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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 레이스 시작

 

12월 28일 오전 우리는 남극의 관문인 킹조지섬을 통과한 지 하루 만에 남극 대륙의 끝 부분에 상륙을 했다.

 

'남극 레이스'라고 해서 기존 사막 레이스와 같은 횡단 개념의 대회는 아니다. 만약 기존의 방식대로 레이스를 한다면 집단 줄초상이 나는 곳이 남극이다. 그래서 대회는 여객선을 타고 남극 대륙 일부분과 주변의 섬을 돌아다니며 기상 상태와 현지 조건을 살핀 후 상륙이 가능하면 내려서 4~8시간 이상의 구간을 달리며 전체 레이스의 거리를 합산하여 순위를 따지는 방식으로 진행이 된다.

 

기존 대회와 비교했을 때 뭔가 2% 부족할 수 있다. 하지만 남극이란 곳은 언제 어디서 무슨 사고가 터질지 모르는 시한 폭탄 같은 곳이다. 그래서 좀더 목숨을 내놓고 본토 깊숙한 곳에서 레이스를 할지 아니면 좀더 안전하게 본토 외곽에서 레이스를 할지는 항상 모두의 고민거리인 것 같다.

 

올해 나의 배 번호는 작년과 같이 맨 마지막 번호다. 작년에는 14번, 올해는 27번. 행운의 숫자 7번이 있다는 게 왠지 기분이 좋다. 작년에는 비행기로 보낸 용품 가방이 도착을 안 해 장비와 비상식량 부족으로 고생 바가지를 했던 경험이 있었는데, 올해는 너무나 깔끔하게 모든 일들이 진행되어 정말로 행운이 찾아올 것 같은 기분이다. 더욱이 아직까지 뱃멀미란 놈과 상종도 안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대회의 첫 번째 마당은 쿠버빌에서 펼쳐졌다. 쿠버빌은 작년에 달리다가 '어떻게 빠졌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작은 크레바스(빙하의 갈라진 틈)에 빠져 놀라기는 했지만, 정상에서 바라보는 주변의 경치가 환상적인 곳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상을 오르다 크레바스를 발견해 안전을 위해서 중도에 올라가는 걸 포기했다. 대신 아래쪽에서 팽귄 서식처를 교묘히 피해 달리기를 했다.

 

내가 왜 남극에 왔냐 하면…

 

 

아, 그리고 내가 왜 작년에 이어서 다시 한번 남극을 갔는지 설명이 필요한 것 같다.

 

사실 나의 이번 남극 대회는 계획에도 없던 일이다. 작년에 대회 참가해서 갖은 스트레스와 육체적 고통으로, 내 우윳빛처럼 뽀얀 부드러운 아기 피부가 한달 만에 연로한 아저씨의 모습으로 팍삭 늙어버린 후유증이 있었기에 다시는 안 간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각장애인 송경태씨의 도우미로 선정되고 동행 취재를 하는 MBC TV의 협조 요청, 에이전트라는 위치로 인해 제대로 저항 한번 못하고 거의 끌려오다시피 왔다.

 

아니, 내가 무슨 '철인 28호'인가? 사하라 대회 마치고 회복도 없이 2주 만에 다시 남극을 가야 한다고 하니, 나의 망가진 피부 재생은 끝끝내 포기를 해야 한다는 걱정이 먼저 앞선다.

 

대회를 마친 지금, 사하라와 남극 자외선에 노출되어 새까맣게 타버린 나의 손과 얼굴로 인해 깊은 시름에 잠겨있다. 흑흑흑. 내 고운 피부 돌리도….

 

구르고 또 구르고, 넘어지고 또 넘어지고

 

 

오르락 내리락 언덕을 오르고 내리고, 그리고 한없이 넘어지고 구르고…

 

시각 장애인 송경태씨와 기존에 사하라, 고비사막에서 도우미로 같이 달린 적은 있지만 눈 속을 뛰는 건 서로 처음이다. 눈이 허벅지까지 오기에 사막 같이 옆으로 서서 함께 달릴 수가 없다. 몇 번 시도를 했지만 도저히 힘들어서 못 하겠다.

 

다른 선수들이 달리며 만들어 놓은 좁은 길을 따라서 달리지만 조금만 균형이 깨지면 여지없이 넘어지고 구르기 일쑤다. 눈 속은 군데군데 얼음 지역이 있기에 한번 들어간 발이 잘 안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한번은 언덕을 내려가다 뒤에서 배낭을 잡고 오던 송경씨가 넘어지면서 나를 잡아 당겼다. 순간 몸이 붕 뜨며 떨어졌는데, 왼쪽 발이 눈 속에서 빠지지 않고 몸만 떴다가 무릎이 뒤틀려서 떨어지는 사고가 생겼다. '아뜨', 무릎 쪽에서 '뻑'하는 소리가 들리고 순간 통증이 몰려온다.

 

난 그때 무릎이 탈골되는 줄 알았다. 정신을 차리니 다행히 무릎은 서로 붙어 있었고 움직일 수 있었다. 하지만 대회를 마친 지금까지 뒤틀렸던 왼쪽 무릎은 아직 정상이 아니다. 분명 인대 손상이 예측된다. 병원을 가야 하는데 여기 저기 손볼 곳이 계속해서 늘어나는 것 같다.

 

아름다운 남극의 경치를 즐기는 것은 남의 길잡이를 하는 처지에서 커다란 사치로 다가온다. 고개 처박고, 깊이 빠지는 눈길을 발로 다지며 안전한 길을 찾아서 잘 갈 수 있도록 인도를 해야 한다는 생각만이 가득하다.

 

 

첫번째 쿠버빌, 두 번째 네코하버 코스까지는 어떻게 하면 눈 길에서 덜 넘어지고 잘 달릴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연구하느라 레이스에 대한 기억은 잘 안 난다. 사진도 몇 장 못 찍어서 현장의 기록도 별로 못 남겼다. 그 상태에서 남과의 경쟁이란 우리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정상적인 다른 참가자들과 달리 우리는 우리만의 생존을 위한 처절한 레이스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구간을 마치고 배로 돌아오면 우리는 거의 기절을 했다. 거짓말 안 하고 나는 정말 탈진해서 쓰러져 한동안은 아무 것도 못했다. 사막에서도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추운 남극에서 눈 속을 도우미로 뛰어야 한다는 건, 몸 안의 모든 에너지를 전부 불 태우고 또 태워야 하는 일이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천사가 아니기에 내 몸이 힘든 상태에서 다른 사람의 도우미를 한다는 것이 몹시 부담스럽고 힘들었다. 고백하지만 3주간의 도우미 기간 동안 인간이기에 느낄 수 있는 고뇌와 번민에 여러 번 휩싸였다.

 

레이스는 기본이라 하더라도 특히 돌아 올 때 심한 뱃멀미에 시달리고 설맹증에 걸려 한쪽 눈이 안 보이는 상태에서 또 다른 사람의 눈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역시 힘든 일이었다. 그래도 주어진 책임이 막중하기에 꾀를 부리거나 하지는 않고 최선을 다했다.

 

송경태씨의 '사막 레이스 그랜드슬램' 달성에 성공했으며, 방송촬영도 마무리했고, 커다란 사고도 피해서 돌아왔고, 어쨌든 결과가 좋아서 다행이란 생각뿐이다. 나에게 남겨진 눈, 무릎 부상의 후유증은 영광의 상처로 남겨도 아쉽지 않다.

 

- 마지막 이야기는 다음에

덧붙이는 글 | 사막의아들 유지성 / www.runxrun.com 

사막, 트레일 레이스 및 오지 레이스 전문가. 칼럼니스트, 사하라, 고비, 아타카마 사막, 남극 레이스, 히말라야, 아마존 정글 마라톤, Rock and Ice 울트라 등의 한국 에이전트이며, 국내 유일의 어드벤처 레이스 기획자로 활동 중이다.


태그:#남극, #사막, #남미, #여행, #마라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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