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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일(1.2)

트레킹 일정표
14 : 50   벤커(BENKAR. 2905m)
16 : 20   몬조(MONJO. 2835m)
          (마운트 칼리시 롯지 Mount Kalish lodge)

팍딩을 떠나면서부터 설산 탐셰르쿠(6618m)의 위엄 있는 모습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었고, 좌측으로는 빙하가 녹으며 만들어 놓은 비취빛 강물이 천지를 개벽할 듯 소리를 내뿜으며 흐르고 있었다. '우윳 빛의 강'이라는 뜻을 가진 두드코시강이다.

포터 나란의 나이는 48세라고 한다. 부모를 모시고 두 딸과 아들, 아내와 함께 카트만두에 살고 있는 구룽족이며, 매우 행복하다고 말한다. 큰 딸은 조만간 남자 친구와 결혼을 할 예정이란다. 7명의 대가족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나란의 모습이 더 왜소해 보였다. 다시 한 번 우리의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나란의 모습에 아련히 마음이 아파온다. 아픔과 함께 가슴 깊이 떨려오는 이 감정은 무엇일까? 나는 단순한 동정심의 느낌 너머 치열한 인간의 삶을 묵도하고 있는 것이다.

지나치는 마을마다 불탑인 스투파와 옴마니 반메훔 등 진언이 새겨진 마니석을 만난다.
▲ 스투파(불탑)와 마니석 지나치는 마을마다 불탑인 스투파와 옴마니 반메훔 등 진언이 새겨진 마니석을 만난다.
ⓒ 윤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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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셰르쿠(Thamserku. 6618m) 때문에 고개를 숙일 수가 없다.
▲ 조금씩 가까워지는 설산 탐셰르쿠(Thamserku. 6618m) 때문에 고개를 숙일 수가 없다.
ⓒ 윤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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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킹 초입부터 고산증세를 보이는 후배의 몸이 무거워 나와 나란이 먼저 길을 열었다. 
팍딩에서 2시간 30여 분 걸려 히말라야의 첫밤을 보낼 몬조에 도착하였다. 계획상에는 3시 이전에 트레킹을 마치라는 충고에 따르기로 했지만, 비행기가 하루 취소되는 바람에 계획을 수정하고 서둘러 일정을 진행시켰다.

후배는 몸도 안 좋고, 제대로 먹지도 못해 롯지에 도착하자마자 침낭 속에 누워버렸다. 이후 일정이 걱정된다. 몬조의 이 롯지에는 외국인과 한국의 어떤 여행사에서 단체로 관광을 온 세 명의 아줌마가 묵고 있었다. 아줌마들은 내일 남체에 도착한 후 샹보체와 쿰중에서 에베레스트 조망을 본 후 하산을 한단다.

이분들은 달밧을 먹고 있는 우리 옆에서 한국인 가이드의 친절한 안내와 함께 ‘백숙 만찬’을 먹고 있다. 탁자에 올라온 닭이 내가 알던 닭이 아닌 듯 먹음직스러움이 없다. 여행의 많은 부분이 돈과 비례한다. 돈이 없는 우리는 ‘가슴과 열정’으로 배고픔과 추위를 사랑해야 한다.

여기에서의 샤워(hot shower) 비용은 150루피이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어제 만난 영어 스터디 아저씨와 백두산님의 강한 충고가 생각났다. 고산병에 걸리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머리를 감거나, 세면, 샤워 등은 자제하라는 것이었다. 밖으로 배출되는 열을 막아 산소의 순환을 자유롭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무료로 제공되는 야외 세면장에서 물로 입만 간단히 헹구고 발만 씻고, 샤워는 속옷을 갈아입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네팔까지 와서 문명의 편리함을 누리는 것이 사치스럽게 느껴졌다. 단순한 관광이 아닌 네팔인들의 현지 문화와 풍습을 있는 그대로 체험하는 여행을 하고 싶다.  

여행객 대부분은 식당(dining-room) 중앙에 피워놓은 난로 주위에 모여 담소를 나누었다.  이국의 낯선 땅에서  새로운 만남을 맺고 삶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여행의 놓칠 수 없는 매력이다. 미국인으로 보이는 두 여자는 가이드와 함께 계속 즐거운 이야기꽃을 피웠는데, ‘만약 나도 원활한 의사소통이 가능할 만큼의 국제어 능력이 있다면, 현지인과의 깊은 대화를 통해 그들의 삶과 문화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생겼다. 귀국해서 아내의 도움으로 영어 회화에 전력을 쏟아볼까?

영어를 생각하니 어제 숙소에서 만나 함께 식사를 한 분이 생각났다. 그는 몇 년전 한국에서 10년 동안 자동차 정비를 하다 모든 것을 다 정리한 후 인도로 넘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12월, 네팔로 넘어와 방을 잡아 놓고 2~3년 동안 눌러 앉아 영어를 배울 계획이란다. 지금도 개인 영어 강습을 받고 있는데, 영어 능력이 어느 정도 되면 미국이나 유럽으로 가서 자신이 진짜 원하는 일을 찾겠다고 하였다. 몇 년 간은 오직 영어 공부만을 위해 모든 힘을 쏟아 붓겠다는 그의 열정이 뜨겁게 전해진다. 난 그를 '영어 스터디 아저씨'라고 부른다.

영어, 곧 언어는 분명 그의 삶을 확장시켜 놓으리라. 하지만 그가 ‘지월(至月, 손으로 달을 가리킴)’의 오류를 범하지 않기를 빈다. 중국의 옛 선문답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부처의 참뜻을 묻는 어느 선사의 질문에 수행자는 묵묵부답 침묵을 지키며 앉아 있다가, 대답 대신 하늘에 떠 있는 달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런데, 저 달을 보라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더니, 보라는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멍청한 녀석아, 달을 보라는데 왜 손가락을 보는 것이냐? 이 구절은 달을 보지 못하고 손가락을 보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말하고자 함이다. 손가락은 달을 가리키기 위한 수단이요, 방편(方便)일 뿐이다. 수단과 방편에 얽매여 본질을 찾지 못하면 안 된다. 이 다리를 건너는 것은 바로 저 곳을 가기 위한 디딤돌인 것이다.

불교에서는 영원한 진리란 없다. 오직 깨달음을 얻기 위한 도구적 수단일뿐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절대적 진리에 입각한 다른 종교와 달리 '이단'이 성립되지 않는다. 깨달음에 도움이 된다면 그냥 가져다 쓰면 되는 것이다. 수단과 목적이 전도되어서는 안 된다. 언어 또한 삶의 지평을 넓히기 위한, 소통을 위한 수단일 뿐 결코 목적이 될 수는 없다. 모든 언어는 우리 삶의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이 아니다.

수단과 목적이 중첩되는 현장은 오직 삶뿐이리라.

밤 8시 취침 전에 바라본 히말라야의 하늘은 비단에 수놓은 화려한 문양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금수천(錦繡天)이라 할까? 특히, 탐셰르쿠 위에 보이는 성군은 두려움조차 일게 하는 신비스러운 것이었다. 셀 수 없는 많은 별들이 곧바로 대지로 쏟아져 내릴 듯 위압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작고 초라한 나를 본다. 하지만 저 별들이 나를 향해 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작고 연약한 내가 세상의 중심이 아닌가? 별들에게서 자연과 생명의 에너지를 흡수한다. 그리고 별과 같이 살라 말한다. 어둠을 밝히는 사람이 되라 한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태복음 5장 13~16절]

여기에서 말하는 빛과 소금(Light and Salt)은 무엇을 이름일까? 이어지는 구절에서 그 답을 찾아보자.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치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마태복음 5장 38~47절]

새 계명을 너희에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한복음 13장 34절]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Passion of Christ)]에서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며 했던 바로 그 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영화를 보며 나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양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흐르는 눈물이 들킬세라 훌쩍거리는 호흡에서 아집(我執)과 증오로 가득 찬 나의 영혼을 보았다. 세상을 밝히는 ‘빛’은 바로 ‘사랑’이었다.

원수까지 용서하는 사랑! 무조건적이고 희생적인 아가페적 사랑! 어떤 이유가 있어서, 어떤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그 사람의 전부를 끌어안는 성스런 사랑이다. 날 사랑한 후, 내 삶을 사랑할 수 있고, 내 삶을 사랑한 후 타인을 사랑할 수 있고 그들의 삶을 사랑할 수 있으리라. 결국 이 사회를 보다 사람답고, 정의롭게 만드는 것은 사랑의 실현에 대한 믿음과 작은 실천일 것이다.

기독교라는 종교적 범주를 너머 예수의 가르침 속에는 인간에 대한, 그들의 삶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 담겨 있다. 사랑하라! 그리고 자신을 구원하라! 영혼과 마음은 신을 향해 찬양하고 경배하되, 그 두 손은 세상에서 지치고 쓰러져 한숨짓는 자를 향해 내밀어야 하고 두 발은 날 필요로 하는 어두운 곳을 향해 걸어야 한다. 신을 향한 경건한 신앙은 씨줄이 되고, 인간을 향한 따뜻한 사랑은 날줄이 되어 아름다운 세상을 엮어내야 한다.

세상의 모든 아픔을 서로 보듬어 주고 치유해 주는 곳, 사랑으로 모든 갈등과 차별을 품어 주는 곳! 천국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사는 현실에 있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며 살고 있는 이 곳! Here and Now! 천국이다.

방으로 들어오며 쿠시에게 우스갯소리를 해 보았다.
“Oh! Scary star!”
그는 재밌다는 듯 실실 웃을 뿐이었다.

※ 단순한 기행문이 아니라 그곳에서 느끼고 고민했던 내용과 관련된 동서양 사상가의 사상을 빌려와 철학적 채색을 하였습니다.(공자에서 샤르트르까지)


태그:#히말라야, #네팔, #에베레스트, #트레킹,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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