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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풍경소리가 은은하게 산사를 깨운다. 며칠 전에 내린 폭설로 주변은 여전히 눈세상이다. 눈이 50cm 내리면 우리의 죄도 50cm 덮힌다고 했다. 그러나 산촌에 사는 사람들은 그 만큼 덮어야 할 죄가 없다. 다만 죄가 있다면 정부가 소 키우라 해서 소 키웠고 돼지 키우라 해서 돼지 키운 죄 밖에 없다.

 

아우야, 이참에 머리를 깎자

 

하늘은 팍팍하게 살아가는 산촌 사람들의 그 죄마저 덮어 버리고 싶었던 것일까. 모질게 살아가는 이들의 아름다운 죄를 덮어 주기 위해 하늘은 닷새 전 이 지역에 많은 눈을 내렸다. 나무 껍질처럼 단단하게 살았던 인생들이 눈물로 뿌린 눈이라 쉬 녹지도 않는다. 그래서 더 서러운 눈이다. 

 

그러나 하늘도 아는 게다. 정작 죄 숨기기 급급한 이들에겐 눈을 내려 주지 않는다. 죄를 얼굴에 덕지덕지 달고 살면서도 도덕인과 교양인인양 살아가는 그들의 뻔뻔함을 하늘도 아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사는 마을엔 하늘도 눈을 내려주지 않았다.

 

오늘(26일) 새벽 3시가 넘은 시간, 방문 두드리는 소리가 크게 났다. 막 잠이 들었던 터라 눈을 뜨는 데 시간이 걸렸다. 문을 여니 다른 방에서 묵고 있는 스님이다. 스님의 손엔 캔맥주 한박스가 들려 있다.

 

"스님 이 새벽에 어쩐 일이세요?"

"법당에 올라가 부처님께 아침 인사 드리고 왔지. 아침에 떠나는데 아무래도 얼굴을 볼 수 없을 것 같아서 들렀어."

"맥주는 뭔가요?"

"글 안 될 때 마셔."

 

스님이 들고온 맥주는 스님이 차처럼 드시는 곡차였다. 하루 한 끼도 공양을 하지 않던 스님. 그의 하루는 곡차를 마시는 것으로 시작해 그것으로 하루를 마감했다. 어젯밤에도 스님의 손에서 술잔이 떠나질 않았었다. 스님은 방에 앉자 가지고 온 캔맥주 하나를 땄다.

 

"곡차 하기엔 이른 시간 아닌가요?"

"새벽에 마시는 곡차가 보약인 것이여."

"오늘 떠나신다고요?"

"눈이 녹았다니까 이젠 돌아가야지."

 

스님은 폭설이 오기 전에 절집을 나섰다가 눈 때문에 돌아가지 못했다. 오래 전 인사동에서 몇 차례 인사를 나눈 적 있는 스님을 아주 오랜만에 머물고 있는 산사에서 만난 것이다. 다들 가족을 찾아 떠나는 성탄이브와 성탄절에도 스님과 나는 술잔을 마주 놓고 앉았다.

 

"오늘은 스님과 저 둘밖에 없네요."

"그래서 슬프냐."

"독거노인처럼 고적해서 그렇지요. 스님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저는 속인 아닙니까."

"혼자라서 그렇다는 말이로군. 곧 좋은 도반을 만나게 될 테니 기다려보게."

 

눈이 가득한 창밖을 바라보며 그런 대화를 나누었다. 그날 바람이 어찌나 강하게 불던지 골짜기는 바람 우는 소리로 엉엉 흔들렸다. 가장 낮은 곳에서 태어난 아기 예수를 축하하기 위한 성탄절 오전의 일이었다.

 

"이보게 아우."

"예, 스님."

"힘들고 외로우면 흐르는 강물을 봐. 거기엔 우리네 인생이 있어."

"그러겠습니다."

"아우, 각기득소라고 알지?"

"예, 어떤 모양새의 돌도 제 스스로 가야 할 자리가 있는 법이라는 말입니다."

"그래, 그게 인생이야. 아우도 아우의 인생이 있으니 너무 힘들어하지 말아."

 

 

스님은 나를 아우라고 불렀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형님이라는 호칭을 쓰진 않았다. 형님보다는 스님이 내겐 더 정신적으로 위로가 되기 때문일 터였다. 스님은 첫날 술잔을 기울이던 자리에서 내게 머리 깎을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세상이 절집인 걸요"라 했다. 스님은 그때 "그래, 유발승도 스님이니 그렇게 살게" 했다. 

 

"아우."

"예."

"형이 무섭지 않니?"

"예, 전혀 무섭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형을 무서운 스님이라고 하는데 넌 무서워하지 않는구나. 왜지?"

"두려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걸 버리고 나니 두려움이 사라졌다

 

그랬다. 나이 마흔을 넘기면서 앞으로 살아지는 삶은 덤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두려움이 사라졌다. 그런데 이번엔 모든 것을 잃었다. 덤덤한 내 일상에 번개가 내리친 것이다. 두렵기보다는 오히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서울 생활을 처음 시작하면서 청량리에 있는 달동네에 살았다. 개미집 같은 달동네엔 골목도 많았다. 길을 한번 잃으면 월세방도 찾지 못할 정도로 멀미 나는 길이었다. 그러다 일산으로 이사를 했고 돼지 키우는 집에서 파리떼와 함께 살았다. 그나마 숲을 볼 수 있어 좋았던 시절이었다.

 

그 집을 떠나면서 갈 곳이 없어졌다. 하는 수 없이 북한산에 있는 절집으로 들어갔다. 절집을 떠나서는 반지하 방에 살았다. 사람들의 하체만 바라보며 몇 해를 살았다. 또각거리는 신발 소리만 들어도 지나가는 이가 누구인지 혹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을 정도의 세월이었다.

 

반지하 방을 나와서는 옥탑방으로 갔다. 수직상승의 효과는 컸다. 모든 사람과 건물이 내 발 아래에서 머물렀다. 그러나 거대한 공동묘지를 보는 듯한 도시의 밤은 나를 쓸쓸하게 만들었다. 하늘의 별이 지상으로 모두 내려온 착각을 하며 밤을 보내고 나면 창밖의 현실은 우울했다. 그래서 도시를 떠났다.

 

지금 머물고 있는 산사에 오기까지 내 삶은 블랙에 가까운 회색빛이었다. 소설가의 삶치고는 양분 듬뿍한 길을 걸었지만 속인들은 나를 불편해하거나 기이하게 바라보았다. 각기득소(어떤 돌도 박힐 곳이 있다는 말로 모든 사람이 다 제 역할이 있다는 뜻의 불가용어)를 모르기에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아우야. 내가 호를 하나 지어준다고 했지? 하나 지었으니 종이와 펜을 가지고 오거라."

 

캔맥주 하나를 비운 스님이 종이에 이름 하나를 썼다.

 

"아우 호는 오늘부터 송암(松巖)이다. 그러니 앞으로 거대한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소나무처럼 힘차게 살거라."

"너무 외로운 이름입니다."

"아니다. 주변에 다른 나무와 돌들 그리고 햇볕과 물이 언제나 아우와 함께하니 전혀 외롭지 않을 게다. 그리고 구불구불한 몸을 한 소나무가 바위에 홀로 있어 계곡이 더 아름다운 법 아니겠냐."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며칠 전 스님께서 "아우도 나이가 있으니 이젠 호를 가져야 할 듯 싶으이" 그러더니 고민 끝에 지은 새로운 이름이 '송암'이다. 스님은 그때부터 나를 송암이라고 불렀다.

 

"송암. 어머니께 안부 인사 자주 드려."

"예."

 

스님은 말끝에 눈시울을 적셨다. 오래 전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9살에 절집에 들어와 절밥을 먹은지 50여 년. 그 긴 세월동안 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것은 어머니였다. 절집에서 은사님들로부터 신동 소리 들으며 자랐던 스님이었다. 시인이 되었고 한국화에 일가를 이루었지만 어머니에 대한 사랑만큼은 잊지 못하고 있었다.

 

"송암, 내가 왜 석류를 좋아하는지 아는가?"

"석류를 보면 어릴 적 뵈었던 어머니 생각이 나. 참 고운 분이셨지."

 

스님이 내게 어머니를 잘 챙겨 드리라고 만날 때마다 말하는 것은 자식에 대한 회한일 것이었다. 삭발승이 되었지만 잊히지 않는 인연의 끈. 그것이 새벽 시간 스님의 눈시울을 붉게 만들었다.

 

 

볼펜값이라며 건낸 수표 두 장 "좋은 글 쓰게"

 

그때 누군가 범종을 쳤다. 간밤 멀리서 온 스님이 다른 방에서 머물렀는데 그가 범종을 치는 모양이었다. 은은하게 퍼지는 종소리를 들으며 물었다.

 

"스님, 연말인데도 세상은 여전히 혼란입니다. 교사들이 해직당하고 아이들이 울고 있습니다. 국회는 개판이 된 지 오래고, 4대강에 대한 삽질이 다시 시작되고 있습니다."  

"대화와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세상이니 그냥 냅두게. 끝까지 가봐야 새판이 짜지지 않겠나. 고통이라는 것은 클수록 얻는 게 많아지는 법이야."

 

모든 걸 잃어야 새로운 것을 얻는 법이란다. 하지만 그 고통은 어찌 감내해야 하는지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졌다. 

  

"국민들의 고통이 큽니다."

"그것도 끝까지 냅두게. 그래야 정신이 들 테니까."

 

고통을 겪어야 정신을 차린다는 말은 맞지만 그 예상은 번번히 빗나갔다. 이미 공범이 되어 버린 국민들은 스스로 자신에게도 역사에 대한 큰 죄 있음을 밝히지 않았다. 어른이라는 게 그래서 '야합의 동물'이라는 소리를 듣는 모양이었다.

 

새벽 6시. 아직 어둠은 창밖에 머물러 있었다. 이제 가야겠다며 스님 스스로 '누더기'라고 부르는 두루마기를 걸쳤다. 거리에 버리면 개도 잠자리로 쓰지 않을 누더기 옷은 차라리 옷이 아니라 피난민들이 걸치던 다 떨어진 이불과도 같았다.

 

"옷이 많이 낡았습니다."

"스님의 옷이 잿빛인데 그건 죄인이라는 뜻이거든. 죄인이 좋은 옷을 입고 다니면 세상이 욕해. 이 정도도 내겐 과분하네."

 

옷 고름을 맨 스님이 바랑에서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한참 뒤적거리더니 꼬깃꼬깃 구겨진 돈을 찾아냈다.

 

"좋은 글 쓰게. 볼펜 값이야."

 

돈은 십만원권 수표였다. 스님은 수표 두 장을 내게 내밀며 좋은 글을 쓰라고 했다. 그것을 받아드는데 가슴이 먹먹했다.

 

"형이 아우한테 주는 거니 받아."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쓰겠습니다."

"그래, 그럼 되는 거야."

"제 작품 보려면 건강하셔야 합니다."

 

스님은 신새벽 마중 나온 차를 타고 백두대간을 넘었다. 그래도 천년고찰의 주지 신분이 아니던가. 제자도 많고 후학도 많지만 늘 낮은 자리에서 불쌍한 이들과 어깨동무를 하는 스님의 행색이 오랫동안 내 방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스님이 남긴 캔맥주 하나를 따서는 마당으로 나갔다. 훅 밀려오는 찬공기와 맥주를 번갈아 마시며 하늘에 떠있는 별을 하나 두울…헤아렸다. 

 

 

태그:#선문답, #산사,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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