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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 성(性)이 바뀐다면 해보고 싶은 일이 있으신가요?(안진영)

"아침 6시까지 술 진탕 마시고 곤드레만드레 취해서 자고 싶어요"(권영옥)

"주먹세계에 뛰어들어 패싸움도 싸움질도 실컷 하고 여자들도 때리고… 그중 제일은 청량리 오팔팔에 가고 싶어요"(이혜민) -서시 동인지 창간좌담 '몇 토막' 

 

성남과 분당지역에 살면서 한 달에 두 번씩 스스로 창작한 시를 합평하고 있는 아줌마 시인들이 이유 있는 반란을 일으키고 있다. 이들은 저마다 그 누구도 함부로 흉내 내지 못하는, 그야말로 톡톡 튀는 개성이 빛나는 여성들로 다음 인터넷 카페 <시인회의>에서 활동하는 시인들이기도 하다.  

 

2003년 <시경>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한 권영옥을 비롯해 김다음(서시동인), 노정숙(2000년 현대수필), 손경(2003년 심상), 심희수(서시동인), 안진영(2002년 심상), 이혜민(2003년 문학과비평), 정애영(서시동인), 한필애(1999년 월간문학)가 이들. 이들이 시를 쓰게 된 시기도 저마다 다르다. 학창시절부터 시를 쓰기 시작한 분이 있는가 하면 30대 중반에 뒤늦게 시에 뛰어든 분도 있다. 

 

이들 여성시인들이 좋아하는 시인들도 가지가지다. 백석 시인에서부터 월북한 시인 조운, 이용악, 정현종, 고정희, 황진이를 비롯해 요즈음 한창 열심히 활동하는 시인 오봉옥, 이정록, 나희덕, 김선우, 손택수, 이면우 등. 하지만 이들은 시에 대한 열정과 오랜 우정으로 저마다 조금씩 다른 시세계를 서로 부추기며 하나로 똘똘 뭉쳐 있다.  

 

삶 속에서 시가 태어난다

 

-요즘 시가 대중에게서 멀어지고 있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안진영)

"난해한 시, 억지로 꾸미고 만든 시가 대중을 밀어내는 것 같다"(노정숙)

"시적 품격이 시인에게 있든 영상매체에 있든 우리 시인들은 각고의 노력으로 독자들의 욕구를 해갈시켜줘야 한다"(권영옥)

"저는 그것도 새로움의 측면에선 이바지하는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노정숙)

 

"자급자족하는 시작태도와 또 주체적 독자를 길러내지 못하는 문학교육의 배경도 한 몫 하는 것 같다"(손경)

"쉽게 이해할 수 없고 공감할 수 없어서 그렇다"(김다음)

"너무 난해하고 복잡한 시를 쓰기 때문이다"(이혜민)

 

"속도가 빠르고 머리 아픈 걸 싫어하는 대부분 사람들은 직설적인 화법으로 쓰인 글을 좋아한다"(정애영)

"소설은 중학교만 졸업해도 읽어서 알 수 있다. 시는 고등학교를 졸업해도 잘 모르는 것 같다"(한필애) -서시 동인지 창간좌담 '몇 토막' 

 

다음 인터넷 카페 <시인회의>(발행인 강정숙) 몇 개 동인그룹 중 여성시인들로 이루어진 <서시> 동인들이 첫 동인지 <풍경 뒤>(시인회의)를 펴냈다. 이들 여성시인들은 이번 첫 동인지 창간좌담에서 "삶 속에서 시가 태어난다"(이혜민)고 말한다. 시가 곧 삶이요, 삶이 곧 시란 것이다. 하지만 그 삶을 바라보는 눈은 미세하나마 차이가 있는 듯하다.  

 

정애영은 시를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은 장면의 재생"이라고 말한다. 손경은 "정서와 경험만으로는 시가 건조해질 것"이라고 못 박고, 김다음은 "개인이 지닌 취향이나 환경이 시 속에 녹아 시인과 작품의 거리를 좁힌다"고 힘주어 말한다. 한필애는 "삶 속에서 시를 건진다"고 말하고, 권영옥은 "시는 시인 본인이거나 말을 빌린 시인의 대리인"이라고 설명했다. 

 

이 동인시집에는 권영옥 '봄의 밑면' 외 7편, 김다음 '길을 묻는 밤' 외 7편, 노정숙 '소금쟁이' 외 7편, 손경 '소나기' 외 7편, 심희수 '홀로 지는 꽃' 외 7편, 안진영 '마리화나를 위하여' 외 7편, 이혜민 '어쩌나 그 아이' 외 7편, 정애영 '침묵에도 칼이 있다' 외 7편, 한필애 '집시여인' 외 7편을 합쳐 모두 72편이 눈을 두리번거리고 있다.

 

 

풍경, 그 뒤를 출산하는 여성시인들  

 

이제 이 여성시인들이 오랜 산고를 거쳐 이 세상에 첫 출산한 동인지 <풍경 뒤>에 실려 있는 시를 살펴보자. 이 동인지 제목이 된 <풍경 뒤>는 김다음 시 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이 시 "잘 마른 고추가 부러워 / 아쉬운 눈길 보내며 오가는 사람들 / 뙤얕볕 사이로 한 줄금 바람도 앉았다 간다"에서 드러나듯이 이들은 풍경 그 뒤를 살핀다. 풍경 그 속내와 그림자까지 한꺼번에 다 잡아낸다는 그 말이다.

 

권영옥은 황태가 겨울 차디찬 바람에 "코끝이 맵싸게 얼고, 녹고, 다들 건조되어가는 모습들"(황태)을 바라보면서 황태가 살아온 모습을 추슬러낸다. 황태가 거슬러온 "오호츠크해에서의 격랑의 밤"을 떠올리다가, 그때부터 "건너편 어물전에 펼쳐놓은 얼굴들을 찬찬하게 살피는 버릇이 생겨났다". 풍경 뒤처럼 황태 뒤를 바라보는 것이다.

 

노정숙은 "가늘고 긴 다리로 내달리"는 소금쟁이, "잔물결 일으키며" 물 위를 잽싸게 내빼는 소금쟁이에서 마치 어릿광대가 유혹하고, "어라, 지들끼리 업고 희롱"(소금쟁이)하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는다. "슬몃 던지는 그의 눈짓", 소금쟁이 눈짓에서 "나도 따라 통째로 출렁"거리는 것만 같다. 소금쟁이와 시인이 하나가 되는 순간이다. 

 

손경은 "하루를 가누기도 힘들어 / 햇살 한 줌 죽을 둥 / 살 둥 / 끌어당기고 있는"(풀잎) 풀잎을 바라보면서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 예수의 마른 팔"을 떠올린다. 깡마른 예수 마른 팔처럼 말라가는 저 풀잎도 "언젠가는 / 온몸에 햇살 찍어 바르"는 봄을 맞이할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풀잎 뒤에 올 새로운 세상을 애타게 기다리는 것이다.  

 

심희수는 "하루 아침에 피붙이에게 따돌림 당한" 아홉 살 머슴아, "가슴앓이 무게에서 얻은 알코올 중독"으로 술병을 나발 불다 죽은 머슴아에게 진혼가를 바친다. 이제 고단한 육신을 놓아버렸으니 저승에서는 "용수 치고 미꾸라지 메기 욕심껏 잡거라"(영안실 206호)며, 아홉 살 머슴아에게 절대자유를 바친다. 그 절대자유가 이 삭막한 세상에서도 하루 속히 이루어지길 간절히 빈다.

 

 

십자가에 나를 발가벗겨 매달아 보고 싶다

 

안진영은 3행으로 된 산수유란 짧은 시에서 그 누구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이 고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자신을 본다. "겁 없이 / 맨발로 걸어 나와 세상"(산수화)을 연 산수화가 자신처럼 "장하다". 추운 겨울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노오란 꽃망울을 예쁘게 내민 산수유, 그 산수유처럼 꿋꿋하고 굳세게 살고 싶다. 이는 그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결코 무너지지 않겠다는 것과 같다.

 

이혜민은 십자가로 얼룩진 것 같은 이 힘겨운 세상에 스스로 십자가에 매달려 보고 싶다. 못 끝으로 열십자를 새기고 "그 위에 나를 발가벗겨 매달아"(열십자) 보고 싶다. 그리하여 "앞 사람 가슴에 쾅쾅, / 세치 혀로 박아놓은 크고 작은 못들 / 구부러진 것은 곧게 펴고 / 녹슨 것은 조심조심 일일이 빼 / 내 마음에 촘촘히 박음질" 하고 싶다. 그렇게 스스로를 내던서라도 어두운 이 세상을 환하게 이끌고 가고 싶다. 살신성인처럼.

 

정애영은 이 고된 세상살이를 담쟁이와 상수리나무에 빗대고 있다. "발톱을 살 속 깊이 박아야"(담쟁이와 상수리나무) 상수리나무 몸뚱이에 뿌리내릴 수 있는 것처럼 이 세상은 온통 먹고 먹히는 생존경쟁으로 얼룩져 있다. 여기서 상수리나무는 시인 자신이다. 담쟁이넝쿨은 끊임없이 시인 자신을 갉아먹으며 살아가는 가족일 수도 있고, 시인이 살아가고자 하는 올바른 삶을 가로막는 정치 경제 사회적 장애물이기도 하다.  

 

한필애는 금강산 옥류관에 갔다가 옥류관에 있는 북한 봉사원들이 자본주의에 물들어 그 순수성이 사라지는 것을 몹시 안타까워한다. "전날 구입한 평양냉면 식권을 내밀었더니, 선생님들! 여행하시느라 힘들이 많이 들었을 건데 냉면만 드시면 기운이 없어 어쩔끼라요"(금강산 옥류관) 하는 말이 몹시 거슬린다. 어쩌다 이 사람들조차 이렇게 변질되어버렸을까. 모든 것을 물질로 따지는 자본주의가 더없이 아니꼽고 얄밉다.     

    

<서시>동인들이 펴낸 첫 동인시집 <풍경 뒤>는 우리들이 숨 가쁘게 살아가면서 미처 느끼지 못하고 그냥 넘어갈 수 있는 풍경 뒤 풍경이다. 이들은 풍경 뒤에 드리워진 또 다른 세상을 끄집어내 사람들 삶을 차분하게 되짚어본다. 이들은 그 되짚음 속에서 참 시를 찾아내고, 참 삶을 맛보고, 참 세상을 꿈꾼다.    

 

시인 오봉옥은 "사람이나 그 어떤 모임을 두고 아름답다는 형용사를 쓰기가 쉽지 않다. 서시 동인들에게만은 거침없이 아름답다는 형용사를 쓰고 싶다"며 "서시 동인들과 있다 보면 내 스스로 정화된 느낌을 받는다. 나이 든 소녀들이 그들이어서 그렇고, 자기 자신보다 타자를 배려하는 데 익숙한 그들이어서 그렇다"고 평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유포터>에도 보냅니다


태그:#서시 동인, #풍경 뒤, #시인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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