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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고 음악이 흐르면 난 당신을 생각해요

당신이 떠나시던 그 밤에 이렇게 비가 왔어요

비가 내리고 음악이 흐르면 난 당신을 생각해요

당신이 떠나시던 그 밤에 이렇게 비가 왔어요

난 오늘도 이 비를 맞으며 하루를 그냥 보내요

오~ 아름다운 음악 같은 우리에 사랑의 이야기들을

흐르는 비처럼 너무 아프기 때문이죠

비가 내리고 음악이 흐르면 난 당신을 생각해요

당신이 떠나시던 그 밤에 이렇게 비가 왔어요

난 오늘도 이 비를 맞으며(비를 맞으며) 하루를 그냥 보내요

아름다운 (아름다운) 음악 같은 (오~~)우리에 사랑의 이야기들을

흐르는 비처럼 너무 아프기 때문이죠

그렇게 아픈 비가 왔어요

 

-작사·작곡 박성식, 노래 김현식 '비처럼 음악처럼' 모두

 

나는 어릴 때부터 비를 참 좋아했다. 어른이 된 지금도 비가 내리는 날이면 이상하게 집안에 가만히 틀어박혀 있지 못했다. 비 내리는 창밖을 오래 바라보다가 딱히 갈 곳도 없으면서 우산을 챙겨들고 집 밖으로 나와 가까운 공원을 찾아 서성거렸다. 비에 촉촉이 젖어 동그란 물방울을 굴리고 있는 풀잎들에서 나는 상큼한 풀내음이 못견디게 좋았다.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내가 태어나 살았던 창원에는 요즘처럼 비가 새지 않고 디자인도 멋진 우산을 구경하기가 힘들었다. 우산이라고 해봐야 나뭇가지에 살짝 닿기만 해도 쉬이 찢어지고, 바람이 조금만 세게 불어도 우산대가 부러지면서 뒤집어지는 비닐우산뿐이었다. 까닭에 비가 세차게 내릴 때면 우산을 쓰고 있어도 옷이 흠뻑 젖기 일쑤였다.

 

나는 비가 올 때마다 그런 비닐우산을 들고 탱자나무 울타리가 있는 오솔길을 서성거리거나 빗방울이 닿을 때마다 무수한 동그라미가 예쁘게 그려지는 연못가를 찾아 그야말로 '비 맞은 생쥐' 꼴이 되어 거니는 것을 참 좋아했다. 그렇게 온몸을 비에 흠뻑 적시다 보면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으면서 세상이 새롭게 보였다.

 

그래서일까. 지천명을 살아오는 동안 내 삶도 비를 닮은 것 같다. 꼭 한 번도 쨍, 하고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날이 없었다. 내 삶 앞에 놓인 길은 늘 비에 촉촉이 젖은 진흙탕 길이었고, 곳곳에 얕은 물웅덩이가 내 발목을 빠뜨리게 했다. 내 사랑도 그랬다. 스무 살 때 내가 만난 여자들도 한결같이 내게 눈물빛 슬픔을 안겨주었다.     

 

 

노래 속에 나오는 '당신'이라는 여자 기다리다

 

1980년대 들머리였던가. 내가 창원공단 현장 노동자로 일하고 있었던 그해는 가뭄이 심하게 들어 두어 달 동안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다. 탁상선반에 매미처럼 매달려 쇠를 열심히 깎다가도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생산부로 가 '외출' 혹은 '조퇴'를 하고서라도 비에 젖어 쏘다니기를 좋아했던 나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그날, 나는 하루 일을 마치고 저녁햇살이 쨍 하게 내리쬐는 하늘을 원망스레 바라보며 집으로 터벅터벅 걸어오다가 냇가로 내려갔다. '손으로 하늘을 향해 물을 퍼 올리면 비가 오려나' 생각하며. 그때 냇가를 낀 탱자나무 울타리 집에서 김현식의 '비처럼 음악처럼'이 나직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노래는 정말 음표를 타고 흐르는 비처럼 다가와 순식간에 내 몸과 마음을 흠뻑 적셨다.

그때 나는 노래 한 곡이 사람 마음을 한꺼번에 사로잡을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때부터 '비처럼 음악처럼'은 내 18번이 되었다. 그 노래만 듣고 있으면 내 몸과 마음이 비에 젖어 촉촉해졌다. 그때부터 나는 그 노래 속에 나오는 '당신'이란 여자를 '가뭄 속 단비'처럼 애타게 기다리기 시작했다.

 

이듬 해 2월 끝자락, 첫 봄비가 가늘게 내리는 날이었다. 그날도 나는 '비처럼 음악처럼'을 나직하게 부르며, 우산도 없이 젖빛 안개에 잠겨 있는 공원으로 갔다. 해마다 이른 봄이면 매화가 하얗게 피어나는 그 공원은 창원공단이 들어서면서 새로 생긴 둥지처럼 아담하고도 포근한 느낌을 주는 공원이어서 마음이 울적할 때마다 자주 찾는 공원이었다.

 

스무 살 때 사랑은 '비처럼 음악처럼' 흘렀다

 

"저어기~ 우산 같이 쓰실래요?"

"???"

"왜 혼자 비를 맞고 다니죠? 저도 그 노래 참 좋아하는 데..."

"......"

 

그 여자와 나는 그렇게 첫 봄비와 함께 만났다. 내 나이 스무 넷, 그 여자 나이 스물이었다. 그때부터 우리는 하루가 멀다 하고 그 공원에서 만나 '비처럼 음악처럼'을 나직하게 불렀다. 내가 노래를 부를 때마다 그 여자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고, 손을 자연스레 잡았고, 입도 맞추었다. 새끼 손가락을 걸고 손도장 찍고 복사까지 하며 결혼을 약속했다.

 

내 스무 살 때 사랑은 '비처럼 음악처럼' 그렇게 아름답게 흐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 사랑이 '비처럼 음악처럼' 우리 둘 몸과 마음 속 깊숙이 영원하게 흐를 줄 알았다. 그해 가을, 하필이면 가랑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그 여자가 거짓말처럼 삼천포로 떠났다. 마산에 있는 수협에 다니던 그 여자 아버지가 삼천포로 발령이 났다는 것이었다.

 

내 사랑이 내 곁을 떠나던 날, 그 여자는 "내년 첫 봄비 내리는 날 시간에 관계없이 늘 만나는 공원에서 만나자"고 했다. 나는 그 말을 가슴에 새기고 또 새기며 이듬 해 첫 봄비 오는 날이 어서 다가오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그 여자가 보고 싶을 때마다 '비처럼 음악처럼'을 나직하게 불렀다.    

 

이듬 해 봄날 오후. 첫 봄비가 내리는 날, 나는 공장에서 조퇴를 하고 서둘러 공원으로 나갔다. 하지만 공원에는 사람 그림자조차 얼씬거리지 않고 비에 젖은 목련 꽃잎만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그렇게 1시간이 지나고 2시간이 지나고 3시간이 지나 캄캄한 밤이 될 때까지도 그 여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다.

 

나는 행여나 행여나 하면서 그 공원에서 첫 봄비에 흠뻑 젖은 채 벌벌 떨며 날밤을 새웠다. 하지만 그 여자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당신이 떠나시던 그 밤에 이렇게 비가 왔어요 / 난 오늘도 이 비를 맞으며 하루를 그냥 보내요'라며 내가 부르던 노래도 비에 잡은 매화 꽃잎처럼 공원 곳곳에 하얗게 떨어져 내렸다. 

 

 

'비처럼 음악처럼'을 부르며 삼천포행 버스를 탔다

 

다음 날 새벽, 나는 '비처럼 음악처럼'을 나직하게 부르며 마산시외버스터미널로 가서 삼천포행 버스를 탔다. 공장에는 몸이 심하게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결근을 하기로 마음을 다졌다. 그날, 삼천포로 가는 들녘 곳곳에는 젖빛 안개가 내리는 봄비를 마시며, 그 여자 하얀 얼굴처럼 다가왔다 멀어졌다 했다.

 

"여기 000씨 계시죠?"

"어, 그 분 한 달 전에 서울로 이사 간다고 직장을 그만 뒀는데요."

"네에? 그럼 연락처라도..."

"옛날 집 연락처 밖에 없네요"    

 

그때부터 나는 그해 내내 공장 일을 마치고 나면 그 공원에 홀로 앉아 막걸리를 몇 병씩이나 비우며 비처럼 많은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비처럼 음악처럼'을 아무리 많이 불러도 그 여자에게서는 소식이 없었다. "우리에 사랑의 이야기들을 / 흐르는 비처럼 너무 아프기 때문"이라는 노랫말처럼.

 

나는 지금도 첫 봄비가 내릴 때마다 그 여자가 못 견디게 그리워 '비처럼 음악처럼'을 나직하게 부른다. 하지만 그 여자는 내가 술을 많이 마신 날마다 꿈속에 나타나 입을 살짝 맞추었다 어디론가 실루엣처럼 사라지곤 할뿐이다. 지금이라도 그 여자와 연락이 된다면 꼭 한번 만나 따지고 싶다. 그때 왜 그렇게 소식을 뚝 끊을 수밖에 없었냐고.

덧붙이는 글 | <유포터>에도 보냅니다


태그:#그 여자, #비처럼 음악처럼,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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