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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일(1.1)

출발에 대한 기대감으로 눈을 뜨자 새벽 5시 22분. 5시에 모닝콜을 신청해 놓았었는데, 스탭들이 ‘깜빡’했나 보다. 서둘러 씻고 식사를 한 후 5시 40분에 오기로 한 가이드를 기다렸다. 그러나 기다려도, 기다려도 그는 오지 않았다. 7시 비행기에 탑승해야 하는데, 첫날부터 가이드 때문에 일정에 차질이 생길까봐 마음이 초조해졌다. 그는 6시 40분이 되어서야 허둥지둥 숙소의 문을 열고 나타났다.

"Too late. I'm very angry."

나의 단호한 말에 '미안하다' 말하는데, 입에서 연신 술 냄새가 짙게 묻어났다. '어제 밤 친구들과 진하게 술 한 잔 했구나'라고 짐작하며, 그의 지각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음을 이해한다. 

하지만 이날 그가 늦게 온 것은 앞으로 닥쳐올 불행의 서막에 불과했다. 7시 공항에 도착, 루크라행 비행기를 기다리며 많은 사람들을 배웅해 주었다. 홍콩에서 만났던 기러기 아빠와 이런 저런 담소를 나누고, 9시 30분 그를 떠나보냈다. 그리고 9시 40분,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출발지인 포카라행 비행기에 탑승하는 서울 부부를 친절히 배웅하였다.

"인철씨, 먼저 갈게요. 곧 오겠죠. 이곳은 네팔이잖아요."

이들의 멋진 앞날을 기원하며 루크라행 비행기를 기다리지만, 깜깜 무소식이다. 님의 침묵이다. 드디어 11시, 우울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Cancle' 네팔 비행기가 몇 시간 정도 연착되는 것은 다반사라고 했는데, 이렇게 비행 자체가 취소된다는 것은 생각도 못한 터라 적잖이 당황하였다.  

3시간 여를 기다리다 안개때문에 비행기 '캔슬'을 당하다. 카트만두는 '안개의 도시'라는 뜻이란다.
▲ 카트만두 국내선 공항 3시간 여를 기다리다 안개때문에 비행기 '캔슬'을 당하다. 카트만두는 '안개의 도시'라는 뜻이란다.
ⓒ 윤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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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에 돌아와 허탈한 마음을 라면으로 달랬다. 도착 때부터 컨디션이 좋지 않은 후배를 침대에 누이고, 별 목적 없이 타멜거리로 향했다. 타멜에 가던 중 릭샤가 많이 서 있기에, 호기심으로 '아산바자르까지 얼마냐'고 물어보았다. 아산바자르는 카트만두에서 가장 큰 재래시장이다. 이 기회에 릭샤도 타 보고 시장도 구경할 겸 릭샤를 타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가 부른 가격은 20루피였다. ‘아니 왜 이렇게 싸지?’ 곧바로 올라타 아산바자르로 이동을 하는데, 릭샤 운전수가 운전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계속 뒤돌아보며 나에게 말을 건넸다. 갑자기 릭샤를 멈추고 사진을 찍자고도 하고, 중국인 친구가 운영하는 가게에 가자느니, 한국인을 많이 알고 있다거니 하며 쉴 새 없이 치근덕거리고 꼬드겼다.

바자르에 도착했을 때 그는 나에게 2달러를 요구하였다. 2달러면 루피로 150루피쯤 되는 돈이다. 황당할 뿐이다! 난 분명히 ‘투엔티’로 들었는데, 뭔가 착오가 있는 것 같아 기분 좋게 50루피를 준다고 하였다. 그러자 갑자기 알아듣지도 못하는 영어와 네팔어를 섞어가며 불평불만을 쏟아 내는 것이 아닌가? 시장 한 복판에서 이런 사정이 생기니, 난처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어쩔 수 없이 100루피는 주며, 내가 영어로 할 수 있는 가장 심한 말을 한다. 'You are bad boy.(넌 나쁜 녀석이야)' 티벳인이며 자식까지 하나 있다는 그대여, 양심의 법정에 당신을 회부하리라.

왠지 그의 얼굴에서 ‘자본주의의 그림자’가 읽혀진다. 하지만 어찌 그만을 탓하리요.

아산바자르는 옛날 우리 시골의 재래시장과 같은 곳이었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개미 상점들과 수많은 상인들, 그리고 사람들. 발 디딜 틈조차 없이 네팔리로 거리가 넘쳐나고 있었다. 외국인을 보면 달려드는 호객꾼이 몇 미터에 한 명씩 있어 지나가는 발목을 계속 붙잡았는데, 그들은 좋은 먹잇감을 노리고 있는 굶주린 하이에나 같았다.

시장을 벗어나 자동차가 많이 다니는 곳(New road)으로 가니 사찰 비슷한 거대한 건축물들이 줄지어 있었다. 이리 저리 둘러보다 듀발 스퀘어라는 영어 표지판을 찾을 수 있었다. 카트만두의 구왕궁으로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훌륭한 네팔의 문화재였다. 관광객은 별로 없고, 젊은 네팔 남녀들이 연애를 하는 장소인 듯 그들의 초롱초롱한 눈빛이 거리를 낚시질하고 있었다.

카트만두의 구왕궁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젊은 남녀들이 사랑을 낚시질 하고 있었다.
▲ 듀발 스퀘어 1 카트만두의 구왕궁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젊은 남녀들이 사랑을 낚시질 하고 있었다.
ⓒ 윤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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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나의 어설픈 우월감이, 자본주의적 시각이 저들을 값싼 인생으로 만들지 모르리라.
▲ 듀발 스퀘어의 노점상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나의 어설픈 우월감이, 자본주의적 시각이 저들을 값싼 인생으로 만들지 모르리라.
ⓒ 윤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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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길에 광장에서 기념품을 팔고 있는 노점상을 지나치는데, 상점마다 지나가는 나에게 'Are you japanese?'하며 간절한 눈빛을 함께 보냈다. 네팔에 온 기념으로 민속 공예품을 하나 정도 사고 싶어, 나이 드신 분이 운영하는 노점상에 들렸다. 가격을 물어보니 생각보다 비싸고 트레킹을 마친 후 사는 것이 나을 것 같아 '단냐밧(감사합니다.)'하며 정중히 빠져나왔다.

아뿔싸, 그곳을 떠나 온 길을 되짚어 가는데, 방금 전에 들렸던 노점상의 할머니와 손녀가 내가 눈여겨 보았던  물건을 들고 계속 뒤따라오는 것이 아닌가. 곁에 따라 붙어 날 쳐다보는 할머니와 소녀의 슬픈 눈망울이 마음을 찡하게 하였다. 가만히 두 손을 모으고, 죄송하다며 양해를 구해본다. 발걸음이 무겁다. 뒤돌아 그들을 살짝 훔쳐본다. 그리고 속삭인다.

'그래, 가난이라는 잣대 하나로 저들을 불쌍히 여기고 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나의 어설픈 우월감이다. 있는 그대로 저들을 생각하자. 저들은  동정심을 판매전략으로 관광 상품을 파는 경제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단지, 그 뿐이다. 슬퍼한다는 자체가 저들과 저들의 삶에 대한 멸시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자본주의가 저들을 값싼 인생으로 전락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의 자본주의적 시각이 저들을 비하하는 것일지도 모르리라.    

올 때의 반값인 50루피에 릭샤를 잡아타고 숙소 바로 앞 마낭 호텔 입구에서 내렸다. 그런데 갑자기 일면식도 없던 이상한 네팔리가 다가오더니,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묻는 것이었다. 별 생각 없이 '한국인'이라고 대답하자, 그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큰 소리를 말했다. 

"You look nepali!"

숙소에 돌아와 동행한 후배에게 얘기를 해 주니, 이 나라 사람들은 참 정직하다며 웃었다. 이곳에까지 와서 얼굴색 때문에 상처를 받다니. 하지만 잠시 후 자문해 보았다. 왜 그들과 닮았다는 것이 상처가 될까? 무엇이 부끄러운 것인가? 갓 태어났을 때의 우리 아들이 생각난다. 사람들은 아들을 보고 말했다.

"뽀얀 것이 참 예쁘네요."

하지만 이 말 속에는 피부색에 대한, 인간을 향한 심각한 차별과 편견이 내포되어 있다. 그는 하얀 색 우윳빛 피부를 가진 아이이기 때문에 예쁜 것이다. "까무잡잡한 것이 참 예쁘네요"라는 말을 들어본 기억이 없다. 이렇게 우리들과 세상은 보이지 않는 차별에 익숙해져 가는 것이다.

가운데를, 다양성을, 서로를 인정하지 못하는 이분법! 나는 옳고, 그들은 틀리다? 나는 정답이고, 그들은 오답이다? 언제부터인가 세상은 양자택일을 강요한다. 하지만 세상을 향해 자신있게 외치자. "나와 그들은 다를 뿐이다"라고. 나도 옳고, 그들도 옳을 수 있으며, 나도 틀릴 수 있고 그들도 틀릴 수 있다. 왜? 우린 똑같은 인간이자, 불완전하고 오류가 많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얼굴도, 생각도, 가치관도, 삶의 방식도 다른 인간들이 모여 조화로운 사회를 만든다. 동(同)이 아닌 화(和)의 세상 말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다움'이고, 인권(人權), 관용이다. 생각이, 행동하는 방식이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똘레랑스이다.

한 아줌마가 어린 딸과 함께 슈퍼마켓에 갔습니다. 슈퍼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물건을 고르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동남아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도 있었습니다. 귀엽고 예쁜 여자 아이를 본 외국인 노동자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눌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이~뻐~요!" 그러자 갑자기 아이의 엄마가 아이를 쓰다듬던 외국인 노동자의 손을 뿌리치며 불쾌하게 소리쳤습니다. "더럽게 어딜 만져요?" 왜 그는 더러운 사람일까? 아니 왜 더러운 사람이 될 수 밖에 없을까?

지하철에서 한 아이가 외국인 노동자를 보며 물었습니다. "엄마, 저 아저씨는 왜 얼굴이 까만 거야?" "응, 안 닦아서 그래."

위의 두 이야기는 우리들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인간의 야누스적 이중성! 세상은 차별과 멸시로 상처받은 그들에게 다가가 아픔을 어루만져 주지 않는다. 그 대신 자본주의의 영광을 홍보하는 CF가 위로해준다. "당신도 백옥과 같은 피부를 가질 수 있습니다." 얼굴색이 검은색인 당신에게 그들은 '이 사회에서 인간대접을 받을 수 있는' 살색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준다. 자기를 부정하라고 가르치는 세상이다. 피부색 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는 성별, 외모, 성적, 장애, 사랑의 방식, 빈곤, 가치, 종교 등의 이유로 무수한 형태의 차별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썩소를 날리는 세상!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한 단편이다.

'얘들아, 나 교장 선생님을 사랑하게 되었어!'
'으악, 선생님 변태! 더러워!'
'사랑이 죄니? 난 남자인 교장 선생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인 교장 선생님을 사랑하는 것이야. 그것이 더러운 사랑이고 변태니?'  

'얼굴도 못 생긴 게, 공부도 못하네!'
'사내새끼가 계집애처럼 훌쩍거리기는.'
'너 같이 예쁜 애가 왜 이런 곳에서 일하니?'
'병신, 지랄하고 자빠졌네!'

인간에게는 하늘에서 부여한 자유의지가 있기에 자신이 원하는 삶을 선택하고 영위할 수 있다. 하늘이 부여한 인간의 권리, 즉 ‘천부인권(天賦人權)’은 특정인에게만 부여된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공평하게 부여된 보편적 가치이다. 다수라는 이유로 소수의 권리와 취향이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이를 정치적으로 확대시켜보면 프랑스 정치학자 토크빌이 떠오른다. 그는 민주주의의 핵심적인 제도인 '다수결의 원칙'의 어둡고 흉악한 얼굴을 지목했고, 이를 '다수의 횡포!'라고 명명하였다. 그는 현대 사회의 구성원들이 개인의 이익에만 지나치게 집착하면서 공동체적 유대 관계는 점점 해체되고 가고 있으며, 통제불가능한 개인주의가 확대됨에 따라 국가는 혼란에 직면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런 위험을 막기 위해서는 개인들을 하나로 응집시킬 수 있는 힘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여론'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여론의 힘이 강해짐에 따라 개인의 다양한 의견보다 다수가 형성한 여론이 지적, 정치적 권위를 형성하게 되고, 결국 개인들은 다수의 의견에 복종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수의 횡포이자, 폭력이다.

특히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사회적 힘과 권력을 지배한 소수가 여론을 조작해 다수를 하나의 가치로 이끌고, 그와 반대 의견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을 소외시킨다는 것이다. 소수에 의한, 소수에 대한 다수의 폭력이다.

토크빌은 소수의 가치와 권익을 보호하는 시민 사회의 사회 참여 등의 장치들이 미국식 민주주의가 잘 운영되는 핵심이라고 했다. 민주주의의 가치는 ‘자유’이고 ‘평등’, ‘인권’이다. 그리고 소수자를 위한 가치와 권리를 인정하고, 보호해 주는 것이 민주주의의 중요한 역할이다. 그렇게 따지면 나의 외모와 얼굴색이 네팔 사람들과 닮았다는 이유 때문에 불쾌해 하지 않는 것이 민주주의의 출발 아닐까? 얼굴색이 검다는 것, 그것은 그저 색이 다를 뿐 어떤 가치와 의미의 문제는 아니다. '다름'일 뿐이다.  

숙소로 돌아와 자동차 정비소를 경영하다 모든 사업을 정리하고 인도와 네팔로 떠나온 영어공부 아저씨와 세계일주 중인 청년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후 내일을 기약했다. 내일은 자연의 신이 우리를 너그럽게 받아주어야 할 텐데. 안개여, 바람이여!    

※ 단순한 기행문이 아니라 그곳에서 느끼고 고민했던 내용과 관련된 동서양 사상가의 사상을 빌려와 철학적 채색을 하였습니다.(공자에서 샤르트르까지)


태그:#히말라야, #네팔, #트레킹, #철학, #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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