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어제) 이임사를 통해서 충분히 얘기했습니다."

 

30일 오전 9시 45분 서울 명동 은행연합회관 앞. 이동걸 한국금융연구원장이 평소보다 15분 늦게 도착했다. 이틀 전 사의를 표명한 이동걸 원장에게는 '마지막 출근길'이었지만, 표정은 예상 외로 담담해 보였다. 하지만 기자가 인사를 건네자, "노 코멘트!"라며 복잡한 심경을 감추지 못했다.

 

1991년 금융연구원이 설립된 이래 원장이 임기를 마치지 않고 도중에 사퇴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게다가 그의 임기는 앞으로도 1년 반이나 남아있는 상태였다. 어쩌면 그의 사퇴는 이미 예고된 일인지도 모르겠다. 

 

금융연구원은 은행들의 출자로 설립된 민간 연구기관이지만 정부가 금융감독 정책을 고리로 은행들을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정부 입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럼에도 이 원장은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이후에도 산업자본의 은행 소유를 제한하는 금산분리 완화 등 주요 이슈가 나올 때마다 토론회나 강연 등을 통해 현 정부의 정책기조와 다른 목소리를 내왔다.

 

그는 이임사에서도 "재벌에게 은행을 주는 법률 개정안을 어떻게 '경제살리기 법'이라고 부를 수 있느냐"며 "우리나라는 전세계 선진국에는 유래가 없을 정도로 산업자본의 금융지배가 가장 많이 허용된 나라"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그랬던 그가 결국 사퇴 카드를 꺼내 든 것은 "정부의 적지 않은 압력" 때문이었다. 그는 "이임사를 통해 충분히 얘기했다"고 하지만, 아직 못다한 말이 더 많은 듯 했다. "이임사에서 금산분리 완화 등 정부의 금융정책을 비판한 수위가 굉장히 셌다"는 기자의 질문에 "이임사가 셌다고요? 전혀 그렇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할 말을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지난 28일 연구원 실장들과 점심 식사를 하면서 처음으로 사의를 표명했고, 만류하는 직원들을 뒤로한 채, 곧바로 이임사 작성을 시작해 "하룻만에 완성했다"고 한다. 하지만 하룻만에 생각을 정리해서 쓸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다.

 

연구원 소속 한 박사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 줄곧 이동걸 원장에 대한 직간접적인 사퇴 압박이 있었던 데에 큰 부담을 느낀 것 같다"고 말해, 거취에 대한 그의 고민은 오랫동안 누적됐던 것이었음을 시사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이임사가 작성돼 있었던 셈이다.

 

여느 출근길과 다름없어 보이던 그의 손에는 두 권의 책이 들려 있었다. 그 중 한 권은 '경영학의 아인슈타인'으로 불리는 클레이튼 크리스텐슨(하버드 경영대학원) 교수가 10년전 저술한 '혁신가의 딜레마(The Innovator's Dilemma)'였다.

 

크리스텐슨 교수는 이 책에서 최고의 경쟁력을 갖고 있었던 기업이 시장에서 밀려나게 되는 이유에 대해 디스크 드라이브 산업과 굴착기 산업에 대한 사례분석을 통해 원인을 규명해내고 있다. 그 결과 성공하는 기업의 공통점은 '고객밀착경영'이었으며, 그 기업이 몰락하게 되는 원인 또한 '고객밀착경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 책의 제목을 '혁신가의 딜레마'로 적고 있다.

 

이동걸 원장의 '딜레마'는 무엇이었을까?

 

그가 연구원 직원들에게 보낸 이임사를 통해서 조금이나마 유추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연구원에 대한 이 원장의 '지못미(지켜주지 못해 미안해)'인 셈이다.

 

"원장의 몫은 여러분들이 소신껏 오직 여러분의 학자적 양심과 신념에 따라 연구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는 일입니다. 때로는 외풍을 막아주고, 때로는 여러분을 대신해서 외부의 부당한 압력에 대항해 싸우는 일입니다. 때로는 여러분의 입이 되고, 때로는 여러분의 손과 발이 되는 일입니다. 그것은 연구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지키는 일입니다.

 

이제 여러분을 더 이상 지켜드리지 못하는 미안한 마음을 안고 여러분 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연구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한갓 쓸데없는 사치품 정도로 생각하는 왜곡된 '실용' 정신, 그러한 거대한 공권력 앞에서 이제는 제가 더 이상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기보다는 짐이 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에 금융연구원을 떠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 원장은 기자의 인터뷰 요청에 대해 "지금은 좀 쉬고 싶다"며 "시간이 지난 뒤에 만나자"고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리고는 원장실로 들어갔다. 그의 뒷모습에는 막 전투를 마치고 돌아온 장수의 피곤함이 짙게 배어 있었다.


태그:#이동걸 원장, #금융연구원, #금산분리, #마지막 출근길, #혁신가의 딜레마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