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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슬란드에서도 살인사건이 일어나나요?"

"정말 드문 일이지요."

 

아날두르 인드리다손의 2002년 작품 <목소리>에서, 주인공인 형사반장 에를렌두르가 미국인 관광객과 대화하는 장면이다.

 

지금은 미국발 금융위기 때문에 만신창이가 됐지만, 그 전까지만 해도 아이슬란드는 북유럽의 평화로운 복지국가였다. 그런 나라에서도 살인사건은 발생한다.

 

LA에서처럼 조직폭력단이 거리를 휩쓸고 다니는 일은 없지만, 사람이 사는 곳이니 만큼 강도나 살인같은 강력범죄는 발생하기 마련이다.

 

아이슬란드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무슨 이유로 범죄를 저지를까. 이것이 궁금하다면 아날두르 인드리다손의 '에를렌두르 시리즈'를 읽어보면 된다. 이 시리즈는 한국의 독자들에게는 낯선 장소인 아이슬란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목소리>는 이 시리즈의 5번째 작품이다. 이전 작품인 <저주받은 피> <무덤의 침묵>에서처럼 아이슬란드의 수도인 레이캬비크를 무대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우울한 내면과 욕망, 파탄나버린 가정을 그리고 있다.

 

레이캬비크의 고급호텔에서 발견된 시신

 

<목소리>의 시작은 크리스마스를 일주일 앞둔 겨울이다. 레이캬비크의 한 대형호텔의 지하실 단칸방에서 중년의 호텔 직원이 칼에 찔려 죽은 채로 발견된다. 이 직원은 호텔의 도어맨이면서 온갖 잡일도 함께 맡아 하고 있었다. 대신에 호텔의 지하실을 자신의 집처럼 이용했다.

 

이 직원은 호텔에서 '굴리'라는 이름으로 불리웠지만 다른 직원들과는 거의 대화가 없던 인물이다. 에를렌두르는 호텔의 지배인과 수석웨이터 등을 상대로 탐문수사를 시작하지만 별로 성과가 없다. 굴리가 약 20년 전부터 지하실 생활을 해왔다는 것 외에는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에 한 가지 단서를 잡는다. 굴리가 어린 시절에 소년성가대원으로 활동하며 몇 장의 음반을 발표했던 어린이 스타였다는 점이다. 굴리는 소년시절 빼어난 목소리를 자랑하는 보이 소프라노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당시 해외진출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그 바닥에서 인정을 받았다. 그런데 수십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굴리는 호텔의 지하실에서 초라한 생활로 남은 인생을 보내고 있었다.

 

에를렌두르는 여기에 촛점을 맞춘다. 수소문 끝에 굴리의 아버지와 누나를 찾아내고, 그의 음반을 추적하는 음반수집가도 수사의 대상이 된다. 성과는 별로 없다. 굴리는 그의 가족들과도 그동안 연락이 없었고, 음반수집가는 단지 굴리의 명성을 추종했던 것뿐이다. 굴리의 죽음 이면에는 어떤 숨겨진 동기가 있을까?

 

소설에서 묘사하는 아이슬란드의 사람들

 

독특한 사건도 사건이지만, <목소리>를 읽다 보면 형사반장 에를렌두르에 많은 관심이 가게 된다. 50대의 이혼남인 에를렌두르 역시 굴리 못지 않게 어려운 인생을 살고 있다. 20여년 전에 이혼한 아내와는 원수지간이 됐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과 딸은 실패한 결혼의 산물이다.

 

딸 에바는 마약중독으로 인생을 낭비하고 있고, 아들은 이미 알콜중독 치료시설을 여러 차례 거친 상태다. 에를렌두르는 자신이 아이들을 망쳤다는 자책감과 상실감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혼자 사는 텅빈 집에 들어가봐야 아무런 낙도 없고 범인을 잡아도 성취감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에를렌두르도 굴리처럼 자신만의 지하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변화한다. 전작에서 에바는 에를렌두르에게 "내가 마약중독이 된 건 아빠 때문이야!"라고 소리치며 대든다. <목소리>에서는 에를렌두르가 에바에게 "아빠가 네 어린 시절을 빼앗았지?"라고 다정하게 묻는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생활을 이어가지만, 에바도 조금씩 아빠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에를렌두르는 에바에게 "집에 가자"라고 말하며 함께 거리로 나선다. 오랜 방황끝에 이들에게도 돌아갈 '집'이 생긴 것이다.

 

아날두르 인드리다손은 언제까지 '에를렌두르 시리즈'를 이어갈까. 작품을 읽다 보면 에를렌두르와 주변 인물들이 어떻게 변해갈지 궁금해진다. 작가가 풀어놓는 범죄의 내막보다도, 그가 창조한 인물들에 더 많은 호기심이 생겨난다. 범죄소설이란 기본적으로 인간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목소리> 아날두르 인드리다손 지음 / 이기원 옮김. 영림카디널 펴냄.


목소리

아날두르 인드리다손 지음, 이기원 옮김, 영림카디널(2009)


태그:#목소리, #아날두르 인드리다손, #에를렌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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