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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콧구멍에 바람 좀 쐬러 가요?"

"그래. 어딜 갈까? 작년 이맘때쯤이면 복사꽃이 피었는데. 올해도 피었을까?"

"물 한 병만 준비해서 청도쪽으로 가봐요. 쑥도 좀 뜯어와요."

"햇쑥이 손마디쯤 웃자라 있겠지."

 

휴일 아침 아내가 봄바람 쐬러가자고 했다. 그렇잖아도 오늘쯤은 바깥나들이를 나설참이었다. 내친 김에 서둘러 집을 나섰다. 읍내를 벗어나자 이내 들판을 가로지른다. 올 같은 봄 가뭄에 양파 마늘은 용케도 잘 자랐다. 새파란 이파리가 봄햇살 아래 하늘댄다. 세상살이가 아무리 팍팍해도 푸성귀들은 시새워 자란다.

 

 

세상살이 아무리 팍팍해도 푸성귀들은 시새워 자라

 

풍각을 지나 청도에 다다르는 길목. 야트막한 산자락은 온통 복숭아밭이다. 그래서 해마다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핀다. 그러나 오늘은 과수원 어디를 다녀봐도 복사꽃 한 송이 보이지 않는다. 도무지 꽃망울을 터뜨릴 기미를 없다. 한껏 기대에 부풀어 갔는데 너무 이르게 찾은 것일까. 가지마다 촘촘하게 꽃망울을 맺었어도 꼭 다문 꽃잎은 봄볕을 쬐고 있을 뿐이었다.

 

봄을 앞질러간 생각 때문이었을까. 한참을 그렇게 섰다가 문득 발아래를 내려다보고는 놀랐다. 그런데 이게 웬 횡재냐? 복숭아밭 이랑마다 새파랗게 싹을 틔우고 있는 냉이가 지천으로 돋아 있었다. 그저께 내린 봄비로 땅거죽이 촉촉하게 젖어 있어 그냥 손으로 잡아당기기만 해도 한 옴큼 뿌리째 뽑혔다. 아내는 연신 즐거운 기분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닐봉지 한 가득 찼다. 욕심을 내어 한 봉지 더 캐고 나서 과수원을 벗어나려는데 저만치 밭두둑에 한 무리 달래가 웃자라 있었다. 서둘러 다가가서 달래된장국을 끓일 만큼 충분히 캤다. 냉이와 달래가 한 무더기로 품어내는 향이 진했다. 

  

"어쩜 이렇게 냉이랑 달래가 많을까요? 혹시 과수원에서 키우는 게 아닐까요?"

"왜? 너무 많아서 겁이 나. 땅이 좋아서 그런 걸 거요. 애써 재배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아."

"물론 그렇겠죠. 하지만 하도 많다 보니 얼핏 그런 생각이 드네요."

"나도 이렇게 살찐 냉이를 한꺼번에 많이 캔 것은 처음이야."

 

 

 

 

 

 

 

 

 

 

 

 

 

 

 

 

 

 

 

 

 

 

많아도 탈이다. 그만큼 봄 들판은 먹을거리가 수두룩하다. 채 한 시간 정도의 손놀림으로 두 봉지 가득 냉이를 캤으니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으리라. 복숭아밭머리를 벗어나서 보니 손바닥 전체에 냉이 진액이 잔뜩 묻었다. 신발도 덩그랗게 흙신을 껴신었다. 봄나들이 치고는 그다지 싫지 않은 선물이다. 마치 고양이 세수하는 것처럼 생수로 흙 묻은 흔적만 살짝 지웠다.

 

모처럼 봄나들이를 한 수확으로 얻은 게 너무나 컸던지 아내의 얼굴이 해맑다. 조그만 것 하나라도 크게 만족하는 아내.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쑥을 더 캐고 가잖다. 그러면서 미리 준비해 둔 칼을 슬쩍 내민다. 그렇잖아도 매년 아내랑 쑥 캐는 것으로 봄 마중을 했는데, 딴청을 부릴 재간이 없어 다시 차를 몰았다. 한참을 가다보니 저만치 밭두렁에 봄나물을 뜯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가만가만 다가가보니 한 소쿠리 가득 봄나물을 뜯었다.

 

 

그런데 그것은 달래도 냉이도 쑥도 아니었다. 넌지시 물어봤더니 작년 가을에 봐 두었던 '씬냉이'를 캐고 있다고 했다.

 

"아주머니, 지금 캐는 게 뭐예요? 나물해 먹는 건가요?"

"나물도 해먹지요. 그렇지만 요즘은 이파리가 웃자라지 않아 나물은 못해먹어요. 그 대신에 뿌리 채 캐서 씬냉이김치를 담가먹지요?"

"아, 네. 몇 번 먹어 본 적이 있는데, '씬냉이'라면 '고들빼기' 맞죠?"

"도시사람들은 그렇게 부르지만, 우린 그냥 '씬냉이'라고 불러요."

"그런데 '씬냉이김치'는 어떻게 담가요?" 

 

"두 분 다 씬냉이를 처음 보는 것은 아니지요? 일반적으로 '씬냉이'는 '쓴나물', '씬나물'이라고도 하지요. 겨울이 끝나는 무렵부터 이른 봄에 그 어린  뿌리를 싹이 붙은 채로 캐서 나물이나 김치로 만들어 먹어요. 씬냉이는 그 자체로는 쓴맛이 강해서 먹지 못하고 소금물에 삼사 일 정도 우렸다가 깨끗이 씻어 물기를 빼고서 새우와 멸치젓국(액젓)에다 마늘, 생강, 고춧가루 양념에다 양파, 쪽파, 물엿은 약간 넉넉히 넣어 버무려요. 그러면 맛깔스런 씬냉이김치가 되지요. 이때 찹쌀풀도 약간 쑤어 넣는 것은 필수에요. 씬냉이 좀 드릴까요. 김치 담가 먹을래요?"

 

하지만 아내와 나는 엄두가 나지 않아 씬냉이를 캐는 것을 마다한 채 인근 묵정밭으로 향했다. 햇쑥을 뜯기 위함이었다. 청도 읍내를 조금 벗어난 지점.헌데, 아직 밭두둑에 얼굴을 내민 햇쑥이 그리 많지 않았다. 총망스럽게 새싹을 내놓기에는 보름쯤 기다려야할 것 같았다. 며칠째 봄비 내리고 날씨가 추운 탓인지 올해 꽃잔치나 봄나물은 어딜 가나 꿈 뜨고 있다.

 

올해 꽃잔치나 봄나물은 어딜 가나 꿈 뜨고 있어

 

근데도 밭두둑에는 벌써 봄나물꾼들이 다녀간 흔적이 역력했다. 다른 곳으로 옮길까 했지만 아내는 여기서 조금 뜯고 가잖다. 이삭을 줍는 마음으로 군데군데 남아있는 쑥을 하나하나 캤다. 먼저 다녀간 분들이 큼지막한 쑥을 뜯었다면 우리는 겨우 잎사귀를 내밀고 있는 어린 쑥을 찾아가며 캤다. 그런데 너무나 살이 통통하게 찐 놈들이었다.

 

"여보, 사람들이 참 고약하다 그치? 겨우내 매서운 바람을 이겨내고 이제 막 세상에 얼굴을 내밀고 있는 여린 싹을 싹둑싹둑 잘라버리자니 좀 미안한 생각이 들어."

"응, 그래. 다 생명이 있는데 세상에 안착하기도 전에 자른다는 게 마음이 아리네."

"단지 한 끼 식사로 이렇게 많은 쑥을 캔다는 것이 우리의 욕심이겠죠."

"허허허, 그렇게 생각한다면 딱 굶고 살면 좋겠네."

"꼭 그런 뜻으로 한 얘기는 아니에요."

 

 

 

 

 

 

 

 

 

 

 

 

 

 

 

 

 

 

 

 

 

 

 

 

 

 

 

순간 아내의 볼이 발갛게 상기됐다. 마흔 중반의 나잇살을 가졌어도 아내는 여전히 사춘기 소녀 같은 심성을 고스란히 지녔다. 그런 것을 보면 아내가 너무 소중하다. 봄 들녘에서 새삼스레 변함없는 아내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는 데 감사하다. 봄날이 아니었다면 이런 기분을 느껴볼 수 있었을까.

 

봄 들녘에서 느끼는 변함없는 아내의 향기

 

집에 도착하니 칠순 노모님은 두 손을 받쳐들고 온 냉이를 반기기보다는 추운 날 한데서 며느리 고생시켰다며 눈을 부라리신다. 그렇지만 이내 햇쑥을 보고는 반응이 달랐다. 요즘 같은 때 이렇게 좋은 쑥을 어떻게 뜯었냐며 곧바로 쑥국 끓일 준비에 바빴다. 머쓱한 기분은 잠시. 어머니는 쑥국을 책임지고 끓이시고, 아내와 나는 서둘러 냉이를 씻고 데치고, 무쳤다. 냉이 부침개도 서너 장 부쳤다. 온 집안이 냉이 쑥국으로 가득 찼다.

 

 

 

 

 

 

 

 

 

 

 

 

 

 

 

 

봄 마중에 참으로 신실한 하루였다. 어느덧 봄은 우리 곁에 성큼 다가와 있었다. 덕분에 오늘 저녁은 봄 향기로 가득한 진수성찬이었다. 포만감에 겨운 저녁을 마친 뒤 아내는 특유의 익살로 살짝 문자메시지를 남겼다.

 

"여보, 알지?

사는 의미가 따로 있남요?

오늘처럼 조그만 것에 만족하며 살아요."


태그:#냉이, #달래, #쑥, #봄맞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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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국기자는 2000년 <경남작가>로 작품활동을 시작하여 한국작가회의회원, 수필가, 칼럼니스트로, 수필집 <제 빛깔 제 모습으로>과 <하심>을 펴냈으며, 다음블로그 '박종국의 일상이야기'를 운영하고 있으며, 현재 김해 진영중앙초등학교 교감으로, 아이들과 함께하고 생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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