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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어른이 태어난 생가 터는 제주 한림읍 명월리에 있다. 지금은 비닐하우스가 그 자리에 대신하고 있으나 돌담과 흙길로 집과 집을 이어주는 올레는 그대로 남아있다.
 장인어른이 태어난 생가 터는 제주 한림읍 명월리에 있다. 지금은 비닐하우스가 그 자리에 대신하고 있으나 돌담과 흙길로 집과 집을 이어주는 올레는 그대로 남아있다.
ⓒ 유창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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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걸었다. 미끈하게 포장된 도로가 아닌, 곳곳에 울퉁불퉁한 자갈이 박혀 있고, 양옆에 이름 모를 들풀이 피어 있는 길. 특히 길가 담이 보통 벽돌담과 다른 현무암으로 만들어졌다. 집과 집을 이어주는 이 골목길, 이곳 제주도 사람들은 '올레'라고 부른다.

이 올레를 60년 전 한 남자아이가 뛰어다녔다. 그리고 지금, 할아버지가 된 남자아이의 주름진 손에는 다섯 살 된 외손녀의 손이 살포시 쥐어져 있고, 이 둘은 올레를 걷고 있다. 이 길은 바로 할아버지가 태어난 '고향 길'이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이 둘은 이야기를 나눈다.

할아버지와 다섯 살 된 손녀가 손을 잡고 길을 걷는다. 60년 전과 후, 이들이 생각하는 고향은?
 할아버지와 다섯 살 된 손녀가 손을 잡고 길을 걷는다. 60년 전과 후, 이들이 생각하는 고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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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할아버지 고향이란다."
"할아버지, 고향이 뭐야?"

"응, 고향은 그 사람이 태어나는 곳을 말하는 거야. 그러니까 여긴 할아버지가 태어난 곳이야."
"어… 그런데 할아버지는 왜 태어났는데?"

"……."
"아하, 할머니 만나려고 그랬구나!"

장인어른의 고향인 제주도 한림읍 명월(明月)리를 찾은 것은 지난 6일이었다. 나는 장인어른과 딸의 뒤를 따라 걸으면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다가 딸아이가 할아버지에게 던진 첫 질문에 귀 기울이게 됐다. 다섯 살(정확히 43개월) 아이의 눈에 비친 '고향'이란 어떤 것일지 궁금했다.

그런데, 두 번째 질문을 듣는 순간 흠칫 놀랐다. 할아버지에게 "왜 태어났는데?"라고 묻는 딸아이의 당돌한(?) 물음에 아비로서 당황했다. 과연 할아버지는 뭐라고 답할지…. 바로 딸아이는 스스로 명쾌한 답변을 내놓았다. 역시, 아이다운 질문과 답변이다.

우리는 다섯 살배기 아이의 말에 껄껄껄, 하하하, 까르르 웃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순수한 아이의 시선을 잃어버린 '어른'이 바로 나였다. 올레에서 할아버지와 그의 딸과 사위, 손녀 3대는 하나가 됐다. 이렇게 길은 세대를 하나로 묶어줬다. 결국 아이에게도, 할아버지에게도 고향은 바로 '길'이었다.

아이와 함께 걸어본 부모님의 '고향 길'

명월리에서 바라본 비양도.
 명월리에서 바라본 비양도.
ⓒ 유창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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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고향은 제주도다. 언제부터인가 제주도를 거창하게 '제주특별자치도'라고 부르지만 우리 가족에겐 그냥 '제주도'다. 주변 사람들은 내게 말한다. "처가가 제주도라 좋겠어"라고. 사람들 말대로 좋긴 좋다. 하지만 바쁜 일상에 쫓겨 시간을 내서 제주도를 찾기란 쉽지 않다. 또 가족이 늘어나면서 제주도를 찾는 비용도 만만치 않아 아내에게 "처가에 가자"란 말을 쉽게 못해 미안할 뿐이다.

올해는 지난주에 장모님 기일에 맞춰 제주도에 다녀왔다. 제주도가 고향이면서도 가족들이 모두 떠난 이들은 제주도를 찾기 쉽지 않다고 한다. 다행히 장인어른을 비롯해 아내의 친인척들이 살고 있어 제주도를 찾을 때마다 새로운 제주를 만나보는 재미를 느낀다. 특히 이번에 제주도를 찾았을 때는 아이가 다섯 살이 되면서 기억하고 추억할 수 있는 일들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이번에 우연히 아이의 외할아버지가 태어난 명월리(제주도 서쪽에 위치)를 방문하게 된 것이다. 물론 나도 처음 찾은 장인의 고향 마을이었다. 이곳에서 장인은 다섯 살까지 살았다고 한다. 4·3사건으로 인해 장인의 가족이 한림으로 떠나기 전 당시 가구 수는 120호가량으로 그래도 꽤 큰 마을에 속했다고 한다(오히려 현재 100호 정도밖에 안 되는 작은 마을이 되었다).

가장 먼저 찾은 장인의 생가는 현재 돌담과 집터 위에 비닐하우스가 대신 자리하고 있었다. 옛집이 남아있지 않아 아쉬움은 있었지만, 제주 올레를 걷는 것으로 만족했다.

제주도 한림읍 명월리 팽나무 군락지. 양반촌으로 설촌된 명월리는 '청풍명월'이란 말의 유래가 된 고장이다. 마을 중심에 팽나무 수백여 그루가 자생하고 있으나 아스팔트로 길을 포장하는 개발로 말미암아 팽나무가 많이 훼손됐다.
 제주도 한림읍 명월리 팽나무 군락지. 양반촌으로 설촌된 명월리는 '청풍명월'이란 말의 유래가 된 고장이다. 마을 중심에 팽나무 수백여 그루가 자생하고 있으나 아스팔트로 길을 포장하는 개발로 말미암아 팽나무가 많이 훼손됐다.
ⓒ 유창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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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월리에서는 올레를 벗어나 큰길로 나오면 '팽나무 군락지'(제주도 기념물 제19호)를 만날 수 있다. 깊으면서도 좁은 내 양옆으로 오래된 팽나무들이 줄 서 있는 곳이다. 1980년대까지 무성했으나 아치형 돌다리가 소실될 정도의 큰 홍수와 태풍으로 팽나무들도 많이 유실됐다고 한다.

특히 관광지 개발로 인해 제주도 곳곳마다 아스팔트 도로를 깔면서 자연이 훼손됐다고 하는데, 이곳 명월리도 대표적인 곳이라고 한다. 함께 명월리를 찾은 아내의 오촌 아저씨의 설명에 따르면 팽나무 위를 덮고 있는 흙을 아스팔트로 깔아놓으면서 나무가 죽어갔던 것. 그래서 마을 주민들이 도에 항의했고, 현재는 팽나무 위쪽을 걷어내고 나무로 걷는 길을 만들어놨다고 한다.

하지만 이미 인간의 욕심에 의해 훼손된 팽나무들은 다시 살아나지 못하고, 잘려나간 나뭇가지와 나무 등걸 곳곳에 상처를 안은 채 서 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곳은 찾아가기 불편하더라도 흙길이나 자갈길 그대로 남겨뒀으면 어땠을까.

할아버지와 함께 걸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차가 쌩쌩 달려가는 편안한 아스팔트 도로보다 울퉁불퉁 발바닥을 간질이며 지압도 해주는 옛길이 그리웠다.

'찔레꽃'의 국민가수 백난아, 노천목욕탕, 그리고 비양도

명월리 중동천변에는 수백 년 된 팽나무가 자생하고 있다. 그 가운데 옛날 선비들이 시를 읊고 풍류를 즐기던 '명월대'가 있다.
 명월리 중동천변에는 수백 년 된 팽나무가 자생하고 있다. 그 가운데 옛날 선비들이 시를 읊고 풍류를 즐기던 '명월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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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월리에는 이외에도 볼거리가 많다. 앞서 소개한 중동천변 팽나무 군락지 안에는 '명월대'라는 곳이 있다. 이미 명월(明月)이라는 지명이 범상치 않음을 눈치 챘나? 설명에 따르면 1300년 전에 양반촌으로 형성된 명월리는 경치가 수려하여 시인, 문인들이 즐겨 찾아 시문을 읊던 곳이란다. 그래서 '청풍명월'이란 유래로 명월이라 한다.

더군다나 수백 년 된 팽나무 수백 그루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으니, 글줄이나 읽고 풍류를 아는 선비들이 그 중심에 명월대를 만들고, 이곳에서 시를 읊고 음풍농월을 했던 장소란다. 과연 절묘한 장소에 명월대가 있다. 그 옆에는 특수 고안, 건축된 석교인 명월교가 있다.

명월대 앞쪽에 세워진 '찔레꽃' 가수 백난아 기념비.
 명월대 앞쪽에 세워진 '찔레꽃' 가수 백난아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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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월대 앞으로 커다란 비석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노래 '찔레꽃'으로 유명한 국민가수 '백난아'(본명 오금숙)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비석이다. 설명을 들어보니, 백난아의 고향이 바로 장인의 고향과 같은 명월리였다.

그 뒤로는 폐교가 된 '명월국민학교'가 있는데, 이곳은 제주 전통 옷인 갈옷의 천을 보존, 제작하는 곳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검은 현무암 가루로 된 모래가 깔린 운동장에는 갈옷 천이 햇볕에서 말려지는 것을 볼 수도 있다. 학교 뒤편에서 바다를 바라보면 제주도에서 손꼽는 아름다운 섬 비양도가 보인다. 반대쪽에는 한라산과 명월오름의 원경을 감상할 수 있다.

명월리의 또다른 볼거리 '짐수레물'. 왼쪽이 물허벅으로 물을 길어다 먹던 우물이고 오른쪽이 공동 목욕탕이자 빨래를 했던 곳. 우물은 1960년대까지 사용했다고 한다.
 명월리의 또다른 볼거리 '짐수레물'. 왼쪽이 물허벅으로 물을 길어다 먹던 우물이고 오른쪽이 공동 목욕탕이자 빨래를 했던 곳. 우물은 1960년대까지 사용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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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걸음을 돌려 명월대로 와서 그 옆에 있는 명월교를 넘어가면 제주 지역의 독특한 마을 공동 우물과 노천 목욕탕을 볼 수 있다. 제주 사투리로 '짐수레물'이라고 부른단다. 1960년대까지 우물을 이용했다고 한다. 사진이나 제주 민속박물관에서 물허벅을 지고 가는 해녀들을 볼 수 있는데, 이들이 이곳에서 물을 길어 올레를 걸어 집으로 갔다고 한다.

또 노천 목욕탕인 짐수레물의 경우 남녀가 저녁때 시간을 나눠 목욕했고, 빨래도 하는 공동 공간이었단다. 또 사람뿐만 아니라 말들도 이곳에서 목욕시켰다고 한다. 물이 귀한 섬이다 보니 밤에 목욕을 하고 나면 팔뚝에 진흙이 덕지덕지 붙어 있기도 했다고 이 마을에서 오랫동안 사신 아내의 오촌아저씨께서 설명해주셨다.

최영 장군의 대몽고 항전지인 명월석성. 현재 복원이 중단된 상태.
 최영 장군의 대몽고 항전지인 명월석성. 현재 복원이 중단된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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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월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선 최영 장군이 대몽 항전을 펼쳤던 명월석성도 볼 수 있다. 현무암으로 쌓은 성지인데, 현재 예산문제 등으로 복원 작업이 중단된 상태. 일제강점기 시절 한림읍 군수가 이 석성의 가치를 몰라보고, 석성을 쌓은 돌을 가져다가 바다 방파제를 만드는 데 사용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제와서 후손들이 석성을 복원하려다 보니 비용 문제 등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처럼, 길을 통해 할아버지의 개인 삶뿐만 아니라 시대의 역사를 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한 세대에서 묻힐 수도 있는 이야기와 역사, 자연·문화 유산을 그다음 세대로 이어주는 역할을 길이 해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번 여름휴가 때 아이들과 함께 부모님의 고향 길을 걸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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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꽃 불게 피는 남쪽 나라 내고향'의 가수 백난아


'찔레꽃'의 가수 백난아. 그녀는 장인의 고향과 같은 명월리에서 태어났다.
 '찔레꽃'의 가수 백난아. 그녀는 장인의 고향과 같은 명월리에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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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꽃은 '하얀색'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찔레꽃은 '붉다'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찔레꽃'이란 노래 때문이다.

"찔레꽃 불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 / 언덕 위에 초가삼간 그립습니다. / 자주고름 입에 물고 눈물 젖어 /이별가를 불러주던 못 잊을 사람아"  - '찔레꽃' 중

가수 백난아(본명 오금숙)은 1927년 5월 16일 제주 한림읍 명월리 1750번지에서 태어났다. 1940년 일제강점기 시절에 '오동동극단', '망향초사랑'으로 데뷔한 그녀는 1992년 폐암으로 사망하기까지 '찔레꽃', '낭랑십팔세' 등 민중의 애환과 한을 달래 주는 노래를 불렀다.

가수 백난아를 기념하기 위해 지난 2008년 '국민가수백난아기념사업회'(회장 오경욱)가 만들어졌다. 같은 해 12월 국민가수 백난아 기념비가 건립됐다.

올해에는 오는 7월에 백난아 관련해서 다채로운 기념행사가 마련된다. 특히 비양도가 바라다보이는 협재해수욕장에서 ▲7월 25일 백난아의 삶을 조명해 보는 학술행사와 추모도민가요제가 열리며, ▲다음날인 26일 '제1회 백난아 가요제'가 개최될 예정이다.


태그:#고향 길, #제주, #명월리, #백난아, #찔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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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대통령실 마감하고, 서울을 떠나 세종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진실 너머 저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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