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하 감독의 <쌍화점>이 관객 300만 돌파를 앞두고 있다고 한다. 동성애를 전면적으로 다룬 점, 시대극이라는 점이 얼핏 <왕의 남자>를 떠올리게 하지만, 앞서 언급한 두 가지를 제외하고는 큰 공통점이 없어 보인다.

<쌍화점> 그야말로 '연애종합선물세트'다. 동성애는 물론 이성애, 양성애가 잘 버무려져 있는 이 영화, 지금 자신의 성정체성을 고민하는 당신이라면 영화관으로 가 봐도 좋을 듯싶다.

쌍화점 포스터 홍림과 왕이 전면에, 왕후가 후면에 배치된 포스터.

▲ 쌍화점 포스터 홍림과 왕이 전면에, 왕후가 후면에 배치된 포스터. ⓒ 쌍화점 홈페이지 http://www.ssang

다양한 관객 반응 흥미로워

1월 1일, 대구의 한 영화관. <쌍화점>을 보러온 관객들이 극장을 꽉 채웠다. 내 오른쪽에는 친구(삼십대 여성), 왼편으로는 이십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여성관객들이 줄줄이 앉아 있었다. 앞에는 이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연인, 뒤에는 영화 중간 "내 영화 본다"라고 큰소리로 전화 받는 중년 여성이 포진해있었다. 나를 둘러싼 관객 구성원은 대략 이 정도였다.

영화 초반, 여자를 품을 수 없다는 왕의 고백에 이어 파격적(?)인 키스신이 연출된다. 왕의 현란한 혀놀림이 스크린을 메우자 내 옆에서 이런 반응이 터져 나왔다. "뭔데!" (지면상으로는 강한 경상도 억양을 살리지 못해 유감스럽다.) 키스신이 강도를 더해가자 한 여성이 분노와 혐오를 담아 읊조렸다. "토하겠다."

지역의 문제일까 생각하던 차 서울 소재 삼십대 남성의 반응을 들어봤다. 그 역시 "도대체 뭔지 모르겠더라. 토할 것 같았다"며 "(연인과) 함께 보기에는 너무 민망한 영화"라고 일축했다.

반면 친분이 있는 사십대 초반의 여성은 "내가 마치 왕후가 된 듯 강하게 흥분됐다"라는 감상을 전했다. 또 다른 사십대 여성도 "다른 동성애 영화를 볼 때는 불편한 감이 있었는데 이 영화는 큰 거부감 없이 빨려들었다"면서 "정서적인 부분이 가미돼서 그런 것 같다"고 평했다. 한편 내 또래(이십대 후반)의 여성들은 "너무 신파조라서 별 감흥이 없었다"거나 "유하 감독은 관심이 가긴 하는데 완벽하게 몰입이 안 된다"는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동성애, 이성애 그리고 양성애까지

내가 이 영화에 주목한 이유는 이성애, 양성애, 동성애가 동시에 등장하기 때문이었다. 동성애자 왕, 이성애자 왕후. 이 둘에게 사랑받고 이 둘을 사랑하는 건륭위 대장, 그는 양성애자다.

왕의 모습. 왕은 머리가 길다 뿐이지 남성미가 물씬 풍기는 동성애자다.

▲ 왕의 모습. 왕은 머리가 길다 뿐이지 남성미가 물씬 풍기는 동성애자다. ⓒ 쌍화점 홈페이지 http://www.ssang


먼저 동성애자인 왕. 그는 자식을 얻기 위해 '애인'을 아내에게 보낸다. 애인과 아내의 정사를 지켜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아내를 내어준 분노가 아니라, 너무나 사랑하는 남자를 잃은 슬픔이 담겨있다. 왕의 캐릭터는 여러모로 흥미로운데, 우선 그는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게이(gay)스러움'이 없다. 선이 굵고 잘생긴 얼굴에 당당한 풍채, 목소리까지 호방하다. 그뿐인가. 호위대장을 가르치고 그보다 뛰어난 무예를 겸비했으며, 거문고와 그림에도 능하다. 문무를 갖춘 인물이다.

애인에 대한 애정을 감추지 못해 그에게 줄 선물을 준비해 놓고 설레 하고, 애인을 보기 위해 민가로 내려가는 그의 모습은 사랑에 푹 빠진 소년을 연상시킨다. 그의 사랑은 육욕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스승 혹은 아비의 마음으로 자신의 재능을 전수하고자 하며, 몸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라고 가르친다. 이는 마치 고대 그리스 시대 횡횡했던 사제지간의 동성애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극중 왕후. 송지효는 매력적인 저음으로 캐릭터를 잘 소화해냈다는 평을 듣고있다.

▲ 극중 왕후. 송지효는 매력적인 저음으로 캐릭터를 잘 소화해냈다는 평을 듣고있다. ⓒ 쌍화점 홈페이지 http://www.ssang


다음은 이성애자인 왕후. 원나라 공주였던 그녀는 현재는 고려의 왕후지만 원나라 사신 앞에서 왕이 납작 엎드릴 때 왕의 옆에 함께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 아니라 사신 옆에 서있다. 그는 왕의 아내이면서 동시에 왕보다 높은 권위에 복속되어 있다. 이 같은 권위는 왕의 신하와 정사를 진행하면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그녀는 절대 굴복하지 않는다. 왕이 '쌍화점'을 목놓아 부를 때 박수를 치는 것이 아니라, 정인을 불러내어 격렬한 정사를 감행한다.

오해를 풀기 위해 남자가 자신을 찾아왔을 때 그녀는 치를 것을 다 치른 뒤 손수 만든 쌍화병을 내어준다. 그리고 상대를 '정인'이라고 못 박는다. 이 같은 자기주도성과 당당함은 정사를 치른 뒤 바지춤을 추스르며 바로 반말을 일삼는 변강쇠를 용인하는 마님들과는 사뭇 다르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며, 자신의 것을 지키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가진 이성애자 여성은 끝까지 자신의 정인을 '보호'하려 애쓴다.

거문고를 뜯으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왕과 홍림. 두 사람의 옷색깔이 시선을 잡아끈다.

▲ 거문고를 뜯으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왕과 홍림. 두 사람의 옷색깔이 시선을 잡아끈다. ⓒ 쌍화점 홈페이지 http://www.ssang


마지막으로 양성애자인 홍림. 정성을 다해 왕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고, 약초물을 다려내는 그에게서는 사뭇 여성성이 풍긴다. 반면 전하를 보위하라고 포효하는 모습에서는 남성미를 엿볼 수 있다. 그는 발기되는 '성기'를 가졌지만 동시에 감싸주고 싶은 '구멍'을 가졌다. 이것이 동성애자, 이성애자 모두에게 발효되는 그의 매력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그는 왕에 대한 사랑을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는 대상에 대한 충성이라고 생각하고, 왕후와 잠자리를 하는 것도 왕의 명령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순간에도 그는 타액을 섞고 몸을 섞는다. 몸과 마음을 다해 그들을 사랑한다.

하지만 홍림에게는 왕과 왕후가 가진 권력이 없다. 껍데기뿐이라고는 하지만 왕이 가진 권력은 고사하고, 무예 면에서도 왕에게 뒤진다. 이성 간의 연애에서는 남성이 여성을 지켜주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그는 왕후에게서 보호를 받는다. 내 눈에는 그가 왕에게 칼을 겨누는 것이 '자신의 무능력함에 대한 분노'로 보였다. 또한 "자신을 정인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느냐"는 왕의 질문에 대한 대답 역시 사랑했던 사람에게 '상처주고 싶어서' 뱉은 날선 말로 해석됐다. 감독은 이런 홍림의 마음을 숨 거두기 직전의 시선으로 대변한 것이 아닐까.

웃음이 터지는 순간을 들여다보면

1월 2일 나는 다시 극장을 찾았다. 적어도 '토하겠다'는 반응이 없길 바라며 구석진 자리에 몸을 낮춰 영화는 물론 관객들의 반응을 살폈다. 전날과 같은 지점에서 웃음이 터진 것은 두 번이었다.

우선 왕이 정성을 다해 거문고를 뜯으며 노래하는 장면. 그의 풍부한 표정과 목소리에 관객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감정의 과잉, 그것이 관객들에게는 낯설었던 모양이다. 이는 자신에게는 순정을 받친 사랑이지만 타인들에게는 '더러운 남색'이나 '사랑 놀음'으로 해석되는 동성애자의 면면이지 않을까.(이런 해석 또한 몰입의 과잉으로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감안하고 말하는 것이다.)

또 다른 지점은 왕후의 발언. 서고 한 구석에서 다양한 체위로 정사를 치른 뒤 그녀는 근엄하게 말한다. "내일 자시에 다시 오겠다." 얼마나 좋았으면 내일 밤 다시 오겠다고 하겠는가. 하지만 관객들은 그 여자의 '밝힘증'에 낄낄댐으로 반응했다. 여자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고 수줍게 퇴장해야 한다는 법이 있는가. 이제 막 눈을 뜬 환락을 재차 맛보겠다는데 왜 웃는단 말인가. 자신의 욕망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 불편해서? 그렇게 말하는 게 부러워서? 너무 대놓고 밝혀서? 어떤 남성들은 '저런 여자를 만나고 싶다'고 욕망하는 한편 다른 남성들은 '저런 여자는 밥맛이다'라고 생각할 듯하다.

후손을 낳아야 한다는 족쇄 혹은 울타리

영화에서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가 공존하듯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도 이 셋은 공존한다. 다만 이성애가 수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 밖에 없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빙산 옆에 뜬 얼음 부스러기처럼 동성애가 존재한다고들 생각하면서 그것은 '나와 별개'라고 선을 긋기에 바쁘다. 그렇다면 왜 이런 양상이 영화 속에서만 가능할까.

대등한 권위를 가진 듯 보이는 왕과 왕후. 이들과 홍림은 '후손'을 낳아야 살아남을 수 있는 공동운동체다.

▲ 대등한 권위를 가진 듯 보이는 왕과 왕후. 이들과 홍림은 '후손'을 낳아야 살아남을 수 있는 공동운동체다. ⓒ 쌍화점 홈페이지 http://www.ssang


왕이 자신의 애인을 아내에게 보낸 이유가 무엇인가. 왕후가 왕의 애인과 밤을 보내면서도 당당한 이유가 무엇인가. 건륭위 대장이 애인의 아내와 자면서 정당함을 확보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후손을 봐야 한다'는 강력한 명분 때문이다. 후손이 없으면 이 셋은 모두 자신의 목숨과 지위가 보장되지 않는다. 살기 위해서는 자식이 필요하고, 성기능이 원활한 사람이 총대를 메는 셈이다. 이 세 사람의 아슬아슬한 사랑이 공존할 수 있는 것은 '후손'이라는 족쇄 때문이며, 이는 이들을 묶어주는 '울타리'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이 셋은 '운명공동체'다.

우리가 사는 현실에는 이같이 강력한 족쇄가 없다. 사랑이 끝난다고 세상이 끝나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조금씩 알아간다. 사랑이 끝나도 계속 사랑하기 위해, 많은 이성애자들은 결혼이라는 울타리를 선택한다. 가족은 밖에서 헤매다 돌아가게 되는 휴식처이며, 몸서리치면서도 얽혀야 하는 견고한 공동체다.

반면 동성애나 양성애는 개인의 순정과 양자 간의 신뢰만으로 유지된다. 한 인간이 인격적으로 얼마나 훌륭해야 제도에 복속되지 않고서도, 욕망과 신의의 줄타기에서 낙오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런 면에서 후손을 낳아서 왕권을 강화하라는 원나라의 압박은 아슬아슬한 감정을 견고하게 해주는 매개체로 보이기도 한다.

모든 사랑의 시작은 미약하다. 하지만 고난을 극복할수록 그 사랑은 창대해진다. 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다. 지금은 토하겠다고 반응하거나 읍소해도 좋다. 하지만 어느날 문득 자신에게 예기치 못한 사랑이 찾아온다면, 그 변화에 토하거나 웃지 말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으면 한다.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은 얄팍한 상상 이상으로 다양하며, 그래서 사랑은 아름답다.

덧붙이는 글 문화미래 <이프> http://www.onlineif.com 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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