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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현박물관은 역사적으로 전통양식 건축물의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내고 있다.

 바람으로 목욕을 한다는 뜻으로 지어진 풍욕대

제2경인고속도를 타고 안양으로 내달리다 보면 서해안 고속도로와 만나기 직전, 전통양식의 건축물을 만날 수 있다. 그곳은 조선시대 청백리로 이름을 날린 오리 이원익 선생의 사적이다.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이원익 선생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데, 조선시대의 명재상으로 이름을 떨치며 임금과 백성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고 한다.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에 위치한 충현박물관. 그곳은 이원익 선생의 얼이 담긴 곳으로 외진 곳에 있어 생각만큼 찾기 쉬운 곳은 아니다. 그래서 좀 더 차근차근 동네 한 바퀴 산책하는 기분으로 찾아나 서면 꽤 고풍스럽게 잘 지어진 한옥집을 발견할 수 있다. 그곳은 박물관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유물을 전시해 놓은 전시장으로 착각하는 이들이 종종 있다.

 

하지만 겉모양새에서 풍기듯 한옥으로 잘 지어진 충현박물관은 전시장이라고 하기엔 담긴 것들이 너무 많다. 그곳은 이원익 선생이 말년을 보냈던 사저와 인조 임금이 하사한 관감당, 오리영우, 사당, 그의 후손이 머물던 종택 등 이원익 선생의 모든 것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키웠던 나무와 거문고를 탔다던 바위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으니 말이다.

 

 청렴함을 목숨처럼 지키며 나갔던 이원익 선생

가진 것이 많은 것을 부끄러워했던 이원익 선생

 

이원익 선생은 조선시대 3명의 임금을 모신 신하로 충정이 깊었고, 백성들에게 존경의 대상이었다. 또한 황희-맹사성과 함께 3대 청백리로 이름을 떨쳤는데, 가진 것이 많은 것에 대해 늘 부끄럽게 여겨 한평생을 무소유 정신으로 살았다고 한다. 그런 이원익 선생의 유서에서도 그러한 면모를 볼 수 있다.

 

1630년 11월 21일 아들 의전과 손자 수약에게 남긴 유서의 내용은 이러하다. 

 

"내가 죽거든 절대 후하게 장사지내지 말고 단지 수의와 연금으로 시체를 싸고, 외관이 있거든 석회를 쓰지 말고 석회가 있거든 외관을 쓰지 말라. 시제와 속절의 묘제 제물은 단지 정결히 할 뿐 풍성과 사치하지 말도록 하고 십여접시에 그치도록 하라"

 

1599년 9월 15일 쓴 글에는 "세상 사람 중에 형제가 화목지 못하는 것을 보면 대부분 부잣집에서 그러한데, 이것은 재물이 있으면 다툴 마음이 생겨 천륜을 상하게 하니, 재물이 바로 빌미가 되는 것이다. 자손들은 절대로 옳지 못한 재물을 모으지 말고 불인(不仁)한 부를 경영하지 말라. 다만 농사에 힘써 굶어죽는 것을 면하면 옳을 뿐이다"라고 했다.

 

이처럼 이원익 선생은 꼿꼿한 정신을 지키며 평생 임금과 백성, 나랏일에 매진했고, 실제로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원익 선생은 선조 때 청백리에 뽑혔으며 문장이 뛰어나고 성품이 원만해 정적에게도 존경을 받았다. 임진왜란 때는 평안도 순찰사, 도체찰사가 되어 왜군과 맞서 싸워 큰 공을 세웠으며 그 공로로 선조 37년(1604년)에 호성공신 2등으로 완평부원군에 봉해지기도 했다.

 

1608년 대동법 시행을 건의해 백성의 조세부담을 줄이고 상공업의 발달을 촉진시켜 경제를 발전시켰다. 또한 이원익 선생은 문장에 뛰어났으며, 남인에 속했으나 성격이 원만하여 정적들에게도 호감을 샀다. 인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고, 여주의 기천서원(沂川書院) 등 여러 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오리문집(梧里文集)> <속 오리집(續梧里集)> <오리일기(梧里日記)> 등이 있다.

 

 두칸짜리 초가집에 살던 이원익 선생을 아끼던 인조임금이 하사한 관감당

두칸짜리 초가집이 전부였던 이원익 선생

 

이처럼 이원익 선생은 청렴함과 경세가로서의 면모를 선보여 늘 임금이 가까이 하고자 했다. 그러한 모습은 일화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인조 임금은 결국 "지금 국가의 일로 말한다면 결코 윤허할 수 없다"면서 "다만 생각하건대 경이 오랜 병중에 있으면서 바로 해직되지 못하는 것을 근심한다면 필시 병을 조리하는 데 방해가 될 것이기에 부득이 억지로라도 경의 뜻에 부응해 주어야 하겠다"며 그의 청을 들어주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흔적을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충현박물관. 충현박물관 앞마당을 기준으로 왼편의 작은 계단을 타고 오르면 이승규-이종민-이장호 등 이 교수의 3대 직계손의 문패가 달린 종택이 버티고 있다. 종택은 ㄱ자 형의 안채와 ㅁ자 형의 행랑채가 배치되고, 그 옆에는 ―자형 사랑채가 달린 형태로 건축학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사실 이원익 선생의 사적지가 너른 땅에 위치한 것은 이들 덕분이다. 평생 청렴하기로 소문났던 이원익 선생이지만 후손들이 부를 쌓은 덕택이다.

 

그 종택을 지나 옆으로 보면 충현박물관 경내에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건물 하나가 있다. 그것은 바로 이원익 선생이 말년에 머물던 '관감당(觀感堂)'이다. 이 건물 역시 이원익 선생의 청렴한 모습을 볼 수 있는 일화가 숨어 있다. 

 

인조 임금이 승지를 보내 병중의 오리(悟里)를 문안케 하였다. 이에 문병을 마치고 온 승지는 '두 칸 초가에 겨우 무릎을 들일 수 있는데 낮고 좁아서 모양을 이루지 못하며 무너지고 허술하여 비바람을 가리지 못한다'고 보고했다. 그러자 임금은 "재상이 된 지 40년이나 되었는데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니, 청렴하고 결백하며 가난에 만족하는 것은 고금에 없는 일"이라면서 집을 지어주라고 명했다.

 

 이원익 선생의 영정을 모신 오리영우

하지만 관감당을 이원익 선생에게 주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이원익 선생이 네 차례에 걸쳐 받기를 사양했기 때문이다. 1630년 인조 임금이 경기 감사에게  을 내려 지어준 집으로서 백성들로 하여금 '보고(觀) 느끼도록(感) 하라'는 임금의 뜻이 고스란히 당호에 반영된 것이다. 관감당은 방 2개와 작은 마루가 하나 있는 이 집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낡을 대로 낡아 1917년 10대손 이연철(1870~1938)이 기둥만 남기고 새로 복원했고, 1980년대 화재로 소실됐다가 이 교수에 의해 개축한 것이다.

 

이어 관감당 앞에는 이원익 생전에도 있었던 약 400년 수령의 측백나무와 탄금암(彈琴岩)이라는 한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측백나무 밑자락에 놓인 평평한 생김새의 탄금암은 이원익이 살아 있을 때 그곳에서 거문고를 타던 곳이라 하여 이름을 그리 지었다고 한다. 관감당 뒤편으로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61호인 오리영우(五里影宇)가 있다. 내부에 경기도 유형문화재 80호인 이원익의 영정이 모시어져 있다.

 

이밖에도 이원익 선생의 유서, 친필 등  204종 637점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이처럼 충현박물관에는 이원익 선생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데, 정치권이 비리로 얼룩져 대한민국의 국민을 힘들게 하는 요즘, 이원익의 선생의 평생 소신을 우리가 소중히 지켜야 할 자산이 아닐까 싶다.

덧붙이는 글 | 덧붙이는 글 | 부정부패의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요즘, 자라나는 아이들을 위해 [청렴여행] 연재 시리즈를 마련했습니다. 내 아이의 교육을 위해 시작한 작은 일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기 바랍니다. 앞으로 [청렴여행- 선비정신]이라는 주제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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