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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권자들의 무관심 속에서 소수 기득권 세력이 주도해 온 정치, 규제 완화와 개발주의 일변도의 정치는 유권자들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옵니다. 특히 지역정치, 즉 '풀뿌리정치'가 전횡과 부패, 이권 등으로 썩어가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를 다잡기 위해서는 풀뿌리부터 흔들어야 합니다. <오마이뉴스>는 풀뿌리 정치를 살리기 위해 그간 정치의 대안을 고민해온 시민사회 모임 '좋은정치 씨앗들'과 공동으로 기획기사를 내보냅니다. 독자와 시민기자 여러분의 많은 제언과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자말>

최근 시민운동이 옛날 같지 않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가령 지난해 촛불시위는 시민운동가들이 주도하지 않아도 훨씬 잘 조직되고 진행됐다. 이는 우리가 상상하는 시민운동적 방식은 이젠 시민운동가의 것이 아니라 대중의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시민운동이 낡은 소통방식과 운동방식을 버리지 않는다면 예전 같은 위치를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민운동은 정치적으로 중립?

 

이 예전 같지 않은 시민운동을 정의하는 개념 가운데, 시민운동의 변화를 옥죄는 것이 '시민운동의 정치중립'이다. 이는 시민운동의 정체성처럼 돼 버렸다. 그 배경에는 한국 시민운동의 장을 열었다고 평가되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의 창립이 있다. 경실련은 '시민운동은 기존의 민중운동과 달리 비정파적'이라고 규정했다. 물론 처음부터 시민단체들이 선거참여 자체를 부정적으로 본 것은 아니었다.

 

1991년 지방자치선거 당시 시민단체 인사들이 '지방자치는 시민운동의 영역'이라며 출마했지만 모두 낙선하고 말았다. 시민운동가들은 이 때 직접 경험한 선거문화의 후진성이야말로 정치개혁의 주요 문제라고 인식했다. 그래서 공명선거캠페인, 정책선거캠페인 등 선거문화와 정치과정에서 공정한 룰의 확립이라는 과제를 사회적으로 제기했다.

 

시민운동이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의견은 이 때부터 일반화됐다. 시민운동의 정치적 중립은 1990년대 시민운동의 중요한 특징이었으며 이를 통해 사회적 신뢰를 획득한 것도 사실이었다.

 

별다른 의심이 없던 이 문제가 논란이 된 것은 2000년 총선연대의 낙선운동 때문이었다. 서경석, 이석연 등 경실련의 전 사무총장들은 낙선운동에 대해 시민운동의 정체성인 정치적 중립을 훼손하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당시 총선연대는 어느 특정정당의 편에 있기보다 낡은 정치문화의 개혁이라는 대의 위에 있었고 그것은 어느 특정 정당에 대한 공격으로 기획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서경석, 이석연의 문제제기는 정치적 사안에 대해 시민운동이 목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라면 모르지만(이런 문제제기를 할 리 없겠지만) 정치적 편향에 관한 것이라면 틀린 것이었다. 그럼에도 시민운동은 낙선운동이 정치적 중립의 틀 내에서 이루어진 정치개혁이었다고 평가했고, 이후에도 정치적 중립은 변하지 않는 원칙인 것처럼 여겨졌다.

 

낙선운동 이후 김대중, 노무현 정부 아래서 일부 시민운동가들이 정부의 성격과 개인적 결단에 의해 정관계로 진출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리고 이는 10년 내내 정치편향 논란에 휩싸이는 단초를 제공했다. 지금도 시민운동은 그 언저리 어디에 있는 것처럼 각인되고 있다. 시민운동은 그간 일관되게 정치적 중립을 지키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홍위병' 운운하는 한나라당과 우익인사, 그리고 우익언론의 무차별적으로 공격에 그대로 노출됐다.

 

하지만 '시민운동 정치중립'의 주창자이기도 했던 서경석과 이석연은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또 과거 '정치적 시민운동'을 격렬하게 성토했던 뉴라이트는 지금 현 정권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낯빛을 180도 바꾼 이들의 모습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민주노동당 의회 진출로 입지는 더 좁아지고...

 

 

그때나 지금이나 정치적 발언을 하기는 마찬가지인데, 2000년 이전에는 왜 이런 논란들이 없었을까? 그것은 우리의 정치지형과 깊은 관련이 있다. 1990년대까지 우리 정치는 지역과 보스에 기초한 보수정당들의 각축장이었다.

 

그러나 2002년 대선 당시 노사모의 출현은 다른 변화를 보여주었다. 특정한 정치적 견해를 매개로 한 사회개혁에 시민단체들보다 대중이 먼저 나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 시민단체의 출현 앞에 상대적으로 대선유권자연대로 모인 시민단체들의 활동은 작아 보이기만 했다.

 

더구나 2004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의회에 진출하면서 시민운동의 정치적 중립은 더욱 초라해지기 시작했다. 정책비교를 해보아도 민주노동당이 훨씬 시민운동에 가까웠지만, 실현가능성이라는 항목으로 다른 정당에 비해 낫지 않다는 평가를 내리곤 했다. 그러한 시민단체들의 결정 뒤에는 정치적 중립이라는 족쇄가 작용했다고 보아야 한다.

 

정치·사회적 조건이 이미 가치를 중심으로 나뉘어 갈등과 협력을 반복하는 시기에는 사실 정치적 중립이 설 자리가 없다. 시민운동의 요구 자체가 이미 특정한 가치를 지향하는 만큼 그 행위는 기본적으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1990년대 정치적 중립이란 정치에서 공정한 룰에 관한 것이니만큼 중립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각종 제도적 요구와 개혁적 요구엔 이미 특정한 가치지향이 담겨 있다.

 

이제 시민운동은 하나가 아니다. 가치지향이 다양하며, 그에 기반한 행위들을 조직한다. 여전히 정치적으로 중립적 위치에서 경쟁의 룰에 관한 주장과 요구로 운동하는 단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개혁에 관한 각종 요구를 내걸고 활동하는 경우, 이미 특정한 가치를 지향하는 정치세력들이 권력을 향해 움직이는 한 시민운동이 기계적인 정치적 중립을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지금 시민운동의 가치지향을 온전하게 대변하는 정치세력이 우리 사회에는 없다.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이 부분적으로 대변할 뿐이다.

 

46%의 투표율과 정치의 위기

 

지금까지 시민운동은 정치적으로 심판 노릇을 하려 하거나 아예 관객의 위치에 불과했다. 그나마 지난 총선의 경우에는 늘 하던 심판 노릇도 하지 못했다. 낙선운동 이후 10여 년 가까이 시민운동은 정치개혁에서 특별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지난 총선 투표율 46%가 말해주듯이 시민들은 정치의 관객으로 전락했고, 시민운동도 그다지 다른 처지에 있지 않다.

 

그러나 시민운동이나 시민이 정치를 외면할 때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향한 주장과 목소리는 정치 영역에서 소외되거나 배제되기 마련이다. 이명박 정부의 경제지상주의를 향한 각종 법률안이 이를 잘 보여준다. 빈부격차와 사회양극화, 생태적 위기, 공동체성의 파괴 같은 것이 이처럼 시민들이 배제된 정치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결국 우리들이 마주하고 있는 문제들은 46%의 투표율이 보여주는 민주주의의 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낙선운동을 통해 사람을 바꾸어 봐도 공동체의 삶은 나아지지 않고, 정치적 시민단체를 만들어 '내가 권력을 잡아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사람을 당선시켜 보아도 변화하지 않는 삶의 현실을 보며 시민들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냉소만 깊어 갔다.

 

그런 점에서 지난해 촛불시위는 지금의 대의정치의 변화가 절실하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촛불에서 확인된 대의정치의 변화에 대한 요구가 다시 누구를 바꾸고 누구를 지지하면 될까로 움추러들지 않고, 시민들이 스스로 정치의 주체로 참여할 때만 사회를 바꾸어낼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시민운동은 더 이상 좋은 정치를 만드는 일을 '우리는 중립이니까' 하고 외면하기 어려운 지점에 도달해 있다. 좋은 정치세력을 만드는 일은 이제 우리 사회를 개혁하는 길이기도 하다. 시민운동이 곧 정당이 되고 정파가 되는 일은 없겠지만, 밑바닥에서 좋은 정치인을 뽑고 제대로 된 가치를 지향하는 정치가를 만드는 일에 영향을 발휘하는 것은 가능하다. 또 그래야만 기존의 정당들이 독점하고 있는 현재의 정치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가기 위해 정치적 중립을 넘어 제대로 된 정치를 만드는 일은 이제 피할 수 없는 시민운동의 숙제다. 다가오는 지방선거는 아마도 그 첫 시험대가 될 것이다.


태그:#풀뿌리, #시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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