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묘한 작전과 선수 기용으로 승리를 이끈 김인식 감독

절묘한 작전과 선수 기용으로 승리를 이끈 김인식 감독 ⓒ 유성호

 

"국가가 있고 야구가 있는 거 아닙니까. 국가가 없으면 야구가 무슨 필요가 있어요?"

 

지난 2008년 11월 25일 당시 서울 도곡동 야구회관에서 열린 '제2회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 감독 수락 기자회견에 참석한 김인식 한화 감독이 기자들에게 이야기했던 발언이다.

 

당시만 해도 WBC를 둘러싼 국내 여론은 최악이었다. 저마다 '뜨거운 감자'를 떠맡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기피하면서 WBC 사령탑은 독이 든 성배가 된 지 오래였고, 베테랑 선수들은 대표팀 차출을 피하는 분위기였다. 

 

김인식 "국가가 있고 야구가 있다"

 

3개월에 걸쳐 표류하던 WBC 사령탑을 결국 김인식 감독에게 떠넘기며 야구계는 한숨을 돌렸다. 하지만 당시 대표팀 분위기는 미래에 대한 장밋빛 희망보다는 원치 않은 임무를 억지로 떠맡아 사지로 내몰린 결사대를 연상시키듯 쓸쓸하고 비장하기만 했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김인식 감독은 2004년 뇌경색으로 한 차례 쓰러진 이후 여전히 거동이 불편한 상태다.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무거운 임무를 떠맡은 김인식 감독은 아무도 맡지 않으려던 '불가능한 임무'를 다시 한번 기꺼이 감수하면서 '국가'를 강조했다. 그것은 어쩌면 야구팬들 앞에서 불신과 이기주의로 점철된 야구계와 야구인들에게 던지는 노장의 격정적인 호소와도 같았다.

 

누구도 성공을 장담할 수 없고, 자칫 잘못하면 대표팀의 실패는 물론, 자신의 소속팀 성적과 평생을 지켜온 개인의 야구인생의 명예도 훼손될 수 있는 절박한 상황에서, 김인식 감독은 용기있게 오로지 국가의 명예라는 대의명분을 위하여 기꺼이 '독이 든 성배'를 받아들였다.

 

그로부터 약 4개월 후, 김인식 감독이 이끄는 대한민국 야구대표팀은 또 한 번 미국 땅에 태극기를 꽂았다. 일본야구의 중심부이던 도쿄돔에서 숙적 일본을 꺾고 아시아 라운드 1위를 달성한 데 이어, 이번엔 주최국이자 야구종가를 자랑하던 미국의 샌디에이고 펫코파크에서 또 한 번 일본을 누르고 2회 연속 4강 직행을 확정지으며 마운드에 태극기를 세우는 자랑스러운 승자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2009 WBC 4강 신화- 1회 WBC나 올림픽보다 더 특별한 이유

 

김인식호의 성공은 지난 2006년과는 또 다른 감동을 가진다. 이것은 어쩌면 초대 WBC 대회를 넘어, 지난 베이징올림픽의 전승 우승이나 축구의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 이상의 의미를 지닌 센세이션이라고 할만하다.

 

왜 그럴까. 지난 1회 대회 때 한국은 최상의 선수 구성과 준비과정을 걸쳐 WBC에 참가했다. 박찬호, 이종범, 이승엽, 김동주, 박진만, 서재응, 구대성, 김선우, 김병현, 최희섭 등, 메이저리거들과 베테랑 선수들이 주축을 이뤘다. 최고의 선수들이 한 자리에 모였고, 선수구성이나 코칭스태프 선정에 있어서 어떤 불협화음도 없었다.

 

하지만 이번 대표팀은 시작부터 달랐다. 주축 선수들이 잇달아 개인사정으로 대표팀을 고사하며 메이저리거는 추신수 한 명뿐이고, 대부분 국내파와 20대 위주의 젊은 선수로 팀이 대폭 물갈이됐다. 감독은 물론이고 코칭스태프 구성에서도 내내 크고 작은 잡음이 끊이지 않았고, 김인식 감독은 시작부터 끝까지 주변의 비협조 속에 자신이 원하는 선수단의 70%도 제대로 구성할 수 없었다.

 

그러나 김인식 감독은 주변의 환경만을 탓하기보다 묵묵히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쪽을 택했다. 대표팀은 이름값은 떨어지는 대신, '팀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하나되어 뭉쳤다. 김인식 감독은 젊은 선수들에게 국가를 대표하여 뛴다는 자부심을 어느 때보다 강조했다.

 

사실 이번 WBC는 지난 대회나 베이징올림픽같은 병역면제와 같은 특혜도 없었다. 98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 프로선수로 구성된 드림팀이 처음 구성된 이래, 국제대회 참가에 따른 별다른 메리트가 없었던 첫 대회이기도 했다. 하지만 우려했던 것과 달리, 선수들의 동기부여 상실이나 정신력 해이와 같은 문제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선수들은 메이저리거들을 앞세운 세계적인 강호들에 맞서 한국 프로야구의 자존심을 걸고 '한 번 해보자'는 투지로 똘똘 뭉쳤다.

 

또한 이번 WBC는 엄밀히 말해 미국의 기획력과 일본의 자본력이 영합한 상업 이벤트였다. 대진 편성에서 경기 일정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미국과 일본의 입맛대로 좌지우지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2 월드컵같은 홈 어드밴티지도 없고, 세계 각국의 메이저리거들이 총동원되는 대회 수준은 올림픽과도 레벨이 달랐다. 자칫 한국을 비롯한 다른 국가들은 자칫 이번 대회에서 철저하게 미·일의 들러리로 전락할 수도 있었다. 상업 자본이 지배하는 스포츠 이벤트에서 주류도 아닌 변방에 불과했던 한국으로서는, 매경기 척박한 타지에서의 텃세와 불리한 조건을 감수해야 했다. 

 

메이저리거 하나 없이도 이룩한 4강행

 

그러나 한국은 모든 이의 예상과 악조건을 극복하고 1·2라운드에서 5승 1패를 기록하며 미국과 일본보다 뛰어난 성적으로 4강행을 확정지었다. 이것은 세계 누구도, 심지어는 우리 자신도 확신하지 못했던 놀라운 성과였다. 메이저리거 출신의 대형스타도, 경기외적인 어떤 어드밴티지도 부여받지 못한 상황에서 오로지 우리 선수들의 순수한 실력만으로 일궈낸 업적이라는 데 그 가치가 빛난다.

 

아시아라운드 2차전에서 일본에 당한 한 차례의 콜드게임 패배는 오히려 느슨해질 뻔했던 선수들의 승부근성을 다시 깨우는 전화위복이 되었다. 한국 선수들은 이후 고비마다 강한 집중력을 선보이며 연승행진을 이어갔고, 두 차례의 재대결에 걸쳐 일본에 통쾌하게 설욕하는 데 성공했다.

 

메이저리거 한 명 없이도 봉중근·류현진·윤석민이 이끄는 한국의 마운드는 철옹성이었고, 이승엽과 김동주 없이도 김태균·이범호·이진영·이용규가 이끄는 한국 타선의 화력은 막강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적재적소의 투수운용과 과감한 용병술로 선수들의 재능을 극대화하는 김인식 감독의 '대인배 야구'가 밑바탕이 되었다.

 

2009년 WBC 4강신화는 순수한 한국 프로야구만의 저력을 세계에 확인시켰다는 것, 또한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어내는 '팀 코리아'의 강인한 의지와 단결력을 야구라는 스포츠를 통해 입증했다는 데 무엇보다 큰 의미를 지닌다.

 

대한민국 대표팀은 베이징올림픽에 이어 다시 한번 야구라는 스포츠를 통하여 줄 수 있는 최상의 감동과 기쁨을 조국과 국민들에게 선사했다. '국가가 있고, 야구가 있다'는 노장의 간절한 출사표가 인고의 시간을 거쳐 마침내 결실을 맺는 순간이기도 했다.

 

김인식 감독은 이번 4강신화를 통하여 이제 현역 '국민 감독'을 넘어, 야구 역사에 기록될 '국민적 레전드'의 반열에 올랐다고 할만하다. 미국의 베이브 루스나 행크 아론, 일본에 오 사다하루(왕정치)나 나게시마 시게오가 있다면, 우리에게도 이제 김인식이라는 야구영웅이 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독이 든 성배를 기적의 성수로 바뀌어낸 김인식 감독의 지도력과 함께 '팀코리아'의 신화를 만들어낸 모든 대한민국 선수들의 투혼에 박수를 보낸다.

덧붙이는 글 | 유포터에도 송고

2009.03.19 10:29 ⓒ 2009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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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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