지난 사람들은 실의에 빠져 유령 같은 거리를 배회하다 하천에 빠져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사람들은 녹과 죽음에 서서히 무감각해진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이기적인 발상이 누구에게나 있듯, 그들은 자신의 차례가 돌아오지 않거나 좀 더 늦기를 갈망한다. 하지만 불규칙한 해고는 어느 누구 하나 거르지 않고 고르게 찾아온다. 우리의 아비와 닮은 숱한 노동자들은 물론이고, 반대 시위나 투쟁의 주모자를 고발하는 등 이간질에 한몫하며 가까스로 생존하던 김태식이란 인물도 결국 조선소에서 쫓겨나는 신세로 전락한다.

철의 시대가 지고, 강(鋼)의 시대가 떠오르면서 세상은 그들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않았다. 철선의 완성은 까마득하기만 하고 숱한 동료를 배신하며 악착같이 버티던 노동자들도 결국 신기루와 같은 욕망의 끝에서 순식간에 미끄러진다. 나락은 끝도 없이 밑으로 향하고,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과 가족의 밥벌이를 위해 묵묵히 살아간다. 철선을 꿈꾸며, 터무니없게도.

짧고 건조한 문체를 지녔다는 점에서 조세희의 <난쏘공>이 연상되는 이 소설에는 뚜렷한 시간대나 공간이 드러나지 않는다. 어디선가 본 기억이 나기도 하고, 알 것도 같지만 소설 안에서는 단 한 번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이는 곧 그들이 사는 '그곳'만의 문제가 아니라, 실은 우리 주변 모든 이의 이야기일 수 있다는 작가 의도가 명확히 드러나는 점이다.

최근 암울한 현실과 더불어 문단에서는 노동소설의 부활을 요청하고 있다. 거대 조직과 이윤을 위해 기꺼이 사람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금단의 현실을 감안한다면 이는 적절한 제안을 넘어서는 대단히 애절한 바람이라 볼 수도 있겠다. 지금 이곳에서 울고 있는 그들에 대해 말해 달라는, 그 시공간에 대해 읊조려 달라는 부탁은 아닐까.

그런 흐름에 부합하는 김숨의 <철>은 노동소설의 골격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전의 작품들과는 다른 낯선 특징을 갖고 있다. 기계화된 노동자, 노동 속에서 그저 톱니바퀴나 나사 신세로 전락한 이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 어디 어제 오늘 일인가. 작가는 성긴 문장, 무뚝뚝한 진정성, 남미소설의 마술적 리얼리즘을 연상시키는 환상적 인물과 사건 그리고 묘사를 통해 독특한 위치에 이 작품을 슬며시 얹어놓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무엇일까

소설가 김숨. 1997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느림에 대하여', 1998년 문학동네신인상에 '중세의 시간'이 각각 뽑히며 문단에 나왔다.
 소설가 김숨. 1997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느림에 대하여', 1998년 문학동네신인상에 '중세의 시간'이 각각 뽑히며 문단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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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은 노동으로 마모돼 가는 '개인'의 황폐한 내면과 처절한 육신의 쇠락을 그럴듯하게 그려낸다. 냉정한 필체로 그려낸, 조선소가 들어선 한 마을의 흥망성사는 한국의 근현대사를 관통하며 더 깊은 울림을 보여주기도 한다.

물론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다. 어느 언론사와 한 인터뷰에서 투쟁보다는 개인의 서사에 중점을 주었노라고 작가는 말했다. 아니, 그는 투쟁에는 관심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고 한다. 실제 극중 인물 김만도는 동료 배복만에게 '조선소에 투쟁'하라고 말하면서도 자신의 말을 역겹다고 여긴다. 그는 나중에 시위대의 주모자를 고발해 생존하는 인물로 변모한다. 닫힌 가능성 아래 펼쳐진 이 성찬을 본 실제 노동자들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소설 속에서 투쟁이나 저항은 그저 조롱이나 무관심의 대상일 뿐이다. 그들은 어느 누구 하나 반발하지 않으며, 그저 우리 아버지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위대한 철선'의 등장을 두려운 마음으로 기다린다. 옆에 있는 사람이 죽어나가도, 그 어떤 부패와 부정이 들끓어도 그들은 다만 침묵한다. 마지막 장까지 다 덮고 나서 난 이런 의문이 들었다. 이 제의(祭儀)가 과연 위로일까, 저주일까.

사방이 가로막힌 길에서 거대한 담벼락과 마주하는 기분이 드는 것은 그 때문. 갈 곳을 잃은 서사가 핏덩이를 뚝뚝 토해내며 잔인한 한 철과 마주한다. 지옥과도 같은, 끝나지 않는 더위에 지쳤는지 그저 뜨거운 길바닥에 주저앉아 있을 따름이다. 축 늘어진 정신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다. 물론 알고 있다. 쓸데없는 투정처럼 보인다는 것을.

최근 쌍용자동차가 2400여 명을 정리해고 하면서, 사내 노조와 가족들이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고 한다. 이유 없이 당하는 해고통보가 그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소설 속에서 자신들의 차례를 두려워하는 노동자와 주변 가족들처럼 우리도 두려워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들은 자신들의 눈물과 고통을 이해 받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거창한 목표나 거창하고 거국적인 투쟁을 위해서가 아니다. 그저 도와달라고, 살려달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누군가는 이런 장면을 보고서 따뜻하게 연민은 하지만, 투쟁에는 동의할 수 없다며 차갑게 돌아선다.

작가는 허상에 불과한 '목적'을 쫓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자신의 소설을 정의했다. 그렇다면 철선이라는 허상을 쫓은 것이 과연 노동자들만의 잘못이었을까. 시간과 공간의 닫힌 가능성 속에서 그저 앞에 놓인 운명을 거머쥘 수밖에 없었던 서글픈 그들. 대다수가 '투쟁'이란 말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해석하며 심한 거부감을 보인다. 어떤 이는 시위라는 말만 나오면 침을 뱉으며 사정없이 욕설을 늘어놓는다. 사치, 더 굶어봐야 정신 차릴 거라고.

미국 영화 <웨이킹 더 데드(Waking the dead)>에서 한 남자가 사람들의 시위, 투쟁에 불만을 품는다. 그의 부정적 인식에 사회운동가 여자가 이렇게 말한다. "투쟁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일 수도 있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무엇일까. 노동인가, 투쟁인가. 아니면 둘 다인 걸까. 몇몇 먹물들은 지레짐작하며 너무도 쉽게 가능성을 포기해 버린다. 지나치게 염세적이고 어두운 탓이다. 지난 촛불축제 때 젊은 아이들은 춤을 추기도 하고 박수를 보내며 노래를 불렀다. 그들에게 그것은 놀이이자 축제 그 자체였다.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즐기면서 행동할 줄 아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짜릿하고 신선했다. 그것이 옳고 아니고를 떠나서 그 자체만으로도 그들은 완벽한 승리자였다고 말하고 싶다. 지나치게 염세적인 이들은 아마도 그들에게 배울 점이 많을 것이다.

김숨의 장편소설 <철(鐵)>은 원치 않는 짐을 짊어진 어느 사내의 수레를 뒤쫓는다. 강렬하게 쏘아대는 햇빛과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사막을 횡단하는 그 남자. 그는 누구일까. 나의 아버지인가, 아니면 나 자신인가. 이건 운명이고 인생이다. 마음만 먹으면 당신은 한걸음 더 빨리 걸어가 그의 수레를 밀어줄 수도 있다. 물론 선택은 철저히 자유겠지만.


김숨 지음, 문학과지성사(2008)


태그:#철, #김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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